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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다니3,14-20.91-92.9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01 조회수1,146 추천수0 반대(0) 신고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다니3,14-20.91-92.95)

 

히브리어로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나의 심판관이시다'는 뜻이다,

다니엘서의 작중 연대(글 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는 네부카드네자르가 바빌론 왕좌에 오른 B.C.605년 이후부터이다네부카드네자르의 통치 시절에 예루살렘 공략과 바빌론 유배가 크게 B.C.597년과 B.C.587년에 두 번 있었는데그때가 여호야킨이 남부 유다를 다스리던 때였다(2열왕24,10-16; 에제1,2).

 

다니엘이란 한 인물을 통해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이다.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저자가 기록한 시점)는 마카베오 항쟁을 불러일으킨 안티오코스 4(BC175-164)의 박해때이다본문 자체가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가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사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다니엘8,9-13; 9,27 ;11,31참조).

 

기원전 164년에 있었던 성전 정화는 언급하면서도 같은 해에 있었던 박해자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책의 저작 연대를 기원전 164년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니엘서 1-6장에 나오는 여섯 가지 이야기는 박해 상황에 걸맞지 않게 유머스럽고 긴장감이 덜하다이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출중한 인물들이 고대 근동의 궁정안에서 벌인 활약상을 전하는 3인칭 궁정 설화의 전형적 예들이다.

 

이 궁전 설화들은 마카베오 항쟁 훨씬 이전에 디아스포라(본국이 아닌 곳에서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유다인들이 이방인 왕궁에서 겪었던 갈등과 성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서 저자는 이 궁정 설화들을 입수해서 마카베오의 박해 상황에 맞게 편집했을 것이다.

 

다니엘서 3장은 다니엘의 세 동료가 우상 숭배를 거절한 탓으로 불가마에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이다.

다니엘서 2장과는 달리 3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는 현명한 군주가 아니라 어리석고 잔인한 폭군이다그는 금신상(아마도 자기 자신의 상)을 만들어 놓고 문무대신들에게 거기다가 절을 하라고 명령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권능과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 아니라 이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그리고 바로 그러한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자신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내 제국의 힘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절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활활 타는 불가마에 던지게 한다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불길을 가마 밖으로 내몰아 세 젊은이를 보호한다.

그때 불가마속에서 세 젊은이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그리스어 역본에만 나오는 '아자르야의 노래'와 '세 젊은이의 노래'이다(다니3,24-90).

 

"이제라도 뿔 나팔피리비파삼각금수금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 (15)

 

본절 서두에 나오는 '이제라도'에 해당하는 '케안 헨'(kean hen)은 '만약 지금이라도'로 직역되며 이미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자신이 직권으로 부여하겠다는 뉘앙스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 세 유다인들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다니1,19.20), 과거 그들의 간절한 중재 기도로 인해 자신의 꿈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다니2,49). 이와 같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으로서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금신상에 절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세 사람이 남는다는 것은 왕으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돌려 다시 주어진 기회에 금신상에 절한다면네부카드네자르는 이렇게 한 번 그들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네부카드네자르임금이 그들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도록 상당히 이례적인 한 번의 기회를 더 부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악기소리가 날 때에'에서 '날 때에'에 해당하는 '베잇따나 띠 티쉬메운'(beiddana di tishmeun)은 문자적으로 '너희가 듣는 바로 그 때에'(at the time you hear) 라는 의미이다이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곧바로 절해야 한다는 즉각성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즉시)에 해당하는 '빠흐 샤아타'(bah shaatha)가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라는 의미의 단어인데그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임금인 자신의 명령에 거역하면 조금의 가차도 없이 즉각 불가마(풀무불)가운데 던질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당시 불가마가 금 신상 가까이에 있었고,그 세 사람을 그 곳에 던져 넣을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졌단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수 있겠느냐?" (15)

 

네부카드네자르의 이 발언은 실상 유다인들이 믿던 하느님께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그는 사드락메삭아벳 느고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말을 내뱉고 있다.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신'이라는 말은 분명 '하느님'을 염두에 둔 말이다달리 말하면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손에서 이들 유다 사람들을 건져 낼 수 없다고 장담하는 것이다여기에서 ''에 해당하는 '엘라흐'(elah)는 아람어에서 '하느님'을 지칭하는 단수형 명사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에 의하면,그 하느님은 일전에 자신에게 꿈을 계시해 주시고 그 꿈의 모든 비밀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신 전지하신 신이셨지만지금은 자신의 권한 하에서 불가마에 떨어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건져낼 능력이 없는 신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은 부분적이었고 불완전했으므로 자신의 권력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만일 이 세 사람이 네부카드네자르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같은 임금의 제안이 담긴 이면의 의미를 그들이 알고 있었기에 이들 세 명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은 목숨을 내놓고 금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극구 거부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내 손'에 해당하는 '예다이'(yedai)는 사실상 네부카드네자르 자신의 무소불위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위치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신보다 높은 최고의 신적 위치에 올려 놓고 있다.

이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뿐 아니라 타인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낸 다른 인간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교만의 함정이다.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자는 자신의 근본과 한계를 쉽게 망각해 버리고 자신의 능력이 무한한 것인 양 착각하며,자신의 존재를 종종 신격화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의 그러한 오만방자한 신성모독적 언행이 세 젊은이들이 소유한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가마를 여는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19)

 

'일곱 배'에 해당하는 '하드 쉬봐'(had shibah)는 '칠 배'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가능한 한 최상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불가마(풀무불)은 벽돌을 굽거나 금속을 녹이는 등의 용도에 맞게 일정한 온도로 가열을 했지만 그날 만큼은 이러한 용도와 관계없이 온도를 극대화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 배'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킨 세 사람이 당할 혹독한 시련의 강도를 묘사한 것이며동시에 네부카드네자르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극한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역시도 자기 내면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한 파격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네부카드네자르를 신격화하고,그가 가진 권세와 권력을 통하여 그를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 아니라다친 곳 하나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2)

'결박이 풀려서'에 해당하는 '셰라인'(sherain)은 원래 '자유롭게 하다','풀어주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셰레'(shere)의 수동태 분사형으로 '자유롭게 된'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불 속에 떨어진 세 사람에게 가해진 단단한 결박이 풀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하나는 불에 그 결박이 완전히 탔을 것이라는 설명과 다른 하나는 네번 째 하느님의 아들 같은 존재가 풀어 주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또한 '네 사람'에 해당하는 '꾸브린 아르베아'(gubrin arbeah)는 '네 명의 남자들'이라는 의미이다불 속에 떨어진 사람의 숫자는 셋이었으며그들을 붙들고 던진 군사들마저 모두 용광로 밖에서 타 죽었기 때문에 이 역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거닐고 있는데'에 해당하는 '마흘레킨'(mahlekin)은 '걸어 다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할라크'(halak)의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 속을 계속해서 이리저리 활보하고 있는 그 네 사람의 동작을 나타낸다.

 

그들이 이렇게 힘차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는 것은 불 속에서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주 하느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 광경을 설명할 길이 없다.

'다친 곳 하나 없이'에 해당하는 '와하발 라 이타이'(wahabal la ithai)는 '상처가 전혀 없었다'는 의미이다불 속의 네 사람의 상태에 대해 그 정도로 정확히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위치가 그 용광로에서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의 아들'에 해당하는 '레바르 엘라힌'(lebar elahin)은 다신론(多神論)적 세계관에 익숙해 있던 당시 네부카드네자르의 이교적 인지 능력을 넘어서 그 자신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표현을 천사 혹은 천사들 가운데서도 대천사 미카엘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하여 신약의 관점에서 육화(강생)이전의 그리스도의 형상이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을 가진 제2위 천주 성자이신 임마누엘의 반영이라고 본다.

 

2위 천주 성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신실한 종들과 함께 친히 고난을 함께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고난을 견뎌내게 하셨으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셨던 것이다.

천주 성자 하느님의 그와 같은 임재와 보호하심은 사실상 당시 바빌론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던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더 나아가서는 시대와 장소가 변해도 여전히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에 대해 베푸시는 은혜를 암시하는 예표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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