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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 08 11 (화) 평화방송 미사 클라라 성녀는 성체 성광으로 적군을 물리치고 빵 하나가 불어나 50명의 수녀가 먹는 기적 보여준 주님이 사랑하신 분
작성자한영구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25 조회수1,905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흠숭 하올 삼위일체이신 우리 주님.

오늘 8월 11일 화요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평화방송 오전 10시 30분 미사를 선택하여 참례하였습니다. 오늘 미사를 박희전 루케치오 작은 형제회 소속 신부께서 집전하였습니다. 성녀 클라라에 관하여 자세하게 강론하여주었습니다. 오늘 평화방송 그림과 글 사진에도 나왔습니다. 성녀께서 1240년~1241년에 걸쳐 사라센의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성체 성광(聖光)을 들고 기도를 적군 앞에서 마치자, 눈이 부신 그 성광을 보고 겁을 먹고 대군이 도망가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성녀는 작은 빵 하나로 50여 명의 수녀가 먹을 수 있게 빵을 불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중환자들을 치유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동생 야녜스 자매와 함께 수도원에서 생활한 성가정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성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도 성령님께서 저의 두정엽 정수리에서 가까운 전두엽 우뇌 오른쪽 위치에서 가로로 약간 아래로 내려오는 사선의 긴 막대 모양으로 머물러 만져주시며 빛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두 눈 사이 콧날 경사 양쪽 끝에도 머물러 만져주시며 저의 생명을 점검하면서 그곳에 빛의 생명을 주십니다. 머물러 만져주면서 빛의 생명을 주시어, 각각에 맞는 물질대사를 다스려주신다고 상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오른쪽 코의 인두 아래에 머물러 오른쪽 눈꺼풀 아래 가로로 머물러 만져주시면서 빛의 생명을 주십니다. 이처럼 가로로 머물러 빛의 생명을 주시었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부비동 4곳에 머물러 만져주시면서 그곳의 공기를 체온과 같게 따듯하게 하여주고 습도를 유지하게 하여 준다고 상상하였습니다. 그 공기를 저의 양쪽 귀 안의 조직의 기관으로 보내어 그 건조한 기관이 습도를 되찾아 활발하게 작용을 할 수 있게 하여주고 공기의 압력으로 정원창을 거쳐 난원창으로 나온 그 공기의 압력이 고막 안을 울리게 하여주어 그 소리가 들립니다. 또한 부비동의 그 공기는 비강 비갑개 살갗의 점막으로 보내져서 점막의 건조함을 없애주고 그 점막에 생긴 염증을 없애준다고 상상합니다. 성령께서 오랫동안 그 비강의 비갑개 살갗 점막에 머물러 다스려주어 염증을 없애 주고 점막에 붙어있는 작은 침 덩어리도 없애 주고, 뱉어내게 다스려주었습니다. 그곳이 비강의 비갑개 살갗의 점막이라는 것을 최근에 인터넷 자료 검색으로 비로소 알았습니다.

흠숭 하올 삼위일체이신 우리 주님,

오늘도 이처럼 부비동 4곳의 위치에 머물러 다스려주시어 치유하여주시어 감사합니다. 저의 죄의 상처가 있는 곳을 치유하여 성장하고 발전한 저의 몸과 영혼을 주님께 바칩니다. 거룩하시고 지극하신 하느님의 뜻으로 다스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못난 작은 이를 하느님의 뜻의 사랑으로 다스려주시어 이처럼 부비동의 역할에 대해서 새로 알게 한 그 지식을 주님께 바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 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클라라(8.11) 기본정보

성인명 클라라 (Clare)

축일 8월 11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지역 아시시(Assisi)

활동연도 1194-1253년

같은 이름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성녀 클라라(Clara)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인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톨라나(Ortolana)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고 아기 이름을 ‘빛’이란 뜻을 지닌 클라라로 지었다. 귀족 집안의 장녀이자 용모가 뛰어났던 성녀 클라라는 일찍부터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수도자로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려고 결심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성녀 클라라는 1212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고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되었다.


당시 성 프란치스코는 아직 여성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기에 일단 바스티아(Bastia) 근방 베네딕토 수녀원에 머물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고 친척과 친구들을 동원해 수녀원을 찾았지만, 성별의 표시로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는 성녀 클라라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산 안젤로 디 판초(San Angelo di Panzo)로 옮겼는데, 얼마 후 그녀의 여동생인 아녜스(Agnes)마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녜스만이라도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을 보냈으나, 성녀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 없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렵게 모인 성녀 클라라와 몇 명의 자매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모원으로 정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생활양식과 규칙을 작성해 줌으로써 복음적 가난과 기도의 삶으로써 교회의 복음 선포를 지원할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가 시작되었다. 이 수도회는 영국에서 작은 수녀회(Minoresses)로 불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클라라 수도회로 불린다. 성녀 클라라는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로부터 ‘가난의 특전’을 얻었는데, 이것은 어떠한 소유권이나 재산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과 애긍에 의존해 살아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 후 성녀 클라라는 이 특전을 유지하고자 늘 고심했는데, 오히려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해서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클라라 수도회의 수녀들은 당시 그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한 생활을 실천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 수도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성녀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특히 성녀 클라라는 40여 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뜻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봉사했다.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던 그녀의 삶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기도와 자문을 얻으려고 그녀를 찾아왔다. 그중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왕과 귀족들도 많이 있었다.


성녀 클라라는 또한 많은 기적으로도 유명하다. 1240년과 41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와 동맹을 맺은 사라센의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성녀 클라라는 부축이 없이는 일어설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한 병중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과 수도 가족을 구하기 위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의지하며 성광을 들고 봉쇄구역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향해 나섰다. 성녀 클라라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나가며 눈이 부신 사라센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함으로써 수녀원과 도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한 작은 빵 하나로 50여 명의 수녀가 먹기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했고, 기도와 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를 치유했다. 1252년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에 중병으로 누워있던 성녀 클라라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가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클라라 수도회는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로 퍼져나갔다. 성녀 클라라는 42년의 수도 생활 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냈다. 1253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선종 2년 만인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곧바로 성인품에 올랐다. 1255년 성녀 클라라를 시성한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라고 말했다. 성녀의 삶이 묻어 있는 산다미아노 성당과 유해가 안치된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대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순례자를 불러모으고 있다.


출처 : 가톨릭 굿뉴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클라라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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