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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실주의자, 신종 사두가이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1,051 추천수6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의 세계는 어떠하냐고 묻는 장면이다. 묻는다기보다는 부활이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일곱 명이나 남편을 둔 여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비웃고 있다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가시덤불 대목"을 들어 부활에 관해 말씀하신다. 그러나 실제로 모세가 소명을 받게 되는 그 이야기는 부활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대목이다. 부활(내세)에 관한 생각들은 BC 2세기경에 서서히 형성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이 대목의 이야기를 부활에 관한 말씀으로 재해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모세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살해의 위협을 피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어미의 젖을 먹으면서도 어미라고 부르지 못했고, 화려한 이집트 왕궁에서 호화 생활을 했겠지만 결코 그들과 동질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동족을 역성들었던 일 때문에 낯선 땅으로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다. 미디안 사막 우물가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 가정도 꾸리고 그럭저럭 안정을 찾았으나 국외자의 설움은 좀처럼 가실 수가 없었다.  "내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구나"라는 뜻의 '게르솜'을 아들의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신원에 회의를 품고 살았다는 반증이 된다.

 

따지고 보면 일생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문제, 즉 한 인간의 뿌리인 부모, 민족, 나라의 문제와 결부되어 고통을 당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회의하고 갈등해야 했던 이런 모세의 내면의 이야기가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 소설처럼 준비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사막의 끝에서('인생의 끝에서'?) 모세는 불이 붙고 있으나 타지는 않는 신기한 떨기나무를 만났다. 떨기는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시나무의 일종이다.  모세 자신의 척박한 모습이 가시나무로 나타나고, 그 마음 안에 끓어오르는 갈망이 불로 나타났으나, 그 불은 타오르지는 않고 가슴 안에만 남아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분은 그 나무 안에서 당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원문)이라고 하신다. 그 때, 그 자리, 그 낯선 땅에서 항상 자신의 신원에 대해 회의하고 있었던 모세. 그런 회의를 안고 평생을 살아왔었지만, 존재의 밑바닥까지 흔들리던 어느 날(사막의 끝에서),...하느님은 드디어 그의 아버지와 조상들을 거론하셨다.

 

즉 그의 출생과 신원의 문제에 관해 <먼저> 말씀을 걸어오셨다. 그가 일생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은 그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조상들의 문제이기도 했고, 또한 마치 주님의 문제였다는 듯한 어투로 말을 건네셨다. 다시 말해 그의 삶의 문제 속에, 그의 깊은 내면의 의식 속에, 언제나 같이 계셨으며 그보다 더 오랫동안 고민하셨다는 것처럼 그렇게 그에게 다가오셨다.

 

그가 그 하느님을 만나 어떤 삶으로 전환했는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모세를 죽음과 같은 깊은 잠에서 일으켜주셨다. 이제는 나이도 꽤 먹었고 자신의 신원을 잊고 평탄히 살아갔던 모세였다. 그의 안정된 삶은 뒤흔들렸으나 비로소 그는 자신을 위한, 그리고 민족을 위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분은 그의 잠자던 의식을 일깨웠고 그는 그때야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불멸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살아있는 하느님'이며 그분 앞에서는 죽어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난다. 죽은 듯 의미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의미를 일깨워 되살리신다. 그래서 항상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 되신다.(내게도 그분은 그러셨다) 

 

그러나 이 말은 이러한 인간의 내면적인, 또한 상징적인 죽음과 삶에 관한 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적인 의미로도 실제로 그렇다.

 

그분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 되신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조상들에게도 그랬듯이, 앞으로 올 '미래'의 사람들의 하느님도 되실 것이다. 유한한 사람은 시간 안에서 죽고 태어나지만, 영원하신 하느님에게는 삶과 죽음이 따로 없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도 곧 시간을 벗어나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오면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신 그분을 생생하게 마주 보게 될 날이 올것이다.

 

사두가이파들은 모세오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면서도 내세는 없다고 생각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인정하는 경전의 중심인물인 모세를 살려 일으켰던 그 대목을 상기시킨다.

 

우리 의식의 깊은 잠을 일으켜 깨우셨듯이, 우리 육신의 죽음도 언젠가 그분 앞에서 일으켜질 날이 있다는 것을 유비적으로 가르쳐주시고 있다. 더불어 <참으로 현실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주신다.

 

내세가 있음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더욱 잘 살아야한다는 것을 안다.부활이 있음으로 해서 현재가 더욱 의미가 있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안다.그러기에 참으로 현실적인 사람은 내세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자칭 현실적이라 생각하는 사두가이들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꼬집고 계신 것이다. 

 

과학적인 사고가 절대적인양 생각하는 오늘날에는 내세를,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신종 사두가이들이 더 많을 수 있다. 신종 사두가이들은 우리에게 묻는다.내세가 있다는 것, 부활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그것을 증명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파스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부활이 있다고 믿고 살다가 죽었는데 없다면, 그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믿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된다. 인간은 지금 내기(결단)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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