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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9주간 목요일] 가장 큰 계명 (마르 12,28ㄱㄷ-3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04 조회수1,485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9주간 목요일](마르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율법교사 중 한 사람이 큰 계명에 대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마태오복음 2235절에는 ‘35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36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어떤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율법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영원한 법정신이 무엇인지 밝혀주십니다.

 

<율법의 핵심>

율법교사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의 대화에서 대답을 합당하게 잘 하시는 줄 알고(28)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그 당시 율법교사는 율법학자로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을 백성들에게 적용시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8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여기에서 모든 계명은 모세의 율법을 포함한 그들의 모든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에 모세오경의 율법과는 별개로 그들은 613개 율법 조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248개는 사람 몸의 지체 수로 행해야 하는규정이고, 나머지 365개는 1년 전체 날 수에 해당되는데 행하지 말아야 할규정입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들은 이런 율법 규정들 가운데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은지 등에 대해서 계속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이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가장 크고(마태 2236) 가장 근본적인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29-31절입니다.

“29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31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4절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보통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던 말씀입니다. 신명기 64절에는 ,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 뿐이시다.’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라고 하십니다.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첫째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가지 다해야 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음, 목숨(그의 존재), , . ‘다하다는 말은 모든, 전체, 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네 모든 마음, 네 모든 목숨, 네 모든 뜻, 네 모든 힘(살아 있는 모든 활동력)’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뜻입니다. ‘헌신과 충성입니다. 하느님을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참된 고백은 다함으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 둘째 계명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먼저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 사랑이 솟아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요일 420)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이 율법의 가장 큰 강령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의 영원한 정신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은 의무로 행하는 수준이 아니고 하느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중 계명의 말씀을 따라서, 영원한 법정신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을 받은 백성으로서 당연히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법칙으로 이 말씀을 근거에 두고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때 율법교사는 32절을 보면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신명 435)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33절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 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호세 66, 사무상 1522) 하고 대답하였다.고 계속해서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34절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참으로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셨다고 하십니다. 그 율법교사는 구약 율법의 핵심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을 이 땅에서 바르게 섬기고 사는 길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음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율법교사는 소중한 깨달음에 이른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멀지 않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론 율법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도 가져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뜻)”

 

예수님께서 율법교사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셨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를 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십니다. 아직 하느님의 나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멀지 않은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그 율법교사는 구약에서 오리라고 하신 그리스도가 예수님이심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데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요한146) 이루어집니다. 이런 믿음을 아직 갖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나라의 회원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버스를 탈 때 가장 앞자리에 있다고 해도 버스를 타지 못하면 결국 버스에는 타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다고 해서 버스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핵심을 깨달은 것은 참으로 지혜 있는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신 상태에 있을 때 의미가 있지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실제적인 삶의 실증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율법교사에게는 이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먼저 구세주로 맞이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이중 계명도 그 사람의 삶의 기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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