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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전례 속 성경 한 말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5,200 추천수0

[전례 속 성경 한 말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최근에 고(故) 장영희 교수의 책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How to live & How to love)》를 읽었다. 그 책의 내용 가운데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만약 내가(If I can)’라는 시가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 줄 수 있다면,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쳐 있는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이 시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고 누군가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어 의미와 가치를 지녔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을 표현한다.

 

그런데 2천 년 전의 예수님은 어느 누군가가 아닌 온 인류에게 삶의 희망을 일깨워 주셨다. 한처음 창조 때 누렸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희생 제사를 계속하라고 명하셨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코린 11,25).

 

사도들의 사명을 이어받은 교회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합당한 예배”(로마 12,1)를 행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지니도록 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곧 교회는 미사를 통해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사도 17,25)이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와 찬양을 드린다.

 

이 예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힘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과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는 사명을 수행하려고 노력한다. 그 표본인 바오로 사도는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 9,22)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얼마나 투신하였는가를 이야기한다.

 

미사, 특히 감사 기도에서 온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성찬 제정과 축성문’이다. 미사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구원 업적에 대한 기념과 찬양과 감사는 바로 여기서 절정을 이루면서 재현되기에 미사 전체의 핵심이라 하겠다. 사제는 최후 만찬 때에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하신 말씀과 동작을 반복하여 빵과 포도주를 주님의 몸과 피로 축성한다. 사제는 다른 때와 달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찬례를 거행한다.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사제의 인격에 함께하시어 현존하시면서 최후의 만찬 때와 같이 직접 성찬을 거행하신다. 고대의 성사집인 <레오 성사집>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 업적이 이루어지나이다”라고 하며, 사제가 감사 기도에서 기념 기도를 바칠 때, 백성 전체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거룩하고 살아 있는 제사를 바치고 있음을 드러낸다(<미사경본 총지침> 2항 참조).

 

성찬 제정문에 대한 성경의 근거는 마태 26,26-29과 마르 14,22-25, 루카 22,19-20과 1코린 11,23-26이다. 현재 네 가지 양식인 성찬 제정문은 조금씩 달라 제각기 특징을 지니면서도 본질은 일치한다. 이 기도문은 네 편의 만찬 기사에 나오지만 처음부터 고정된 본문은 없었다. 사도 시대 이후에 주례가 창작하여 바치다가 차츰 고정되었으리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현재 제1양식인 로마 전문은 신약성경의 만찬 기사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경의 내용을 수용하기도 하고 부수적 기도문이 첨가되기도 했으리라고 본다. 제2양식은 히뽈리또 양식과 거의 같으며, 제3양식은 로마 전문에 가깝고, 제4양식은 성경의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주님의 성찬 제정 말씀은 사목의 편리성을 고려하여 네 가지 양식이 모두 동일하다.

 

이 기도문은 두 동작을 동반하는데, 교우들은 무릎을 꿇고(<미사경본 총지침> 43항) 사제는 기도문을 드린 후에 축성된 성체와 성혈을 들어 올려 보여 교우들이 경배하게 한다. 무릎을 꿇는 것은 겸손과 속죄의 자세이자 경건한 마음으로 흠숭하는 자세이다. 하지만 자리가 비좁거나 참석자가 너무 많거나 다른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서 있어도 된다.

 

사제가 성체를 들어 올려 보이는 것을 도입한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중세 초기 제대가 벽에 붙어 있고 사제가 교우들을 등지며 미사를 드리면서, 교우들은 제대에서 진행되는 일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1210년경 파리의 주교는 영성체를 자주 못하는 대신 축성된 빵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을 보고 경배하려는 교우들을 위해 축성 후에 성체를 높이 들어 교우들에게 보여 줄 것을 사제들에게 지시했다. 이것이 급속히 전파되어 13세기에는 성혈이 담긴 성작 거양과 경배가 도입되고, 1570년 비오 5세의 <미사경본>에 비로소 예규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교우들이 점차 경외심으로 성체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관습에 젖어버리자, 1907년 비오 10세는 성체를 보면서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 고백하라고 규정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예수님께 질문한 율법 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37)라고 스스로 답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율법 교사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사랑은 머리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보여 주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미사 때 빵과 포도주의 형상에 현존하여 우리와 하나가 되신다. 그리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필리 2,5)을 간직하며 거룩한 주님의 잔치인 미사에 참여하고 이웃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로 다가갈 때, 에밀리 디킨슨의 시처럼 “나 헛되이 사는 것이 아니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윤종식 신부는 의정부교구 소속으로 1995년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전례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4년 12월호(통권 465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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