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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축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4 조회수1,094 추천수3 반대(0) 신고

 

최근에 마산교구에서는 신부님들의 인사발령이 이루어졌습니다. 인사발령 중 하나입니다만 이번에 교구청 내에서 사목을 하시다가 일본 현지 삿뽀로로 발령이 난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제가 영세를 받았을 때 저희 본당 보좌신부를 맡고 있었습니다. 또 몇 년 전에 보좌로 계신 김호준 시몬 신부님은 가까이 있는 본당에 주임신부로 갔는데 이번에 보니 어학연수라는 명목으로 해외로 가시는 것 같습니다. 어학연수의 이유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확실한 것은 복음을 위한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신부님들의 사목 그 자체가 복음선포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나옵니다. 이건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지상명령입니다. 이 두 분 신부님 외에도 현지 교포사목을 하시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신 분도 계시고 또는 현지로 파송된 신부님도 계십니다. 이 모든 게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수행 일부분입니다.

 

오늘 복음 16절에서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이 절을 유심히 한번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구원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근데 단순히 세례를 받은 걸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세례를 받긴 받되 전제조건으로 복음선포를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단순히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구원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세례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의 중요성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미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써는 세례를 통해 다시 하느님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중요한 의미가 있고 또 우리의 머리에 인호가 새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본질적인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형식에 그친 세례는 아무런 중요한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아마 예수님께서 그런 의도로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봅니다. 구원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이고 또 예수님의 말씀이니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게 우리가 단순히 말하는 믿는 것에 해당할까요? 저는 모르긴 몰라도 그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예수님이 너무 허술해도 허술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대로 삶 속에서 실천을 하는 게 믿는 것이지 않을까요? 이런 의미로 말씀을 하셨다면 구원의 조건을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할 겁니다.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증표의 하나의 일환으로써 하나의 예식행위가 바로 세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물며 세상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따른 행위가 따르는데 당연히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세례는 불가피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근데 실상 우리 신앙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현실은 어떤가요?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세례는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현실입니다. 제가 영세를 받은 지 이제 만 9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제가 영세를 받았을 때 세례 받은 사람의 수가 지금 저희 본당에는 저 포함해 두 명만 생존하고 타 본당에 한 분이 있습니다. 그때 40명 가까이 영세를 받았습니다.

 

9년 동안 지켜본 결과 영세를 받고 계속 신앙생활을 하는 비율이 아주 열악합니다. 이런 현실만을 보더라도 세례의 의미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받고 성당을 꾸준히 나온다는 사실만으론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킬 것 같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을 겁니다. 나오더라도 복음의 삶을 살지 않으면 구원의 조건 중 하나인 세례는 통과했을지 모르지만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칼 라너 신부님께서 주장하신 익명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우리 교회는 구원의 문이 열려 있다고 하는데 특히나 제 2차 바티간 공의회 문헌에서도 이런 사실을 천명한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전체적으로 보면 세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세례보다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고 복음의 정신으로 삶을 삶 속에서 살아내는 게 더 근원적인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닌다고 해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만이 구원이 보장된다는 사실일 겁니다. 물론 최종적인 판단권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고 그 재량권마저도 예수님께 유보되어 있습니다. 그 재량에는 아마 세상 법정에서 말하는 정상참작이라는 게 있을 겁니다. 제가 심판주가 아니라서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이 축일의 의미는 매일미사 앞 부분에 잘 나와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축일과 연관지어서 하나 우리가 묵상을 해본다면 복음의 삶을 산다는 건 어쩌면 매일매일 우리의 삶이 회심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속의 삶으로 기울려고 하는 무게중심을 하느님 중심으로 살려고 방향을 하느님 쪽으로 선회를 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는 그런 삶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노력의 결과치보다는 그 과정과 그 의지를 구원의 잣대로 평가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과치만 놓고 만약 구원의 승패가 좌우된다면 하느님의 대명사인 자비로우신 하느님과는 거리가 먼 하느님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은 아니실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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