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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1,21ㄴ-2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12 조회수91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월 12일 화요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마르1,21-28)

 참 권위/2012.1.10 연중 제1주간 화요일

 

1독서<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히브2,5-12)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화답송 시편 8,2ㄱㄴ과 5.6-7.7-9(◎ 7ㄱ 참조)

◎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아드님이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 주님저희 주님온 땅에 당신 이름이 얼마나 크시옵니까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저 모든 양 떼와 소 떼들짐승하며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복음<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마르1,21-28)

21 카파르나움에서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히브2,5-12)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0)

 

히브리서 2장 5-9절에서는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한시적으로 천사보다 낮아지셔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밝혔다.

이제 이어지는 2장 10-1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도를 형제 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내용의 도입부인 본절의 전체적 의미는,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자녀들인 성도들을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성도들의 구원의 영도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고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많은 자녀'로 번역된 '폴루스 휘우스'(pollus hyus)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해 죄사함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자들을 말한다.

특히 '휘우스'(hyus)의 원형 '휘오스'(hyos)는 부모의 기업을 상속할 자격이 있는 아들을 일컫는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서 '많은 자녀'는 장차 하느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을 의미한다(로마8,15-17; 갈라4,5-7). 또한 본문에 언급된 '영광'이란 장차 유업으로 받게 될 하느님 나라를 말한다.

영광은 본래 하느님과 그리스도께만 있는 것이며, 죄인들에게는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과 수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그 영광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보다 정확히 원문 '톤 아르케곤 테스 소테리아스 아우톤'(ton archegon tes oterias auton)을 번역하면, '저희 구원의 우두머리 혹은 창시자를' 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구원 얻은 자들의 '우두머리' 즉 '아르케고스'(archegos)가 되신다는 것인데, 이 명사는 예수님께 대해 사용된 참으로 고귀한 칭호이다.

 

이것은 본절 이외에도 히브리서 12장 2절과 사도행전 3장 15절, 5장 31절 등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칭호로 나타난다. '아르케고스'(archegos)라는 단어는 '첫째', '처음', '시작'을 의미하는 '아르케'(arche) 어근으로 삼고 있는 단어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첫째 가는 자', '우두머리', '영도자' 이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Zeus)가 여러 신들의 '아르케고스'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이 명사는 '창시자', '개척자', '설립자'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즉 '아르케고스'는 남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원의 아르케고스' 라고 하는 히브리서 저자의 증거는 우리가 뒤따라 들어갈 수 있도록 그분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유일한 지도자요 안내자가 되신다. 따라서 그분의 지도와 안내를 받는 사람들만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전치사 '디아'(dia)는 소유격을 수반하여 수단, 방법, 매개의 뜻을 나타내어 쓰였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 구원의 '아르케고스'가 되실 수 있었는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영광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는지 알게 된다.

즉 그분은 이 일을 위해 고난이라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셨다. '고난'에 해당하는 '파테마톤'(pathematon)는 '파테마'(pathema)의 복수형이다.

 

이 단어가 복수형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그 고난이 십자가의 죽음만을 지칭하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육화(강생)와 지상에서의 모든 수난과 삶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구원의 영도자로서 완전하게 되신 것이다.

 

한편, '완전하게 만드신 것' 으로 번역된 '텔레이오사이'(telleiosai)는 '텔레이오오'(telleioo)의 부정사이다. '텔레이오오'는 '완전하게 하다' 혹은 '완성하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동사의 어원인 형용사 '텔레이오스'(telleios)는 신약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쓰였는데, 기본적으로 의도된 계획이나 목적을 완전하게 이루는 것을 나타낸다. 동사형인 '텔레이오오'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이 같으시고 하나이시며(필리2,6; 요한10,30) 본래 완전하신 분인데, 어떻게 그가 더 이상 완전해질 수 있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인격적, 도덕적으로 부족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해졌다는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다.

여기서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구속 사업의 측면에 관한 것이다. 즉 구원의 영도자, 구원의 주로서 완전하게 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데, '고난'이라는 필연적인 과정 거쳐야 했다. 이 고난을 통해서만 그는 구원의 영도자(주)로서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이후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고,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는 하느님의 원칙이 세워지고(히브9,22), 죄인들의 피는 그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었기에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해 피를 흘리셔야만 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육화(강생)하여 인간이 되셨다해도, 대속의 피를 흘리는 고난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구원의 영도자(주)로서 완전하게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의 영도자(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완전케 하심이 '당연한 일'(합당하고, 마땅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연중제1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1,21ㄴ-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5~26)

 

마르코 복음 1장 24절에서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대하여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나자렛이 예수님의 출생지는 아니지만, 유년 시절을 보내신 곳이므로 실질적인 출신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나자렛은 유대인에 의해 경멸받던 지명이므로(요한1,46), 더러운 영이 갈릴래아를 대표할 수 있는 큰 도시인 카파르나움에서 사람들 앞에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리고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에 해당하는 '티 헤민 카이 소이'(Ti hemin kai soi; what do you want with us)를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더러운 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은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저희'라는 표현으로 쓰고 있는데,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자신을 복수 위격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더러운 영이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악한 영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썼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는 표현은 악한 영들이 내용적으로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조롱하며 자신을 방해하는 투의 설의적 형태의 문장이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상당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악한 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탄의 권세를 멸망시켜서 사탄의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 당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마르2,10; 1요한3,8).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에 해당하는 '호 하기오스 투 테우'(ho hagios tou theou; the Holy One of God)는 마르코 복음 1장 23절의 '더러운 영'에 해당하는 '프뉴마티 아카타르토'(pneumati akatharto; an evil spirit; an unclean spirit)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잠언1,7; 야고2,19).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꾸짖으시니


여기서 '꾸짖으시니'이 해당하는 '에페티메센'(epetimesen; rebuked)의 원형 '에피티마오'(epitimao)는 '엄하게 경고하다','책망하다'는 뜻이다.

당시에 마술사들은 독특한 도구를 사용해서 주술적 행위를 하여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시늉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당신 자신의 말씀의 권위를 사용하셔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셨다.

 

그리고 구마행위를 하시는 예수님의 선포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는 두 가지 명령으로 나눌 수 있다.

'조용히 하여라'는 첫번째 명령은 더러운 영이 이미 알고 있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발설을 엄하게 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에 미리 알려지면,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 메시야로 옹립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지장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조용히 하여라'에 해당하는 '피모테티'(phimotheti; he quiet; hold your peace)의 원형 '피모오'(phimoo)라는 단어가 '입에 재갈을 물리다'라는 의미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까지 그 함구령이 얼마나 비밀스럽게 지켜져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나가라'에 해당하는 두번째 명령은 직접적으로 '치유 행위'와 관련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항변하는 더러운 영을 잠잠케 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서 더러운 영에 들려 고생하는 부마자로부터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구마 행위를 하신다.

여기서 '나가라'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come)의 기본형은 '에르코마이'(erchomai)인데, 앞에 '안으로'에 해당하는 '에이스'(eis; into)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들어가다'는 뜻의 '에이세르코마이'(eiserchomai)가 되고, 앞에 '밖으로'에 해당하는 '에크'(ek; out of)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나가다'라는 뜻의 '엑세르코마이'(ekserchomai)가 된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장 21절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해당하는 '에이셀톤'(eiselthon; he entered)과 마르코 복음 1장 25절 '나가라'에 해당하는 '엑셀테'(ekselthe; come)가 대조가 되어, 예수님께서 '회당 안으로 들어오심'이 더러운 영의 '회당 밖으로 (사람 밖으로) 쫓겨남'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들어 오심과 더러운 영의 쫓겨남 사이에는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의 선포가 놓여 있다(마르1,22).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자로서의 신적 능력과 권세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은 자신의 지혜에 근거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거주하던 사람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당신의 장면을 '경련을 일으켜 놓고'에 해당하는 '스파락산'(sparaksan; had torn; shook violently) '(큰 충격에 의한) 큰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메갈레'(phone megale; with a shriek; with a loud voice)라는 두 단어를 사용해서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 아래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을 시각과 청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더러운 영이 자신이 머물렀던 사람에 대해서 행하는 최후의 학대 장면인 경련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면서도, 그가 내지르는 죽음에 이르는 듯한 비명과 통곡의 소리를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더러운 영의 극한 상실감과 마지막 저항을 묘사했다.

이것은 공관 복음서 안에서 마르코 복음사가만의 독특한 표현인데, 사탄의 세력의 완전한 패배를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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