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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1-09-16 조회수1,935 추천수8 반대(0) 신고

연중 제24주일 복음 (루가 15, 1-32)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소위 의인들은 죄인들, 이방인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자신도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고 더구나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을(613조) 가르치고 그대로 사는 것을 자부심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오죽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바리사이’(즉 남들과는 구별된,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뜻)라고 부르겠는가? 그러니 예수님의 행동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대한 정면도전을 뜻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들에게 세 비유를 연달아 들려주시는 것이다.  

먼저, 잃어버린 양의 비유다.  아흔 아홉마리를 들판에 두고 한 마리를 찾으러 온 들판을 헤매는 목자는 어찌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다. 온갖 고생 끝에 그 한 마리를 찾은 목자가 집에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잔치를 베푸는 모습을 보면 더 어리석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 되니 말이다.  그러니까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경제적인 손실이 아까워서 그렇게 애가 탔다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백은 완전수를 가리킨다.  거기에서 하나가 빠졌든, 둘이 빠졌든, 어떻든 완전수에서 수(數)가 빠져 있다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눈에는 길을 잃고 헤매는 하나가 결코 하나로 끝나지 않는, 전체를 불완전하게 할 만큼의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나머지 다수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다수의 모든 하나 하나도 없어지면 안될 귀중한 하나 하나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그 보물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잔치를 벌리고도 남을 만큼이다.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샅샅이 다 뒤져 찾는 여자의 심정과 마침내 찾았다고 온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아 기쁨을 나누는 마음도 그와 같다.  두 비유의 말미엔 ’죄인 하나가 회개 하는 것’에 대한 하늘에서의 기쁨이 강조되고 있다.

 

마지막 비유인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도 죄인 하나의 회개와 아버지의 기쁨이 주제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처음부터 작은 아들이 방탕하게 살아보려고 작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아버지 없이 자립 해보려는 생각으로 재산을 나누어 달라도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느님 없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신앙은 있어도 가끔은 내가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 말이다.

 

작은 아들의 결과는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삶은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생을 책임질 수 없다. 자신의 생명도 마음도 모두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요. 우리의 불투명한 미래 역시 그렇다.  물론 인간의 노력이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적인 부족함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 위기에서 인간은 무력함을, 절망을, 나약하기 짝이 없는 피조물임을 절절히 깨닫는 것이다.  그때서야 하느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는 인간의 모습이 "그제야 제 정신이 든"(17절) 상태로 표현된다. 그제서야 아버지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얼마나 풍요로운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진 그 어떤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희망은 절로 찾아온다.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이시기 때문이다.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맞아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며,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숨쉴 겨를도 없이 계속된다. 아버지의 기쁨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대목이다.

인간의 회개가 그만큼 위대한 행동이어서가 아니라 자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고 아버지는 생각하시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다.

 

불만에 가득찬 큰 아들은 동생을 가리켜 ’아버지의 아들’로 부른다.(원문)  그에게는 더 이상 형제로서 존재하지 않음을 설명하는 말이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죄인과 세리를 대하는 태도이다. 그의 불만을 가만히 들어보면, 큰 아들은 몸은 비록 아버지와 함께 있었으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아버지의 집은 지겨운 일터였을 뿐이며, 늘 아들이 아닌 ’종’으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신앙은 있으나 하느님 아버지를 항상 명령만 내리는 고압적인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간들은 노예처럼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빗대고 있다.  그들은 다만 무서운 아버지의 징벌을 피하기 위해 애를 써왔던 불행한 사람들이다.

 

아버지의 자비하심은 이 큰 아들도 달래어 잔치로 이끄시는 것으로서 더욱 드러난다.  아버지의 집은 주님이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세상이다.  아버지가 주신, 아버지와 함께 하는 세상은 사라져버릴 한낱 허무한 세계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매일 매일 잔치가 벌어지는 신나는 세상으로 맞이할 것인가?  단지 지겨운 일터로 맞이할 것인가?  

 

에덴, 그 축제의 동산은 아직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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