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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3주간 월요일]오그라든 손 치유 (루카 6,6-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09 조회수1,125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23주간 월요일]오그라든 손 치유 (루카 6,6-11)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게 서 있게 하려고 가르친다고 한다. (콜로1,24―2,3)
형제 여러분, 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5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26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7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 나타난 이 신비가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성도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려고, 우리는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타이르고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29 이를 위하여 나는 내 안에서 힘차게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기운을 받아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2,1 사실 여러분과 라오디케이아에 있는 이들, 그리고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모든 이들을 위하여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화답송 시편 62(61),6-7.9(◎ 8ㄱ)
◎ 내 구원, 내 영광 하느님께 있네.
○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내 희망이 오리니, 내 영혼아, 그분을 고요히 기다려라.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
○ 백성아,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아라.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이시다. ◎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으시고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 (루카 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제1독서(콜로1,24~2,3)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4)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서 1장 24~29절에서 복음의 일꾼이 된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음을 전하면서 콜로새 교회 내의 복음의 일꾼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먼저 콜로새 교인들을 위해서 겪는 고난을 기뻐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사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교회를 직접 설립하거나 사목을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로 말미암아 받았던 직접적인 괴로움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이방인 출신 교인들을 위해서 유다인들로부터 받는 고난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한 고난 역시 이방인인 콜로새 교인들을 위해 고난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고난을 기뻐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기뻐합니다'로 번역된 '카이로'(chairo)'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으로서 행복과 번영, 평화와 평안에서 오는 감정을 가리킨다.

 

사도 바오로는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처했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사도16,25; 2코린11,16~33; 로마5,3; 필리2,18).

 

사도 바오로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기쁨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희망을 가질 성도들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기쁨과 평화 때문이었다.

 

본 서간을 쓰는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사도 바오로는 투옥이라는 암담한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사도 바오로의 내면을 감싸고 있던 것은 성령 하느님의 충만한 영이었다.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그는 어떤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진심으로 기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 채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겪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혹은 '모자란' 고난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자란'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타'(hysteremata; which is behind; what is still lacking)의 원형 '휘스테레마'(hysterema)'부족', '모자라는 것'으로서 부족함이 보충되어야 할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고난이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도의 고난을 경험하심으로써 완전한 구속(救贖; Redemption)을 이루셨다(요한19,30).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교회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고난이 사도 바오로 자신에게는 물론이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남겨져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사업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맏기셨다(마태28,18~20).

 

사도 바오로는 이 점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도로서 복음 선교를 감당한다는 자부심을 가졌고, 또한 복음 선교 도중에 자신이 고난 겪는 것은 곧 자신과 영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겪으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복음 선교 과정에서 겪었던 그 모든 고난의 흔적을 예수님의 흔적으로 생각했던 것이다(갈라6,17).

 

사도 바오로는 마지막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바오로야, 참 수고했다. 나를 위해 겪은 너의 고난은 바로 나의 고난이다'라고 말씀하실 예수님의 이 한마디를 늘 염두에 두고 고난을 기뻐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기 확신을 가진 사도 바오로는 고난 가운데 기뻐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 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성적으로 사도 바오로 시대의 콜로새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 공로를 헛되이 돌리는 죄인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수 없으시니까, 사도 바오로 자신이 또 하나의 그리스도 예수가 되어 그들의 구원을 위한 대속적 고난을 바쳐야 된다는 믿음과 충성에서 나온 말씀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한편, '채우고 있습니다'로 번역된 '안타나플레로'(antanapllero; fill up)의 원형 '안타나플레로오' (antanaplleroo)는  그 자체로서 이미 '번갈아 채우다'라는 뜻이 있으며, 특히 여기서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새로운 고통으로 가득가득 채운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비하면 매번 새로운 고통이 자신의 육신에 와도 부족하며, 날마다 고난을 극복하는 생활을 계속한다는 고백이다.

 

더구나 그 고난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신으로' 혹은 '자신의 육신 안에'(in my flesh) 채우고 있다는 것은 그 고난이 아무런 목적없이 당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복음으로 인해 겪는 사도 바오로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고난이었다.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사목이 무엇인지를 알아듣고, 하느님의 은총을 깊이 깨달았던 사도 바오로는 교회에 맡겨진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주님의 지상 절대 명령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 사목중에 겪게 되는 고난을 상급으로 생각하고 기쁨으로 감당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사도 바오로와 같은 복음의 신실한 일꾼들을 교회안에서 찾고 계신다보아야 한다.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복음(루카6,6~11)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8)

 

루카 복음 6장 8절의 서두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코와 마태오가 표현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그들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아셨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아시고'로 번역한 '에데이'(edei; knew)'알다'라는 동사 '오이다'(oida)의 과거 완료로서 이미 완료된 동작의 남은 결과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음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엿보고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생각을 이미 아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루카 복음 6장 7절에 밝혀져 있듯이 예수님을 책잡아  고발하려는 불순한 음모였다.

 

루카 복음사가는 아마도 사람들의 생각을 예수님께서 신적인 통찰력으로 간파하고 계셨음을 강조하고 싶어서 독자적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고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예수님을 고발하려는 구실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무리들 가운데에 자신들을 숨기고 있는 반면에, 이 사실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병을 고치는 행위를 그들이 잘 볼 수 있도록 그를 사람들이 있는 한가운데로 서게 하신다.

 

악한 목적을 가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을 숨기고 있지만,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공개적으로 행하신다.

 

예수님께서 공개적 치유를 행하신 것사람들로 하여금 안식일의 올바른 의미를 깨닫도록 가르치시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러한 행위가 적대자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킬 것을 알고 계셨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하실 일을 당당하게 행하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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