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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0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20 조회수1,28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0년 9월 20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 몇몇의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천주교는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신해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

(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6(125),

1-2ㄱㄴ.2ㄷㄹ-3.4-5.6(◎ 5)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제2독서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1베드 4,14 참조
◎ 알렐루야.
○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마태 10,3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리라.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에서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일상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날마다’라는

말마디가 추가되는 까닭입니다.

특정한 순간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어려움들은,

실제로는 십자가와 무관한

경우가 많지요. 삶의 처세를

위한 고난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엮는 것은, 꽤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위하고,

예수님께서 위하신 이웃을 향하는

 삶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수없이

듣고 들어 온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는 낯선 이들과의

연대, 불편한 사람과의 동행,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겸한 공동체적 삶의 지렛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에

앞서서, 뜻이 달라도, 부족하고

어눌하더라도 제 이웃을

사랑하겠노라는 다짐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 점검해 보아야 할

삶의 기본입니다.
일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은

 세상 처음부터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원시 시대든, 인공 지능(AI)이 인간을

지배할 것 같은 미래의 어느 시간이든

사는 것이 왜 안 힘들겠습니까.

다만, 시대의 순간순간 함께하는

삶의 이질성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함께 답할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와, 제 삶에만

천착하여 다른 삶에 대한 질문은커녕

제 삶의 의미마저 속세의 천박한

유혹에 저당 잡힌 이들의 간극은

천국과 지옥보다 더 큰 것이겠지요.

십자가의 삶은 타인의 삶 안에서

제 삶의 가치를 깨닫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은 큰

선물을 미리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대단하다. 그들의

순교를 감히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

하는 정도로만 오늘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질 마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방증입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부러워해야겠습니다.

부러워서 나도 얼른 그 선물을

움켜쥐고 싶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설레는

기쁨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얼른 이웃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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