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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 /예수의 표상(表象)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12-05 조회수1,242 추천수0 반대(0) 신고

도란도란 2020.12.05.

(공동번역성서)

예수의 표상(表象)

(로마서 5:12-15)

12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 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14 그러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원형이었습니다. 15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성경 전체에서, 가장 근본적이며 핵심적(核心的)이면서도, 난해한 구절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4복음서를 거쳐서, 요한묵시록까지의 분명한 구조파악이 선행되어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조직신학적 분류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신학적 개념의 정의가, 확실하게 세워져 있지 않으면, 결코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이 로마서 512절 이하에는, 원죄(原罪)의 문제나, 창조(創造)의 이야기, 마귀의 실체, 율법의 문제, 그리스도 예수로 완료되는 구원의 이야기 등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 모두가 들어 있어요. 여기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거든요. 그 모든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절대 이 구절들을 이해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전체를 아우르는 개괄적 기초(基礎), 개괄적 설명을 해드겠습니다.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되는데, 오늘 설교하는 건, 다 숙지(熟知)해야 돼요. 그만큼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디아라는 전치사 다음에, 소유격으로 오는 단어들이, 한 사람! 물론 아담입니다. 아담이 사람이란 뜻이에요. 한 사람! , 범죄, 많은 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이게 디아다음에 전부 소유격으로 붙어 있어요. 여격이나 대격이 아니라! 그건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이라는 주체에 의해서, 어떤 대상에게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요, 수단으로 사용된 것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법적 장치인 거예요.

죄를 세상에 들여온 아담이나, 그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지배(支配)하게 된 죄(), 그걸 해결하러 오신 또 다른 한 사람, 인자(人子)! ‘그 사람의 그 아들이란 뜻이거든요. 그 인자! 예수 그리스도나, 모두 다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道具)였다는 뜻이에요. 예수까지도! 역사 속 예수! 그리스도 말고요. 예수까지도! 그걸 성경에서, () 혹은 표상(表象), 혹은 형상(形象)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중요한 건, 그 목록 안에,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다는 건데요. 아담이나, 역사적 예수도, 하느님에 의해, 설명용 도구요, 수단으로 사용된 존재라는 거요. 그래서 예수님이, 신성(神性)을 한 번도 안 쓴 거요. 못 쓴 거요. 도구요, 방법으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 말은 에덴에서의 선악과 사건이나,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사건이나, 모두 우발적(偶發的) 사건이 아니라, 철저한 작정(作定) 속에서 계획된 것이라는 의미인 거예요. 왜냐하면, 뭔가가 설명되는 도구로 사용되어졌다는 건, 이미 완료(完了)된 어떤 게 있기 때문에, 그걸 설명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계획이 먼저 세워지고, 실체가 먼저 완료되고, 그 계획을 설명하기 위한, 배우들이 선정이 된 그런 형국인 거예요. 그래서 디아다음에 소유격들이 다 붙어 있는 거예요. 이건 방법이요. 도구요. 수단이라는 거예요. 설명용 도구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아담이 오실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었다는 게 있어요. 무슨 말예요, 그게? 어떻게 모든 인류를 죄 아래 가둔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죠? 그리고 예수님은 무엇을 표상하는 분인지, 이해가 잘 안 가죠? 개혁신학자들은 그것을 그냥, 예수가 성도들을 대표하여 십자가를 진 것처럼, 아담도 인류를 대표하여 죄를 지은, 그 대표성의 유사 정도로 설명을 하는데 그건 좀 가난한 이해죠? 표상(表象)’이라는 단어는 각기 다른 인물이 정확히 같은 일과 같은 역할을 했단 말예요. 그게 표상이에요.

서둘러 결론을 말씀드리면, 아담에게서 그림자로 보여졌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확하게 완성이 되었다는 그런 말이에요. 그래서 표상(表象)이에요. 아담이 저지른 죄를 무작정 예수님이 와서 해결해 준 게 아니란 말예요. 둘은 유사성을 갖고 있고, 같은 역할을 했단 뜻이에요.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지금부터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첫 단어는, ‘레쉬트’, ‘베레쉬트예요. 베레쉬트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시간의 시작혹은 어떤 장소의 처음, 머리이런 뜻이거든요. 성경은 원래, 현대 히브리어 문법이 생겨나기 이전에, 그 히브리 알파벳이 가진 그 원의(原意)로 조합된 단어들로 기록된 거예요.

그래서 현대 히브리어로 성경을 이해 못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못 알아들어요. 그렇게 때문에 그러한 사전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단어들을 하나하나 이렇게 파자(破字)해 보는 것도 중요해요.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지금의 현대 히브리어가 아니라, () 시나이어와 깊은 관계가 있는 고대 히브리어이기 때문에, 현대 히브리어만으로는 그 깊은 의미를 다 이해해 낼 수가 없단 말예요.

베레쉬트라는 단어를 파자를 해 보면, 자음 베잍()’ 두 번째 단어거든요, 이게 성전이란 뜻이에요. ‘! 성전!’ ‘레쉬(א)’ 이게 머리, 시작!’ ‘알렢(ר)’하느님,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고. ‘()’되새김, 분석!’ 이런 의미예요. 그리고 요드(ת)’편 손!’ ‘타우( י)’완성의 표!’ 이런 뜻이거든요. 이게 합성어, 이게 베레쉬트예요.

베레쉬트라는 건, ‘성전의 시작, 성전의 머리, 성전의 실체(實體), 하나님을 잘 분석하고 설명하므로 해서, 시간 안의 존재들에게, 손을 펴서 넘겨주다베레쉬트예요. 그러니까 시간의 시작! 시간, 역사라는 거 자체가, ‘묵시(默示)를 잘 분석하고 설명하여, 유한의 존재들에게 손을 펴 넘겨주는 것!’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베레쉬트로 시작되는 거예요. 성경이! 성경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가 바로, 그 이야기를 설명하는 거라는 뜻이에요. 무언가를, 완료된 무언가를, 유한의 존재들에게 잘 이해시켜, 손을 펴 넘겨주는 것! ‘복음(福音)을 전한다.’할 때 쓰는 그 단어죠. 넘겨주는 것! 이게 역시이며,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그걸 그냥 소리 내어 읽어서, ‘베레쉬트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 시간(時間)과 천지(天地)라는 공간은, 한 마디로 하늘의 그 영원과 하늘의 참 성전! 그리고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한 표()! 그 모형으로서의 한시적 현상계란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게 성경의 첫 단어인 베레쉬트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이란 말입니다. 쉽게 말해 성경의 첫 단어는, ‘내가 지금부터, 현상계의 것들로, 하늘을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라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모세가 십계명을 무슨 글자로 받았겠어요? 애굽어로 받았죠? 사람들이 히브리어 다 잊어버리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에서 성전 짓고, 뭐 한 모든 것은, 애굽 것들로 지은 거예요. 이 현상계의 것들로, 내가 하늘을 설명할 테니, 잘 들어라!’베레쉬트예요. 그러니까 성경 전체는, 바로 하늘을, 묵시를 설명하는 도구요, 방법이란 말입니다.

베레쉬트란 단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엔 아르케예요. 이게 요한복음의 첫 단어죠? 이것도 한 처음에, 太初라고 성경이 번역해 놓았는데. 엔 아르케의 헬라어 첫 단어, ‘이라는 전치사는, 그 히브리어 불분리 접두전치사, ‘를 그대로 가져와서 헬라어로 옮긴 거예요. 그래서 제가 조금 전에 그 베잇이란 히브리어 두 번째 단어가, ‘성전, 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랬죠? 고대 히브리어로 넘어가면 그래요.

그리고 아르케시작! 요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레쉬트’ ‘시작!’ 그런데 그 레쉬트의 어원이 로쉬, 머리란 말예요. 머리! 그러니까 베잇이라는 성전 안에, 머리가 놓여진 모습!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요걸 내가 설명해 줄게. 그래서 엔 아르케로 시작하는 거요. 이게 베레쉬트똑같은 의미란 말입니다.

그 성전 안에 머리가 놓인 것 이게 교회죠. 참 성전 안에, 머리이신 예수가 놓인 것, 그리스도가 들어온 걸 교회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내가 머리 둘 곳 없다고 한 건 맞는 소리죠. 십자가 이후에, 성전이 되어, 예수를 담을 수 있는 교회가 창조되니까, 십자가 이전에는 머리 둘 곳이 있으면 안 돼요. 단순히 예수님이 뭐 의지할 곳이 없다. 나는 집도 절도 없다. 이런 의미로 쓴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에, 구약성경의 첫 단어인 히브리어 베레쉬트, 그대로 옮겨다가 헬라어로 표기를 한 것이 엔 아르케, 그 둘의 의미를 종합해 볼 때, 성경 전체와 이 역사는, 무한의 하느님께서, 유한의 피조물에게, 묵시를 설명해 주시는, 그 참 성전 안에, 그리스도! 이거 성령이죠? 그리스도, 성령이 머리로 들어가서, 하나로 연합이 되는, 묵시 속 교회! 이게 하느님나라이고, 이게 성전이며, 이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니까! 우리 이야기하는 거란 말예요. 이게 어떻게 하늘에 완료가 되어 있는지를. 이 애굽의 것, 세상! 현상계의 것으로 내가 설명해 볼게, 이게 성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성령이 머리로 들어가서, 이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과 연합되어 참 성전이 되는, 그 묵시 속 교회의 실체를 설명하는 설명서가, 성경이고, 이 역사 또한, 그 말씀을 증거하고 설명하는 도구요. 방법이요, 한시적 무대에 불과하다는 걸, 그 단어들이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담이나 하와나, 뱀이나 죄나, 선악과나 생명나무, 그 역사 속 예수 등은, 모두 그 베레쉬트’, 묵시를 현상계의 것으로 설명하여 넘겨주는, 베레쉬트하기 위한, 도구요, 방법이요, 수단일 뿐이라는 거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디아라는 전치사 뒤에 모든 단어들을 소유격으로 갖다가 붙여 놓은 거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를 천재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모두 실체가 아니라, 모형들이라는 거예요. 역사 속 예수! 마리아의 아들 예수까지도 하늘의 것, 실체가 설명되기 위해서는, 이 땅의 것, 모형의 불가능함과 한계가, 증명되고 증거 되어야 돼요. 설명한 다음에, 이거는 실체가 아니다를 증명하려면, 요게 소멸되어야 된다 말예요. 그래서 모형은 다 죽어야 돼요. 그래서 예수도 죽는 거예요. 그래야 실체가 설명이 되고, 그 실체의 가치가 입증(立證)이 돼요.

그래서 아담 안에 모든 인간이 다 죽어요. 모형이니까. 역사 속의 모든 것이 다 죽어요. 다 사라진다 말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 예수도 죽고, 죄도 죽고, 율법도 죽고, 요런 단어들이 성경이 나오는 거예요. 다 죽는 거요. 모형이기 때문에! 다 사라지고, 하느님의 사랑만 남는 거예요. ‘아가페!’ 은혜! 영광! 하나님만 남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성경이란 말입니다.

후자를 위해서 전자가 수단과 방법으로, 법과 도구로 사용되어, 그 설명을 다 마친 후,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 어려운 것 같지만, 여러분이 성경을 대하는 그 패러다임의 전환만 되어 있으면, 절대 어렵지 않아요.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께, 제가 노파심에서 한 말씀을 대언한다는 측면에서, 이 설교는, 말씀을 대언하는 게 설교잖아요?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어서는 안 돼요. 성경은 분명 하느님의 택한 자들, 너희와 저들로 나눈단 말예요. 예수님이 직접, 하느님의 택한 자들, 너희에게만, 그 비밀을 열어두었다 그러죠. 저들에게는 허락이 안 됐다 그래요. 못 알아듣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를 보내면서도 말씀 전해! 복음 전해!’ 그래놓고도 , 눈 막아라!’ 그런 거예요. 열어서 설득시켜 그러잖았어요. ‘막아라!’ 그랬다니까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귀가 머는 거예요. 못 알아들으니까. 그래서 귀를 막아라. 그런 거예요. 열어라가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못 알아들어야 돼요. 하느님의 백성만 알아들어야 돼요.

그런데 오늘날 인기 있는 설교라는 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건 보편! 인간 보편이 다 수긍(首肯)하고 추구하는 선한 사람이 되기, 도덕과 윤리의 준수, 사회에 좋은 영향력 미치는 사람 되기, 착한 일 많이 하기, 성도다운 사람 되기, 마음 다스리기 등등. 모든 설교가 이 적용으로 끝나잖아요?

그런 좋은 것, 보편적인 인간들이 합의한 좋은 것에 대한 거죠. 그게 있기 있는 설교예요. 그리고 건강한 설교라고 하잖아요? 그런 설교는 감동도 있고, 재미도 있고, 흥미도 있어요. 그래서 그런 설교를 한 편 듣고 나면, 결연한 결심도 하게 되고, 의지의 불을 붙이기도 하고, 감동받아 눈물도 흘려요. 누가 누가 이렇게 살았대요. 그러면!

그런데 그런 설교를 절에 가서 하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예수 이야기만 쏙 빼고, 똑같은 내용을 절에 가서 하면, 똑같이 감동받습니다. 똑같이 눈물 흘리고. 성경은 그걸 설교라고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목자(사제, 목사)가 절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불교 대학원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스님들이 다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는 일이 생기는 거예요. 성경은 예수님을 못 알아듣는다고 하는데, 중들은 알아듣고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면 누가 맞는 거냐고요?

 

여러분이 복음 전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그들이 감동 받으면, 여러분은 가짜인 거예요. 못 알아들어야 돼요. 그래서 어려운 게 맞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작금(昨今)의 그리스도교는 여러 종교 중에 하나가 되어서, 그 종교들이 동일하게 추구하는 동일한 것! 그런 걸 가르치고 행하려고 하는, 그냥 잡교(雜敎)가 된 거죠.

설교는, 묵시를 설명하고, 예수를 설명하고, 십자가와 은혜와 피를 설명하는 것이어야 돼요. 그래야 세상이 못 알아들어요. 그래야 중들이 못 알아듣는다니까요. 절에 가서 예수, 십자가, , 은혜 이런 거 이야기해 보세요. 어떻게 그들이 일어나서 기립박수 칩니까?

그렇게 세상은 알아듣지 못하는, 예수 이야기! 하느님의 아들 이야기! 은혜 이야기! 그 안에 말씀이 들어 있는 자!, 아들을 받은 자! 그들만 이해해요. 제가 지금 한국말로 이야기하는데, 이해하죠? 그건 여러분 안에 한국말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설교해 보세요. 할 수도 없지만. 못 알아듣죠? 여러분 안에 그 말이 없어서 그래요. 마찬가지로 아들이 있는 자는, 아들을 이야기하면 알아들어요. 그런데 그게 없으니까, 말씀이 내 안에 없으니까,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리고 어렵다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중들이 하는 설법 같은 거, 마음을 잘 다스리고요, 평상심을 유지하고, 중용(中庸)의 도를 갖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 하면 다 알아들어요. 설교 아니니까. 그러면 가까운 절에 가세요. 거기 가면 옛날 고전 같은 거 예를 들어 더 깊이, 훌륭하게 설법을 해 주니까, 가까운 절에 가시라니까요. 그런 말을 들으시려면!

설교는 보이지 않는 묵시, 보이지 않는 무한의 하느님을 설명하여 베레쉬트넘겨주는 거! 그리고 그들이 또 이웃에게 넘겨주는 거! 삶으로, 입으로! 그걸 사랑이라 그래요. 사랑의 전이(轉移)! 그러니까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과연 말씀을 받은 자인가 고민해 보란 말예요. 그럼 이제부터 전부 알아듣는 척하겠지.

아무튼 이 역사와 시간과 공간은, 전부 하늘의 묵시를 설명하는 도구요, 수단이요, 표예요. 그래서 그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마치면, 장렬히 산화해 줘야 돼요. 그래야 원형의 가치가 증명되고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모형비행기가, 비행기를 설명할 수 있지만, 비행기를 대신할 수 없어요. 그것 타고 태평양 못 건너간다 말입니다. 모형비행기는 진짜 비행기를 설명한 후, 그 진짜 비행기 앞에서 쇠해져야 돼요. 원형이 흥하기 위해서. 자신의 무용함과 불가능함을 폭로당해야, 진짜 비행기의 가치가 입증된다 말예요. 그래서 예수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가 죽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멸망(滅亡)하기 위해 존재(存在)하고 있다고!

 

이 역사의 주관자(主管者)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건, 목적을 갖고 계신다는 뜻이죠, 그 목적이 성경이요. 역사의 목적지, 멸망!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아니라, 멸망이라니까요. 역사를 축약하면 여러분의 인생! 그게 끝인 거예요. 목적지가? 멸망! 그래서 다 죽는 거예요.

(베드로후서 3:7) 7 사실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느님의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죠?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잠깐 보존해두는 게, 역사이며 인생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죽는 순간 심판인 거예요. 심판의 날이에요. 그때가! 영원 속에 들어가면 차서나 기다림이 없으니까, 바로 심판이에요. 무덤 속에서 기다리고 이런 거 없어요.

(요한묵시록 6:14)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져 버렸고 제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산이나 섬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보세요. 이 역사와 우주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실체가 오게 되면, 옛 하늘과 옛 땅이 두루마리(종이 축)가 말리는 것처럼 올라간다고 그래요. 떠나간다고 그래요. 형상화시켜 그려보세요. 역사가 멸망으로 끝날 때. 이게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말려 올라간다는 건, 묵시(默示) 속으로 이 역사가 함몰(陷沒)되는 거죠? 그러면, 이 묵시를 쭉 펼친 게 뭐란 뜻이에요? 역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역사는 묵시를 설명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말려 올라가서, 거기서 함몰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우발적(偶發的)인 것일 수가 없어요. ? 묵시를 쭉 펼친 거니까. 완료된 어떤 걸 펼친 거니까. 그래야 다시 말려 올라간다 말예요. 그러니까 우발적인 게 하나라도 있으면 안 돼요. 모든 게 계획 속에서 진행되어져야 되는 거란 말예요. , 이 역사가 창조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자고요.

(에베소서 1:4-7)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언제? 창세전이에요. ‘베레쉬트, 엔 아르케!’ 그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요? 하느님께서 우리 성도를, 우리를, 예정하시고 우리라는 건, ‘라는 대상이 삭제되는 거요. , , , 나가 모여야 우리가 되는 거요. 그 우리 안에 너 있으면 안 돼요. 그래서 각자가, 우리 안에 있는 각자가 라는 주체를 차압당해요. 그래야 우리가 돼요. 그걸 일체라 그러고, 연합이라 그러거든요. 우리가 있어요. 그 우리를 예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로, 과거완료예요, 만드셨다 그래요. ‘베레쉬트이전에! 아들이 됐어요.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그런데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분의 피로 구속함을 입어 아들들이 되었다 그래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런데 창세전에, ‘베레쉬트이전에, 이 일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거요. 이게 무슨 이야기이겠느냐고요? 지금 역사 속에서 일어난 그런 모형이란 얘기예요. 묵시 속에 이미 이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 전체에 기록된 복음의 이야기와, 에덴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흐르고 있는 이 모든 역사의 내용이, 이미 하늘에서 완료가 되어 있는 거란 말이잖아요 그래야 베레쉬트완료가 되어 있는 게 있어야. 그래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린 양이, 창세전에 이미 죽었다 그러는 거요. 역사 속에서 죽은 게, 실체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설명용일 뿐이지. 창세전에 이미 죽었다 그래요.

(요한묵시록 13:8) 8 그러므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생명책에 천지창조 때부터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자들은 모두 그에게 절을 할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는 어구가, 헬라어로 보면, 투 아르니무 투 에스 파그메누 아포카타 볼레스코스무 직역하면 세상에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이미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책!’ 그럼 세상이 생기기 전에, 도대체 어린 양이 어떻게 죽느냐 말예요? ‘십자가는 이미 묵시 속에 먼저 섰다!’ 이런 말이잖아요? 이건요! 어떤 방법으로 섰을까요? 에베소서 1장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느님의 아들들을 창조했다 그러잖아요?

묵시 속에서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걸까요? 그리고 묵시 속의 성자는, 어린 양은 육신을 입고 역사에 내려오기 전이기 때문에 영이란 말이에요. 하느님이란 말예요. 하느님의 피가 있어요? 하느님이 어떻게 죽습니까? 하느님이 영인데, 무슨 피를 흘리느냐고요? 창세전에, 어디서?

그리고 거기에 이미 창세전에 ()’라는 개념이 나와요. 역사가 생기기도 전에, 아담이 태어나기도 전에, 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어린 양이 피를 흘렸다고 하는데, 도대체가 그 죄는 뭐냐 말예요. 피조물이 생기기도 전에, 하늘에 있었던 그 죄라는 개념은 뭐 길래? 어린 양이 거기서 십자가를 지고 이미 죽었다고 하냐고요? ‘베레쉬트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약과를 따 먹으므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죄가 시작된 거고, 방출된 거라고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베레쉬트, 엔 아르케이전에, 죄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어린 양이 죽었대요. 십자가를 졌대요. 하나하나 한 번 풀어보자 말이에요.

 

오늘 본문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들어왔다고 그래요. 그건 원죄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구절임과 동시에, 대표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자주 쓰이는 구절이죠? 개혁신학은, 거기에서 죄가 시작되었고, 그 죄는, 우리 모든 인간에게 전가된 거라고 주장해요. 그래서 우리가 원죄(original sin)를 갖고 있는 거다.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 교리에 의하면, 죄는 아담에 의해서 창조된 것처럼 보이죠? 어찌 됐던 거기서 시작됐으면, 그가 창조자예요. 피조물은 죄도 창조 못해요. 그 어떤 것도 창조할 수 없어요. 피조물은! 그렇다면 죄라는 건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한 사람 아담을 도구로 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왔다 그래요. 어디에 있다가 들어온 거란 말예요. 시작됐다고 하지 않는단 말예요. 어디에 있다가 들어왔다 그런다 말예요. 아담이 도구가 되어서, 어떠한 사건을 저지름으로 해서, 이미 있었던 그것이, 누군가로부터 준비된 그것이, 슬그머니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건 이미 의도가 되어 있단 뜻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아담을 도구로, ‘디 에노스 안트로푸라고 기록을 한 거예요. 그냥 아담은 통로였을 뿐이에요. 누군가가 죄를 집어넣어야 되는데, 통로가 없어요. 그래서 아담이 도구로, 통로로 사용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만 죽일 놈!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담은 그냥 통로로 사용 된 거예요. 바꿔 말해서, 그들 피조물이 죄를 창조해낸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뭔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준비해둔, 어떤 개념이에요. 죄라는 건! 하느님은 아담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의도적으로 죄를 세상에 풀어버린 거예요. 바로 다음에 나와요.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사망의 상태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 죄가 들어왔다, 그래요.

(로마서5:12) 12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 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들어오다’, ‘디 엘코마이는 삼투! 확 빨려 들어와 뚫고 지나간 거예요. 죽여 버린 거예요. 사망이 모든 존재를! 그런 뜻이에요. ‘그걸 위해 죽은 자로 드러나게 만들기 위해, 하느님이 죄와 아담을 도구로 사용했다, 12절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왜 죽여야 되는가? 그럼 금방 이런 질문을 할 거요. 그럼 하느님이 죄의 조성자인가요? 이 유아적 질문! 죄라는 건, 창조주에게 해당이 안 되는 말이에요. 창조주가 뜻을 두고 행하는 모든 건, ()이에요. 그걸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자기들의 선악구조,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에 의해, ‘요건 죄인데, 이건 아닌데!’ 이렇게 하느님까지도 판단하는 게 지금의 이 세상이에요. 누가 그걸 죄라고 그랬냐고요.

아니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우리가 왜 씻어야 돼요? 더러워서? 더러우면 안 돼요? 그런데 그걸 누가 더럽다 그랬습니까? 그리고 모든 인류는 물로 씻어요. 그걸!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결정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렇게 우리의 선악구조로 하느님을, 죄라는 것을, 이렇게 판단을 하기 시작하면, 사무엘에게 너 가서 거짓말 해!’라고 하신 하느님은 죄인이에요. 너희들 가나안에 들어가서 애기까지 다 죽여!’ 그거 교살(絞殺)이에요. 살인교사. 죄인이에요. 하느님이 그러면. 라합에게 너 나라 팔아!’ 죄인이죠. 역적이죠. 그건요. 다 시킨 거 하느님이니까?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은 죄와 관계없는 분이라 그래요. 점도 없고 흠도 없다, 그래요. 하느님이 하시는 건 모두 합력하여 선이 되는 거기 때문에, 죄가 아녜요. 따라서 하느님이 죄를 조성했다, 조장했다고 하는 건, 죄가 뭔지도 모른 우매(愚昧)한 자들의 질문이에요. 뭐가 죄인데, 하느님이 죄를 조성했다고 합니까? 그들의 머리 속에는 죄가 고작해야 도둑질, 간음, 살인, 험담, 이 따위의 것! 그러니까 하느님이 죄를 조성했다 이 따위 소리를 하는 거요. 하느님은 너무 착해서 죄와 관계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게 선이기 때문에, 죄와 관계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을 도구로 해서 온 세상을 죄 속에 가두신 하느님의 처사는, 죄의 조성이 아니라, 선이라 말입니다. 죄라는 건, 피조물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이에요. 하느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피조물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하고, 자기를 위해 사는 모든 사유와 행위가 다 죄예요. 하마르티아!’ 과녁을 벗어난 거니까! 그게 죄란 말예요. 그래서 선악과 먹지마라고 했을 때, 그걸 어긴 걸 죄라고 하는 거지. 그 까짓 거 먹은 게 뭐 그렇게 대단해서, 하느님에게 손해가 되어서, 그걸 갖고 죽이기까지 해야 하겠느냐고요? 그게 죄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란 말입니다.

하느님은 무언가, 그 창세 전 언약! 묵시 속에서 일어난 그것! 이미 일어난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베레쉬트, 엔 아르케하기 위해, 아담을 도구로 하여, 세상을 죄 속에 하느님이 가두어버린 거예요.

(갈라디아서 3:22) 22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그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을 모두 죽은 자로 만들어서, ‘믿음으로만 산다를 가르쳐주기 위해, 하느님이 모든 자들을 죽음 아래 가두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죄가 필요했다는 거예요. 아담이 필요했던 거예요. 도구로! 그러니까 선악과 사건이나, 뱀의 출현 등은, 우발적인 게 아니라, 모두 하느님의 계획과 작정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가장 보기 쉬운 동산의 중앙에다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만들어 심어 놓은 거예요. 먹으라고! 그 좋은 생명나무는 어디다 감추어 두었는지 일언반구 얘기도 없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열매가 맺혀있다는 말조차 없어요. 선악과는 열매가 맺혀 있어요. 이미! 생명나무에는 열매라는 단어가 없다니까요. ? 그리스도가 열매거든요. 에덴에서 그게 맺혀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야 완전한 하느님이죠. 자기가 추측도 못하고 예측도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우발적으로 일어났을 때 서둘러 막는 분이 완전한 하느님입니까? 하느님을 불완전한, 미완료의 하느님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요. 그런 하느님이 아녜요. 하느님은 완전한 하느님이라 말입니다. 그걸 전지전능(全知全能)이라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게 하느님의 시나리오에 의해 착착 진행되는 거예요.

복음이라는 건, 단순히 하느님도 예측하지 못했던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그것을 보다 못한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서, 그 죄를 없이 하려고 십자가를 진 후에, 그 죄를 없애버린 그런 신파가 아녜요. 그러니까 전부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Passion of the Christ)’ 이런 거나 보고 줄줄 울고. 다 신파로 봐서 그래요. 복음을 신파로!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예수님보다 더 아프게 죽은 사람 더 많아요. 이 세상에! 그게 그렇게 슬프고 애통할 일이냐고요? 어린 양은 이미 창세전에 죽임을 당했고, 그 피에 의해 아들들이 묵시 속에 완료가 되어 있어요.

 

자 그렇다면 묵시(默示) 속에서, 성자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아들들이 완성되었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요? 성자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거기는 영원(永遠)이에요. 시간 속도 아녜요. 하느님이 영원 속에서 일을 벌이신 거예요. 성자 하느님이 교회의 머리! 아들들의 맏형이 되셨어요. 묵시 속에서요. 그런데 그 맏형의 동생들은 신()이 아녜요. 피조물들이에요. 그래서 그 아들들이, 신과 함께 나라를 이루어 신처럼 살기 위해서는, 거기가 묵시 속 영원이니까, 신과 피조물의 연합(聯合)이 필요하죠. 그래야 같이 동거(同居)가 가능하다 말예요. 신과 피조물은 동거가 불가능해요. 돌격하여(?) 죽여야 되는 거예요. 그게 거룩의 개념이란 말입니다. 동거가 안 된다 말이에요. 못 들어가는 거예요. 지성소에! 그런데 성자가, 아들들의 맏형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걸 교회라 그런단 말예요. 성경이!

그러면 이 둘이, 유한(有限)과 무한(無限), 함께 공존하고 동거하기 위해선, 유한 쪽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죠? ‘없음인데 뭘 해요, 피조물이! 그러면 무한이 어떤 일을 행해야 되잖아요? 유한으로 관입(貫入)돼 들어와야, 무한이 어떤 일을 행하셔야, 이 피조물, ‘없음이 무한인 신과 동거하고 공존(共存)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단 말예요.

그런데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되어 들어가면, 잃어버리는 게 있어요. 무소부재(無所不在)와 편재(遍在)가 안 된다 말예요. 그게 신의 죽음인 거예요. 이게 성자의 라 말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 성자가 육신을 입고 내려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모형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는 묵시 속에 그렇게 하느님의 아들들! 성전이 되어 있다란 뜻이에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서의 성자가 죽는 거예요.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의 그 맏이로, 무소부재와 편재를 상실한, 육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되시는 거예요.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로 만들어내시기 위해서! 우리의 불가능한 처음 자리! ‘없음의 자리! 그게 하느님 앞에서의 예요. 생명은, 하느님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밖의 모든 건, 다 죽은 거예요. 그런데 그 죽은 것이, 그 죽음이라는 게, 죄 때문에 온다, 그러죠? 그러니까 생명 밖의 모든 게 죽은 거라는 건, 죄라는 뜻이에요. 하느님 이외의 모든 게 악()이며 죄()예요. 그런데 그 죄, 그 죽음, ‘없음을 생명으로 해결하기 위해, 성자가 유한 안으로 관입되어 들어가, 성령으로 그들과 연합되는 거! 이게 하느님나라, 교회의 탄생이기 때문에 성자가 피를 흘렸다고 우리의 수준으로 설명해주는 거예요.

그로 인해 없음에 불과한 먼지들이, 하느님과 방불(彷佛)한 존재로, ‘있음의 자리에 앉게 되는 거예요. 말씀을! 아들을! 빛을! 성경을! 품은 새 성전이 되는 거예요. 그 무한의 창조를 설명해내시기 위해서, 아담이라는 존재가 필요했고, 그 첫 번째 아담이, 온 세상을 죄 속에 가두는, 통로 역할을 함으로 해서, 묵시의 설명이 시작되는 거요. ? 다 죽은 것에서 시작되어야 되기 때문에.

 

잘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이, 왜 아담을 오실 분의 표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부르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란 말예요. 아담은, 죄인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표상이기도 하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도 마찬가지고요. 이게 어떻게 연관이 되는 지를 잘 알아야, 성경 전체가, 일관성 있게 이해가 돼요.

아담은, 하느님께서 여자인 하와를 창조해내는데, 도구로 쓰인 사람이죠. 아담이 없으면 여자는 없어요. 왜요? 아담의 갈비뼈가 꼭 필요하거든요. 여자! 교회가 탄생하는데, 어떤 남자가 반드시 필요해요.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는, 하느님의 형상(形象)으로,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다, 그래놓고, 그걸 단수로 사람이라 그래요. 사람 안에, 남자와 여자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이건 둘이 객체로 따로 존재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자하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는 거예요. 고게 사람의 내용이란 뜻이란 말입니다. 하나라는 거! 그런데 어떻게 하나라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4:4) 4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교회가 탄생되었죠?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함몰되어 들어가서, 교회가 탄생 됐잖아요? 여자가, 그죠? 그리고 이걸 하느님의 아들이라 그래요. 사람이라고 한단 말예요. 하느님의 백성!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가 지금 하나가 되어 있을 때 고걸, 그리스도 그래요. 그게 구원이거든요. 고 이야기를 창세기 1장에서 남자와 여자!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우리의 형상이라 해 놓고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설명을 해 주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활 후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어, 여자! 신부와 연합한 남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아직 교회의 머리가 아니죠. 연합이 안 됐을 때, 여자가 밖에서 홀로 객체로 존재하며, 우리도 하느님처럼 되어야지 하고 선악과 먹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게 죄. 사망의 세상이란 말예요. 그래서 십자가 이전에, 남편! 남자를 여자가 죽게 만드는 거예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남편을 죽여 버렸다니까요. 아직 머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십자가 이후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려와서, 성자와 교회를, 성령 안이라는 새 성전으로 묶어버린단 말예요. 그래서 성령 안! 그리스도 안이란 단어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성령에 의해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이 되는 거란 말이죠. 그걸 아담이 모형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담이 오실자의 표상(表象)이라는 거예요. 단순히 대표의 원리를, 대표의 원리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는 게 아녜요. 오늘 본문은요!

아담 자체가, 어떻게 묵시 속의 하느님나라! 하느님의 아들들이, 창조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도구잖아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하는 거요.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면, 예수님은 아담처럼,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죽어야 맞죠?

, 그러니까 그 여자가 탄생할 때, 남자가 잠이 들어요. 잠이라는 건 항상 죽음을 메타포(metaphor: 은유)한다고 그랬습니다. 아담이, 신랑이, 여자의 탄생을 위해, 자기의 존재성을 차압당하는 거요. 성자가, 하느님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거, 피를 흘리는 거, 이게 죽음이란 말예요. 그래야 아들들이 생겨요. 그래야 성자의 신부들! 연합의 개념에서 신부라고 하는 거예요. 신부들! 아들들이 생긴단 말예요. 그래야! 피를 흘려야!

그래서 아담이 잠드는 거예요. 그리고 아담의 옆구리가 뚫리고, 아담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갈비뼈가 하나 적출(摘出)이 되는 거예요. 남자의 완전한 죽음이라는 의미예요. 그건요. 거기에서 여자가 생겨나는 거예요.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과 연합되기 위해서, 하느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 속으로 관입되어 들어가서, 그들의 머리로 연합해버리는, 그런 모습이라 말입니다. 그게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개념이에요. 이해가 안 가면 여러 번 읽으세요.

그것이 창세기 2장부터, 선악과! ! ! 아담! 하와! 이런 걸 소재로 하여 설명이 되는 거예요. ‘베레쉬트되는 거예요. 하느님의 맏아들로 창조된 남자인 아담이, 여자라는 존재의 불가능함에 의해, 죽음의 자리로 내몰리는 거예요. 하와에 의해, 엉뚱한 아담이, ‘무트 타 무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 그 그림인 거죠. 교회!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예수가 십자가로 가게 되는 그 그림인 거죠. 그게 하늘에서, 묵시 속에서, ‘없음더스트, 아파르에 불과한 우리! 이걸 하느님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 성자가, 무한이 유한으로 관입 되어 내려가는 사건!!! 같은 이야기란 말예요.

 

(디모데전서 2:14)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여자가! 일부러 여기서는 여자라는 단어를 쓰는 거요. 여자가! 여자 때문에, 남자가 죄인 중에 죄인 자리에, 뱀의 자리에 올라가 버리는 거! 여자가 뱀과 연합해 버렸는데, 남자가 뱀이 되어 죽는 거예요.

보세요. 죄는 여자가 지었는데 성경에 보면 전부 아담이 죄를 지었다 그래요. 여자가 먼저 지었는데, 왜 그래요? 성자 하느님의 유한으로의 관입(貫入)을 이야기하는 거요. 그래서 성자가 뒤집어 써버리는 거요. 아담이! 남자가 뒤집어 써버리는 거요. 남편들에게 잘 하세요.

아들이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서. ‘없음의 자리, 사망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는 거요. 없음의 자리가, 우리의 자리였다니까요. ‘아파르먼지의 자리!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서, 없음, 아들의 그 일부, 갈비뼈로 흡수해내는 걸, 거꾸로 그려놓은 거예요. 여자의 탄생을.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을 갈비뼈로 흡수해 버리는,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거! 이게 묵시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란 말예요.

여자가, 예수 밖에 존재할 땐, 항상 뱀과 연합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남자를 공격해요. ? 밖에서 혼자, 홀로,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려고 하는 자체가, 창조주를 무시하는 거예요. 그게 창조주 살해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뱀이, 여자와 연합하는 거예요. 뱀이 하느님나라의 반역자! 여자와 연합하여, 여자가 사실 뱀이 되는 거예요. 뱀이 여자고, 여자가 뱀인 거예요. 우리 얘기 하는 거예요. 우리!

그런데 그 뱀과 방불한 그 여자를, 그 뱀이며 마귀인 그 여자를, 성자의 피가, 성자의 심장으로 끌어 당겨서, 성자와 연합해내는 거! 고게 아담이 잠들고, 거기에서 옆구리가 뚫리고, 갈비뼈가 빠지고, 여자가 창조되고 하는 그림이, 거꾸로 그려내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너희는 창조된 거야! 이렇게! 그러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함몰된 자를 성도라 하는 거고. 예수 밖에서도 홀로 독립적 존재로 살 수 있다고, 자신들의 가능성과 힘과 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이들이, 뱀인 거예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교회 안에 그 예수 없으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를 고백하는 사람이 많아요? 예수는 뭐 개뿔도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뭔가를 하는 사람이 많아요? 강론대에서는 어떻게든 요것들 사용해서, 내 힘으로 사용해 버리려고, 그냥 헌신을 강요하고, 헌금 강요하고, 봉사 강요하고, 여기서는 또 그렇게 해야 잘 하는 건 줄 알고, 서로 서로 악어와 악어새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 무슨 신앙생활을 무슨 예수를 믿고 있냐고요? 교회가.>

그렇다면 그 죄의 원흉(元凶)이라고 하는 그 뱀은, 결국 성자 밖에서 홀로 독립적인 존재로 살고자 하는 모든 피조물의 상태를 총합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죠? 고게 마귀예요. 우리 안에도 지금 그게 있단 말예요.

뱀이 하와를 뭐라고 미혹(迷惑)했어요? , 왜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만 살려고 해? 네 손발 움직여서, 네 머리를 써! 조거 먹으면 지혜(智慧)롭게 돼! 그리고 움직여!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니까.’ 요게 뱀이잖아요? ‘왜 네가 남자 안에서 갈비뼈로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로, 의존적 존재로만 살아야 되니? 너 혼자 나가서, 객체(客體)로서, 네가 주체(主體)가 되어 한 번 살아봐!’ 이게 뱀이었잖아요? ‘팔다리 움직여, 머리 써! 그거!’ 여자가 거기에 넘어갔단 말예요. 그게 선악과란 말입니다. 피조물의 독립선언! <아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 안하고 혼자들 잘 사는구나! 뭐 해서 종말이 아니라 이게 종말이구나~~>

그런데 얘가 생명의 본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게 죽음이잖아요? 그걸 죄라고 한다니까요. 그래, 빨리 도덕과 윤리, 그런 개념에서 벗어나란 말예요. 성경을 보면! 고게 죽음이라고요. 생명이신 예수 밖으로 떨어져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죄고, 죽음이잖아요? 그게! 그래서 하마르티아, 라고 하는 거란 말예요.

여자와 뱀의 연합(聯合)! 그러니까 마귀니, 귀신이니, 이 딴 소리 하지 말고, 내 안에 들어 있는 마귀성을 보란 말예요. 아니 그 귀신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억울하죠. 자기들이 다 잘못해 놓고 전부 귀신한테. 감기도 귀신! 교만도 귀신! 험담도 귀신! 자기들이 다 해놓고 귀신한테 전부 전가시키는 거요.

하느님께서 그 뱀과 연합되어서, 남자의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독립을 선언한 여자를, 다시 남자의 심장으로 끌어 당겨서, 연합시켜내는 걸, 구원이라 그랬습니다. 이 역사는, 뱀과 연합된 여자가 팔다리를 움직이고, 머리를 움직여서 열심히 달리려고 하는, 신랑 밖에서 달리려고 하는 그 여자가, 아들 안으로 함몰(陷沒)되어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는, 새 창조의 현장(現場)인 거죠. 그걸 혼인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야! 남편에게 복종하라!’라고 하는 거예요. 고거만 똑 떼어가지고 성경이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해야 된다는데, 넌 왜 그 모양이냐고? 그럼 자기는?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라는데, 그건 안 하면서, 그냥 복종하라고.

 

(에베소서 5:31-32) 31 성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32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독립을 외치면서, ‘난 당신의 갈비뼈로, 내 존재성을 차압당한 채로 살기 싫어요.’하고 뛰쳐나갔던 그 선악과 입에 문 여자를, 다시 남자 안으로 끌어들여서 아들과 하나로 만들어내는 게, 구원이라고요. 그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모든 행사가 헛것이며, 무가치한 것임을 폭로해내고, 그 팔다리와 머리! 그 오체를 무력화 시켜야 되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이 뱀을 저주할 때, 어떻게 저주하는지 보세요. 뱀과 여자가 연합되어 있는 상태에서, 여자를 구원해내겠다고 하는 이 뱀에 불과한, 마귀에 불과한 우리를 구원해내겠다고 하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뱀에게 내린 저주는,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가 담겨 있어야 돼요.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가 하느님의 축복(祝福)이었습니다. 흙이 흙이 아닌 척 하는 게 죄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 그래야 내가 창조주가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는 거야.’ 이건 저주가 아니란 말예요. 마찬가지예요. 뱀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보세요.

(창세기 3:14-15) 14 야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너는 저주를 받아, 죽기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15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뱀이 여자에게 하느님에게만 목매달지 말고, 네 손 발을 움직여서 네가 주체가 되어서 살아라!’ 그랬죠. 이게 뱀의 자인식이었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뭐라 그러냐 하면, ‘너 이제 네 발로가 아니라, 뒷발로 배로 기어 다녀!’ 그랬어요. 저주하시면서! 거기서 뭐했다는 거예요? 뱀의 팔다리가 절단 됐다는 뜻이에요. 그 전에는 서서 걸어 다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게 축복인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내 손 발 움직여서, 내 머리 써서, 내 주체를 챙기려고 하는 게 뱀! 마귀란 말예요. 그게 여자란 말예요. 그런데 , 이제 내가 팔다리 똑 잘라버릴 테니까. 배로 기어 다녀!’ 네 대가리도 부셔 버릴 거야. 15절이에요. 그러면 오체가 다 박살나는 거죠? 요게 십자가예요. 머리에 가시 면류관까지! 그래서 놋 뱀이라고 하는 거요. 예수님을!

이게 우리의 인생에서, 그대로 나타난단 뜻이에요.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이 쉽겠습니까? 오체가 절단되고, 대가리가 박살나는! 대가리가 박살나는 그 삶이 우리의 삶이라니까요. 그래야 구원이 임해요. 오체(五體)가 못 박혀야! 그래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덴에서 뱀의 사지절단식이 일어난 거요. 그걸,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이야기하죠.

(골로새서3:10) 10 새 인간으로 갈아 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와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지식에까지! 팔다리는 물론이고, 지식에까지! 대가리까지 부수어져서,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성경이 창세기부터 일관성이 있게 되죠, 그죠? 그러면 이 아담이 오실 자!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라 그랬는데, 어떤 면에서 아담을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했는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설명해 드릴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신부들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뱀과 같게 된 여자를 찾으러 온 거죠? 내 밖으로 나간 여자를 갈비뼈로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로 끌어당기기 위해, 이게 혼인이니까.

(호세아 2:21-22) 21 너와 나는 약혼(장가)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장가)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22 진실도 나의 약혼(장가)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 다오.

야훼 측에서 우리를 찾아와, 고멜 같은, 창녀 같은, 우리를 찾아와, ‘너는 내 갈비뼈야! 나가서 네가 네 주체! 너를 위해 살게 되면 너는 이 꼴! 걸레 되는 거야.’를 보여주는 게, 호세아서거든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와서, ‘없음인 그녀에게 가서 장가들겠다고 찾아오는 게, 구원이에요. 그게 묵시 속에서 일어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뭐예요?

너희들이 뭘 했다고? 그리고 내 앞에서 뭘 한다고 그러는 거야?’ 이거 가르치는 게, ‘베레쉬트예요. ‘엔 아르케라니까요. 그게! 그럼 장가들겠다는 말, 하나로 연합되게 하겠다는 말이? , 다리 잘라내고 부수겠다는 뜻이잖아요? ? 그렇게 해서 움직인 게,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 먹은 거니까! 내가 너에게 혼인, 장가들겠다는 말이, 그거 잘라버리겠다는 뜻이란 말예요. 장기가 혼자 제 발로 돌아다니면 어떻게 돼요? 죽어요. 그건요. 이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돼요. 걔는! 머리가 시키는 대로. 그래서 고거 자르는 거예요. 머리까지 박살내버리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신랑의 일부가 되기 위해선, 신랑이 잠들고, 옆구리가 뚫리고, 항상 출생의 자리에는 물과 피가 쏟아지죠? 여자들이 애 낳을 때, 물과 피가 쏟아지듯이 양수가 터지듯, 예수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진 거예요. 그래서 아담이 오실 자! 예수의 표상(表象)인 거예요. 표호(票號)인 거예요.

그러니까 아담 그 나쁜 놈! 그게 아니라, 하느님의 도구로 뭔가를 설명해 낸 사람이에요. 그 분도. 그래서 그냥 아담이에요. 그 일이 보편적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다 일어난다. 그래서 이름을 굳이 아담, 사람이라고 지은 거요. 사람! 아담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안에 똑같은 일이 일어나야 맞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담의 죽음의 자리가 없음의 자리, 죄의 자리, 그 사망의 자리가 죄의 자리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죄 아래에 오셔서, 죄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는 거란 말입니다.

(로마서 8:3) 3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그 죄를, ‘너 죄 있다.’라고 선고해 버렸다는 거예요. ‘너 죄 있어!’ 이렇게 선고해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이전의 예수님은, 죄인이에요. 여러분! 그런데 히브리서 말대로, ‘죄 없는 죄인이에요. ? 하느님이 죄인으로 정했으면 죄인이에요. 억지로 편들려고 죄인 아녜요. 죄인 아녜요!’라고 하지 마세요. 성경이 죄인이라 그랬으면, 그냥 죄인이에요. 그러나 죄 없는 죄인이에요. ?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한 건 죄가 아닌데, 하나님이 뭘 시켰느냐 하면, ‘, 죄인 해!’라고 시켰기 때문에 죄인이고, 그걸 순응했기 때문에, 죄인 아닌 거예요. 그래서 그 분은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했고 그 분 안에 그리스도! 말씀을 갖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라고 하는 거지, 그 분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선악의 구조로 판단하는 그런 것들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 아녜요.

이사야서에 보면, 예수님이 질고를 졌다, 그러고, 마태복음에 보면 그 분이 우리의 질병을 가져가셨다 그래요. 그래서 허구한 날 아팠어요. 병 걸린 제물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 못 된다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라고 하냐 하면, 하느님이 너 죄인 해!’ 했을 때 죄인 하는 게 순종인 거예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예요. 예수가 그거 했단 말이에요.

하느님이 묵시 속에서 완료해 놓은 아들들을 애굽에 보내서, ‘너희들 애굽의 종 해!’ 애굽에 가고 싶어 간 것도 아녜요. 하느님이 보내버렸잖아요? 그래놓고 애굽의 종 해!’ ‘죄인 해!’ 그러면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느님이 묵시 속에서 다 용서해 놓은, 생명으로 창조해 놓은, 죄인 되는 거요. 그런데 이걸 인정 안 하려고 하니까, 문제인 거예요. ‘나 죄인 아냐!’ 이걸 증명하기 위해, 신앙생활 전부를 소진하잖아요? 그거 증명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예수를, 아담을 그렇게 쓰셨듯이, 우리를 사용하여, 사람, 아담을 사용하여, 예수님도 마지막 아담! 사람! 인자! 그 사람의 아들! 사람을 사용하여, 묵시를 베레쉬트하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걸 설명하기 보다는, 나를 증명(證明)하려고 하는 거! 이게 종교(宗敎)라 말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들으세요.

그렇게 죽어야 할, 죄 아래 있는 육신을 갖고, 그 안에 말씀! 성령! 그리스도를 담고 이 땅에 오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죄인이 되어 죽고, 껍데기가 소멸(消滅)된 후에, 하느님이 주시는, 완성해 놓은 새 몸을 그리스도! 성령과 연합된 상태로 살려냈잖아요? 하느님이! 그 상태로 살아나는 게, 그리스도예요.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말예요. 예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 말입니다.

그게 예수님에게 표로 나타났기 때문에 맏아들이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느님이신 그분이 그런 걸 이루었기 때문에, 그분이 맏아들인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는 둘째, 셋째, 이런 말 안 해요. 다 맏아들이라 그래요.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내 장자(長子)! 라고 하잖아요. 내 장자! 다 그 맏아들의 삶을 살아야 돼요. 방법으로, 도구로 살아야 돼요. ‘디아!’

예수님은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율법에 맞아 죽어, 순종(順從) 하심으로 하느님 사랑을 이루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여주므로 말미암, ‘베레쉬트했죠. 우리에게! 사랑을 전해 줬어요.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그분이 완성했다는 거예요. 다섯 달란트, 율법! 두 달란트,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충성되고 착한 종이 완료하고, 우리에게 하나! 한 달란트를 넘겨 준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반드시 그 삶이 일어나야 돼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랬죠? ‘네가 네 자손들, 아브라함의 자손들 애굽으로 보낼 거다. 430년 동안 보낼 거야, 그리고 거기서, 어린 양의 피로 건져낼 거야. 뭘 설명하기 위해? 어린 양의 피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을 애굽으로 보낸 거죠?

(갈라디아서 3:16) 1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애굽으로 보내요. 그러니까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인 우리들! 성령과 함께 연합되어 아들이 된 자들을 그리스도라고 해요. 그리스도인 우리를, 애굽에, 세상에 보내어, 죄 아래에 불순종(不順從)에 가두어 놓고, 그 아들! 하느님이 하신 일이 뭔가를 설명하기 위해, 이 역사는 지금 설명서로 존재하는 거란 말예요.

그래서 여기서 뭐 대단한 거 이루려고 하지 마세요. 뭐 좋은 교회! 훌륭한 사회! 나라! 다 헛것이에요. 훌륭한 !’ 천만의 말씀! 하늘의 것이 진짜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모형은 반드시 소멸해야 된다고 그랬죠? 천상의 교회!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천상의 교회가 그게 진짜 교회네요. 우리 사도신경에서 고백하잖아요? ‘거룩한 공회와이게 거룩한 교회! ‘묵시 속의 교회가 있음을 믿습니다.’라는 뜻이죠? 그게 진짜 교회입니다를 설명하기 위한 이 땅의 교회가 깨져야 돼요. 그런데 왜 또 사람들이 이렇게 오는 거야. 도대체! 깨져야 된다니까요. 박살이 나야. 마찬가지로 거기에 있는 가 진짜 예요. 그러면 이 땅의 가 깨져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율법에 맞아 죽으심으로, 뱀들의 팔 다리와 대가리를 절단해 버리고, 성령, 콧김, 생기 호흡 그거 같은 단어예요. ‘루와흐, 프뉴마그걸 받아서 살아났다니까요. 새 몸으로! 지식에까지 새로운 몸으로! 우리의 삶 속에 그게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렇게 처절한 고난으로 점철이 되는 거요. 한 번에 뚝 자르면 좋겠는데, 이게 잘 말이 듣지도 않아. 칼도! 그냥 자른데 또 자르고 자른데 또 자르고, 또 남았다고 또 자르고, 한 번에 다 안 잘라지니까.

 

생각해 보자고요. ‘난 뱀이 아닌데자꾸 그러지 말아요. ‘적어도 나는 천국 희망은 있다. 부활 희망은 있다. , 나는 하느님나라에 가고 싶어요.’ 솔직히 얘기해 보자고요. 왜 가고 싶어요? 살기 힘들어서 가고 싶죠?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가고 싶으세요? 여기서 사는 게 힘들어서 가고 싶으세요? 사는 게 힘들어서 가고 싶다면, 내가 편하자고 가고 싶다는 거죠? 고걸 ()’라 그래요. 자기 편하자고 자살하는 걸, 순교(殉敎)라고 그럽니까? 예수 때문에 자살한 사람 어디 있어요? 돈 때문에, 자식 때문에는 자살을 해도. 그러면 우리가 뱀이지 뭐예요? 그러면요! 팔 다리 붙은 뱀! 그러니까 잘라내야 되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러고, 그걸 십자가라 그래요.

오늘을 강도가 좀 쎘는데. 사람들이 좀 오니까 쫓아내려고, 저 인간이! 마음을 먹었나? ! (하하하하) 할 수 없어요. 알아듣는 분만 남으시면 되는 거니까. 여러분의 인생은, 사지 절단, 아니 오체 절단의 삶으로 점철이 되는 겁니다. 그걸 겪으면서, ‘하느님! 더 확실히 자르세요.’라고 고백하는 게 진짜 성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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