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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대한 침묵’ 영화를 보고서!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7-05 조회수2,007 추천수2 반대(0) 신고

위대한 침묵영화를 보고서!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침묵의 세계, ‘위대한 침묵, 인투 글레이트 사일런스(Into Great Silence)'라는 영화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도대체 어떤 침묵이기에 위대한 것일까!

해발 1,300m 알프스의 깊은 계곡 그곳에 누구도 쉬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고요함의 세계가 있다.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영원을 간직한 공간에서, 그들만이 그들의 시간을 만든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그 긴 세월을 침묵으로 지켜온 그 수도원을 산책한다.

사실 이 수도회는 천여 년 전에 설립된 이래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외부 방문객의 출입 제한이 엄격하기로 유명하며 경제적으로도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곳으로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19개 수도원에 총 370명 정도의 수사가 있다.

 

침묵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대학에서 의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독일 출신 필립 그로닝감독은 1984년 처음 이 침묵을 주제로 언어를 최대한 배제한 대중영화를 만들고자 구상했다. 이에 침묵 수행을 하는 이 카르투지오 수도원이 적격이라 생각하고 촬영 승인 요청을 하였지만 19년이란 오랜 세월 후에야 메가폰을 들고 그곳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6개월간 수사님들처럼 독방에서 묵었다. 은둔 생활을 통해 침묵이라는 그들만의 기막힌 생활을 체험했다. 그곳에서 홀로 촬영했고 들리지 않는 음성이지만 소리란 소리는 죄다 녹음했다. 그리고 편집 각색도 혼자 수행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 수도원의 침묵으로 일관된 긴 여행을 그린 다큐멘터리[기록 영화]는 이렇게 침묵을 깨고 만들어졌다.

 

위대한 침묵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영화 속의 수사님과 극장 속의 세속의 나는 이렇게 침묵이란 주제를 놓고 어둠 속에서 만났다. 같은 하느님을 같은 방식으로 흠모하는 믿음의 사람이지만 그들의 침묵은 스스로 찾아 즐기는 대화였고,

나의 침묵은 신앙인에서 벗어나 관객의 위치에서 묵상은커녕 허탈감으로 빠져드는 답답함이었다. 그건 침묵이 아니고 고통이었다.

행여나!’ 하는 맘이 역시나?’로 한없이 침묵으로 이어지는 정말 참을 수 없는 몸부림이었다. 이곳저곳에서 세속의 몇몇 분은 끝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슬그머니 자리를 차고 나간다. 이곳저곳 객석에 계시는 신부님, 수녀님들과 함께하는지라 인내로 견뎌내지만, ‘행여나하는 그 맘이 '이제나?' 하는 안타까움으로 안달이 난다.

말문이 열릴 듯 말 듯 그들의 그 끝없는 침묵의 고요함 속에 코 고는 소리가 곳곳으로 퍼지고 그 소리 소리에 나도 가끔은 선잠에 빠지곤 했다. 장장 162, 3시간 가까이 이런 침묵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알프스의 깊은 산장에 눈이 내리고 꽃이 피고 더위가 찾아오고 낙엽이 나부낀다. “이제부터 우리는 자네를 얼마간 감시하고 너를 내 보낼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네는 이곳 룰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고, 이 기간 언제라도 견디기 어렵다면 '나간다고 이야기할 권한'도 가진다.” 원장 수사님(?)이신 분이 새로 들어온 수사께 들려준 이 명령만이 영화에서 뚜렷이 기억되는 침묵 속의 이야기다. 그리고 성경 구절이라고는 열왕기의 몇 구절이 전부이다.

침묵 속으로 시간은 자꾸만 가고 몇 자 성경의 자막만이 대화도 없이 수시 반복된다.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수사님들은 그 독방에서 주님을 이렇게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일어섰다간 앉고 다시 창가로 가서 허공을 주시한다. 그리고 서재라곤 딱딱한 의자에 불과한 나무 받침대에 앉아 성경을 뒤적인다. 이렇게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고는 묵주기도를 드린다.

이따금 텅 빈 경전으로 자리를 옮겨 또 침묵으로 주님과 대화를 나눈다. 영화는 끝없이 여러 수사의 이 침묵을 수도 없이 필름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수도원의 조용한 계절도 그 필름으로 돌아만 가고.

수줍은 젊은 수사에게 온몸을 의지하며 그 따사한 햇빛에 묻혀 기도하는 노 수사의 영롱한 눈망울이 오랜 침묵의 결정판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저승길을 스스로 재촉하는 할아버지 수사님의 흐릿한 인터뷰 말꼬리가 끝내 찡하게 남는다. 위대한 침묵을 즐겨온 분의 마지막 매세지이다. 침묵을 모르는 세속인에게는 침묵을 일깨우는 심금을 울리는 복음이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요! 이제 그분을 영원히 만나는 시간이 다가오는데. 이런 기쁨 어디에 있나요! 이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분과 얼마나 많은 대화를 즐겼는데요!"

이 유언 같은 몇 마디가 침묵 속에 담긴 그 어떤 위대한 힘으로 다가온다. 이 기다림이 침묵의 위대함인가? 그리고는 다시 영화는 침묵으로 끝없이 빠져만 들었다.

 

이 영화를 보신 분 중에는 이처럼 참을 수 없는 긴 침묵을 견디어 낸 것을 후회할 것이다. ‘그것도 영화야!’라고 하시면서. 또 게 중에는 그 영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만 더 꼭 보았어야 했는데!’라고 아쉬워하실 분도.

그리고 이 글만 읽는 분 중에는 그 위대한 침묵을 감상하지 못한 안타까움도 가질 수 있다.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그때 느낀 점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돈 내고 이처럼 후회되는 영화는 본 적이 없었다고.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 말이 없는 그곳의 고요함을 견딘다는 건 고통 중의 큰 고통이었다.

 

그 침묵은 침묵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함일까! 주님이 함께해 주시는 그 침묵은 시간이 갈수록 나를 또 다른 침묵이란 묵상 거리를 만들면서 깊은 침묵으로 빠지게 한다. 하느님이 이 시각 나에게 주는 '침묵'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무언가 한마디 일깨워 줄 수 있는 그 말 한마디를 그분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위대한 하느님의 침묵이시다.

'위대한 침묵은 무엇입니까?'라는 나의 물음에 주님은 여전히 침묵으로 대답하시고 이내 나는 세속으로 돌아온다.

오늘도 나는 침묵할 수 없는 세속인으로 산다. 율법의 선조 모세에게도 예언자의 대표 엘리야에게도 결코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는 그 주님이시다. 침묵으로, 더 큰 침묵으로 그분과의 만남을 기쁨으로 체험하는 그 알프스의 조용한 계곡, 수도원 그분들의 위대한 침묵을 나 같은 세속인이 어떻게 이해할 수가!

그렇다. 나는 그 '침묵'을 침묵으로 즐길 수 없는 세속인이다. 온 종일 그 침묵을 떠나서 산다. 만남을 통해서 대화를 나누고 어느 사람과도 나눔의 생활을 하여야만 한다. 침묵에 매달려서는 한순간 살 수 없는 사람이 돼 버렸다. 그렇지만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침묵다운 침묵'을 보았다.

나는 주장한다. 위대한 침묵을 이렇게 나만의 침묵으로 내버려 둘 수 없는 나는 침묵할 수 없는 세속의 사람이라고 자인한다. 그리고 침묵도 작은 대화가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짧은 침묵 속에 위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최상의 기도는 침묵하는 그 자체일 수도 있다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침묵의 세계가 있는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정경이 떠오른다.

언젠가 '침묵'이라는 묵상 거리를 가지고 알프스의 그 수도원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피정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지금도 알프스 계곡의 그 수도원에는 위대한 침묵 속으로 하얀 눈이 펄펄 휘날리고 있겠지.

 

태그 위대한 침묵,카르투지오 수도원,기록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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