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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12 조회수2,157 추천수0 반대(0) 신고

 

† 요한복음 14장 연구/ (2) 예수님의 고별사/ 2020년5월10일/주일복음말씀묵상

                                / †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요한14,6절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고 말한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길”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이 주시는 “진리”가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도 그리스도임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 우리의 진리,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안에서는 그분과 관련된 모든 것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그분의 아들이시기도 하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외에 그 밖의 많은 것들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주신다.

 

오늘날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많은 경우, 우리는 단지 용어나 의문(儀文)이나 의식이나 교리에 붙들려서, 우리에게 아무런 영적 실재가 되지 못하는 것들을 주로 보고 또 만진다. 우리는 진실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그분의 아들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의 특성은 그 근원과 깊이와 풍성들이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방법이나 교리나 능력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아는 것이 길이요, 하느님의 아들을 아는 것이 진리요, 하느님의 아들을 아는 것이 생명이다. 우리의 능력은 그분의 아들을 아는 데에서 나온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전부가 그분의 아들이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들이 아니다. 모든 관건은 하느님의 아들을 아는 데 있다.

 

<그리스도는 길이시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길은 방법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핵심은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도달하기 위한 방법일 뿐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분을 얻을 때 우리는 “길”을 얻으며, 그분을 소유할 때 우리는 “방법”을 소유한다.

 

많은 참된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참된 믿는 이는 최소한 한 번은 이 길을 체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 길이란 단순히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것은 결코 그분 밖에 있는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방법도 아닌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가 처음 구원받을 때로부터 내내 계속하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이들의 체험을 듣고 혹은 영적인 독서들을 귀하게 느끼지만, 다른 이가 만진 주님은 보지 못하고 방법만을 본다. 그 결과 우리는 패배에 패배를 거듭한다. 그 주된 원인은 우리가 길이신 주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 홀로 길이시고 방법이시다. 길은 그분을 벗어나서는 없는데, 이는 그분이 친히 길이시기 때문이다.

 

주님 자신을 믿는 것과 공식을 믿는 것은 사실상 서로 다르다. 두 믿는 이를 예로 들어보자. 하느님의 은총으로 한 그리스도인이 그의 눈이 열려 자기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았다. 주님의 실재를 만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을 믿은 결과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하느님 앞에서 해방을 얻고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에 또 다른 믿는 이가 그에게 와서 그의 증언을 듣고, 자기도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무용한 사람인가를 볼 수 있도록 빛 비추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자기 자신도 하느님을 믿고 자신을 단념하기를 배우고 열심히 변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결과는 이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이 체험한 구원을 얻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첫 번째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을 믿고 주님을 만질 수 있게 해 주는 살아 있는 믿음이 있었던 반면에, 두 번째 믿는 이에게는 믿음은 전혀 없고 믿음의 공식의 모방만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 두 번째 믿는 이가 얻은 것은 방법이지, 주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법은 능력도 없고 효과도 없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모든 것은 죽어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모두가 죽어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 살아 계신다. 주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길이고 그리스도가 방법이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그리스도가 당신의 길이며 그리스도가 당신의 방법이신가?

아니면 실재, 곧 그분의 살아 계신 인격의 만남이 아닌, 단지 길과 방법만을 원하는가? 응답받지 못하는 많은 기도와 효과 없는 증언들의 원인은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지 못한데 있다. 당신은 다른 이들의 방법을 모방하였을 뿐 주님 자신을 접촉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진리란 그리스도에 관하여 하는 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다. 얼마나 자주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과 해설을 진리로 여기는가. 그러나 사실은 진리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다(요한8,32).

 

형제자매들이여! 얼마나 많을 진리들이 실지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였는지 생각해보라.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선포하지만, 얼마나 많은 경우 진리가 우리에게 교리가 되고 마는지를!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열려 있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교리에 관하여 말하면서도 이 죽음의 능력은 잘 모른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말하지만 그 능력은 체험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것 모두가 교리뿐이라면, 우리는 죽어 있는 어떤 것을 만지고 있는 것이다. 무릇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아니거나 우리의 진리이신 그리스도가 아닌 것, 곧 교리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죽은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 없고 살아 있지 않은 것이다. 당신은 여기서 그 차이를 보는가? 그 차이는 너무나 크므로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행위는 우리의 기억력에 의존하지만, 생명은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우리의 기억력을 좇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능력에 의해 유발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영적 실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지각하게 되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교리를 기억하여 그것에 따라 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우리의 진리, 곧 실재이며, 따라서 이 실재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있는 것은 생명이고, 그리스도가 없는 것은 죽은 것임을 깨닫기 바란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오늘날 믿는 이들 가운데 가장 널리 잘못 이해되고 있는 중대한 실수가 있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생명을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할 어떤 것으로 여기며,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믿는 이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만일 생명이 있다면 우리 자신이 행할 필요가 조금도 없이 생명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눈과 귀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각각 매우 자연스럽게 보며,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듣는다. 곧 우리의 생명은 자연스럽게 흘러서 행위를 낳지만, 행위는 결코 생명의 대치물이 될 수 없다는 이 점에 대하여 분명해져야 한다. 그 대신 때때로 행위는 생명의 부재 또는 생명의 약함을 증명해 준다.

 

생명은 선한 도덕을 낳겠지만, 선한 도덕은 생명을 대체할 수 없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만일 어떤 믿는 이가 아무리 온유하고 겸손하고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들이 아니라면, 생명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타고난 것으로서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떤 믿는 이들이 다른 사상과 이념을 신봉한다고 하자. 그들은 이것을 생명의 능력이라고 단정한다. 그들은 주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얻는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선을 행할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능력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우리의 능력은 일들을 하기 위한 힘이기 보다 오히려 한 인격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은 능력일 뿐 아니라 한 인격이다. 그것은 우리의 선한 일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생명이란 어떤 것인가? 생명이란 생각보다 심오하며 감정보다 더 깊다.

 

생각이든 감정이든, 그것들은 비교적 외적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생명인가? 주님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내가 생명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그분을 알 때 생명을 만지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라는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

 

그분을 아는 데에는 영적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는 것이 생명이며,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을 안다면,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모든 타고난 노력은 철저히 헛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처음 주님을 믿었을 때 나는 그분을 앙망(仰望)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었다.

 

그러나 내가 지난 날 죽음과 같은 고난들을 통과해 오면서, 나는 점차 그분을 앙망하기를 배워갔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달려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고난이라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 전에는 모든 일을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그 일이 엉망이 될 것이라고 염려하여 그것들을 내 스스로 하려는 경향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지 야곱처럼 일을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이 나의 생명이심을 보았을 때, 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고 나에게 속하지 않음을 알았다. 마침내 나는 안식하면서 그분을 앙망하기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느님은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주시는 대신에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영적인 것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하기시를 바란다. 날이 갈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길이 없고 진리도 생명도 없음을 확인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다른 것들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삼는다. 혹은 뜨거운 분위기를 생명이라고 부르며, 분명한 생각을 생명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주님만이 생명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우리 영 안에서 이 생명을 살아 내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우리가 그분만을 만질 수 있도록 세상적이고 단편적인 관심사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그분에게 구하자. 길과 진리와 생명 모두가 그분을 아는 것에서부터 발견되므로 모든 것들에서 우리가 주님을 보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만나고,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사시게 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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