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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상근무 (연중 제 1주간 금요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13 조회수1,020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비상근무 (연중 제 1주간 금요일)


   십자가를 안테나로!

   가끔 한밤중에 병원 응급실이나 병자성사건으로 제가 묵는 숙소에 전화가 옵니다. 저는 5분대기조(?)처럼 바로 출동합니다만 때론 속으로 “그렇게 급한 환자가 아니면 다음날 아침에 연락을 하면 될텐데...”하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천만다행인 것은 병원의 응급요원들이 숙소에 환자들을 데리고 오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마르 2, 1- 12)에서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예수님께 달아내려 보내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그들은 착한 이웃이거나 119구조대원들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번호표를 뽑지 않고 왜 새치기하느냐?’ 아니면 ‘특진을 예약했냐?’ 하고 따질 수 있었지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의 병을 치유해주십니다. 저도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과 관대함을 본받는 영혼의 구조대, 응급요원이 되기를 다짐하면서 전에 제가 올린 글과 도반신부님의 묵상글을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며칠 전 뉴스에 교차로에서 응급환자를 실은 응급차와 시내버스가 교차로에서 충돌한 사고소식을 들었습니다. 비록 버스가 푸른 신호등을 보고 직진할 수 있더라도 응급차에게 반드시 양보를 해야 한다는 판결이 났다고 합니다. 저는 이 사고소식을 들으면서 얼마 전에 본 '비상근무'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병원의 응급요원 프랭크(니콜라스 케이지 분)의 일은 모두 거리에서, 그리고 언제나 다급하게 시작된다. 동료들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길을 떠돌다보면 다급한 목소리의 무전이 들어온다. 환자가 있는 장소와 환자의 증상, 그것이 응급요원인 그들에게 주어지는 실마리의 전부다. 현장에 출동한 그들에게는 세 개의 영역이 주어진다. 즉 삶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가사상태의 영역이다. 응급요원이 해야 할 일은 가사상태에 있거나 죽음의 영역에 들어간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 삶의 영역으로 끌어내 오는 것이다. 프랭크는 벌써 몇 달째 삶의 영역으로, 하다못해 가사 상태의 영역으로도 응급환자를 끌어내 오지 못했다. 그런데 살릴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살리는데 실패한 소녀 로즈의 환영은 수시로 프랭크를 덮친다. 어느 날 프랭크는 죽음의 영역에 들어선 심장마비 환자에게 환자가 평소 좋아하던 프랭크 시나트라의 음악을 들려주면서 가사상태의 영역으로 환자를 끌고 오는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프랭크는 환자의 딸인 메리와 가까워진다. 가사상태의 환자를 태우고 도착한 병원의 응급실은 아수라장 그 자체다. 응급실에 있어야 할 히포크라테스의 후배들이나 백의의 천사는 온데 간데없고, 환자와 보호자, 의사와 간호사가 너나할 것 없이 내뱉는 악다구니와 핀잔과 도끼눈만 응급실에 하나 가득이다. 그리고 혈중 염분농도가 짙어져서 끝없이 물을 마셔야 하는 병에 걸린 노엘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갈망하는 현대인을 대변하는듯한 인물이지만, 정작 삶의 영역으로 그를 이끌어내야 하는 프랭크를 비롯한 응급요원들의 삶도 죽음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창녀와 마약 중독자와 마약 상인이 가득한 뉴욕거리에서 피비린내와 구토와 비명에 파묻혀 지내야 하는 응급요원의 삶이 윤택하고 보람찬 것일 수는 없다. 피곤에 쩔어 퀭한 프랭크의 눈과 로즈의 환영을 볼 때마다 내뱉는 혼잣말은, 시간이 지나가면 프랭크 역시 응급환자들과 다를 바가 없을 거라는 것을 암시한다. 프랭크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도 이미 삶과 죽음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루가 14, 1- 16)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쳐주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교사들에게 응급요원(?)으로서의 예수님은 당당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당장 구해 내지 않고 내버려 두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히지만 우리는 응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듣고도 응급차에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다가 교통사고를 내는 그 고집스런 버스기사는 아닐런지요? >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 (도반 신부님 강론)


  <오늘 복음(마태 9장)의 내용은 특이한 면이 있습니다. 보통 병자들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오는데 오늘 환자는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오고 또 본인 자신은 아무 말도 없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첫째는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청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란 것이 드러납니다. 즉 청원기도는 꼭 본인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기도를 하는 것도 들어주신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반응 이십니다. 미사 때 신자들의 기도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는 인지치료를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즉 병든 생각을 바꾸어주시는 치료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가 ‘내가 네 병을 고쳐주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안심 하여라 네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하십니다. 이 병자의 병이 중풍이라고 하였는데 그 병 말고 가지고 있는 더 심각한 병은 생각이 만든 병이었습니다. 즉 자신은 죄인이고 그래서 병이 걸렸고 그래서 하느님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자신은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심한 병적인 죄책감에 시달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몸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늘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그런 죄책감을 덜어주셔서 마음의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성가는 말하기를 믿음이란 하느님이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심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말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기억을 할 것은 왜 동네사람들이 이 사람을 떠메고 나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 병자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즉 그 병자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마음을 갖도록 끔 생활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동네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다 보면 도와주고픈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왜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거냐?’고 외치는 사람에게는 ‘왜 당신을 도울 사람을 안 만들어 놓은 것이냐?’ 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인생을 사는가 하는 것,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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