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2.17.강론.“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오스딩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7-12-17 조회수1,725 추천수0 반대(0) 신고

 

요한 1,6-8.19-28(대림 3 주일)

오늘은 ‘기쁨주일’(gaudete) 입니다. ‘핑크 빛’ 대림초에 불이 붙여졌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태웁니다. 빛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기쁨입니다.

<입당송>에서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 4,4.5 참조)

 

<제1독서>에서도 이사야 예언자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이사 61,10-11)

 

<화답송>에서도 성모님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루카 1,46)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기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입니다.”(1데살 5,16-18)

 

<복음 환호송>에서도 이사야 예언자의 말로 노래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이사 61,1 참조)

 

그렇습니다. 이토록 오늘 말씀은 기쁨의 선포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기쁨으로 나서야 하는 곳은 당혹스럽게도 광야입니다. 우리는 설레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의 핑크빛 옷을 입고서 어처구니없게도 텅 빈 광야로 나서야 합니다. 그곳에서 광야처럼 텅 빈 사람, 요한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증언하며 기뻐하였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요한 3,29)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을 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비워진 데서 오는 기쁨이 솟구쳐야 할 일입니다. 자신을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하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데서 오는 기쁨이 솟구쳐야 할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요한은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이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고, 그저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비워져 있기에, 참된 소리가 되었습니다. 비어 있는 자 만이 온전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온전히 비어 있기에 소리를 낼 수 있는 피리와 같습니다.

사실, 소리를 내는 이는 피리가 아니라 피리를 부는 이이다. 피리가 결코 스스로 소리를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붓이 스스로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을 쥔 이가 글씨를 쓰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요한은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그저 비어 있는 피리에 지나지 않으며, 글을 쓰는 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 비어있는 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말이 아니라,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어 퍼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비어졌기에 빛을 반겨 맞아들였고, 들어 온 그 빛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빛의 참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비어져 있음은 겸손과 낮춤으로 드러납니다. 자신이 “외치는 이”가 아니라, 그저 외치는 이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한 그는 이제 자신이 다른 이의 발밑으로 내려가려고 하나, 그 자격마저 없는 몸이라 고백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종의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부당한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한편, 그는 자신이 비어져 있는지라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분을 알아보고서 선포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렇습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건만, 우리는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분을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그렇습니다. 어둠은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 빛이 들어와 눈이 열려야 그분을 보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눈을 뜨고도 “그들과 함께 걸으시는”(루카 24,15)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주시자, 마침내 “눈이 열려”(루카 24,31)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믿음 안에서 영의 눈이 열려면, 보게 됩니다. 곧 빛이 비추어 눈이 열리는 것이 “깨어남”입니다. 오늘 우리는 “깨어있기” 위해서, 먼저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쁨도 함께 깨어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의 현존을 보게 되면, “주님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기쁨’ 안에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너희에게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다.”(요한 15,11)

 

바로 지금이 그렇게 깨어나야 할 대림의 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로마 13,11-12)

 

그렇습니다. 이제 ‘이미’‘아직 아니’ 사이에서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곧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구원은총”에 깨어나고, 동시에 ‘아직 아니’ 완성된 “그리스도의 승리의 개선행진”(2코린 2,14)을 동행하시는 성령께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