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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01 조회수940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군군신신 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다워야 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본 이야기일 겁니다.

 

여기서 공자는 리더가 가지고 있어야 할 덕목 중에서 제1순위를 덕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덕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때 공자가 말하는 덕은 공자가 한 말에서처럼 다움에 있다고 공자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위치에서 그 위치에 걸맞은 이상적인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맞는 말씀이지만 이때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의중은 어디에 있었다고 볼 수가 있을까요?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때 유다인들의 대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종노릇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노릇한다고 표현을 하시지 않았지만 자기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를 잘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을 할 정도이면 나름 믿음의 조상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만약 제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에 걸맞은 행동과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하십니다. 정녕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텐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유다인들 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 자손답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이 말씀을 뒤집어서 이해를 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아브라함이라고 자기들이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원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닌 엉뚱한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 생각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일 수가 있습니다. 이 유다인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 예수님은 외형은 그럴지는 모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모습대로 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뜨끔한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당을 나가니 하느님의 자녀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논리라면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하느님의 아들과 예수님의 제자가 될 리가 만무하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가슴 깊이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37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지 않으면 나를 죽이려고 들 태세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요즘은 말씀도 간직하기만 해도 참 대단한 신앙인이라고 할 정도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설사 그런다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간직만 하고 있는 것은 야고보서에도 나오지만 죽은 믿음이라고 나옵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37절 내용을 보면 실천은 고사하고 이들은 마음속에 하느님의 말씀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도 담고 있다면 예수님을 죽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를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결국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실제 예수님의 삶을 따르겠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유다인들이 하는 말 중에 자기들 스스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사생아라는 표현을 해 자기들은 사생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왜 요한사가는 이 말씀을 복음에 표현을 했을까를 한번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신앙인은 영적인 사생아라고도 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다니엘서 독서에도 나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압박에도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주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불 속에서 구출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를 본 임금은 이들이 자기가 압력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게 우상숭배라고 생각해 하지 않았지만 천사의 도움으로 구출되는 것을 보고 실제로 하느님께서 이들을 구해냈다고 찬미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따라간다고는 하지만 오늘 독서에 나오는 것처럼 진정으로 제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을 제대로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지 성찰해봐야 할 겁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처럼 자기는 제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신지를 한번 진지하게 묵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걸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마치 성당 마당만 밟는 신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상 논어에서 나오는 표현처럼 자녀면 자녀다운 모습을 보여야 될 것이고 그런 모습으로 사는 이정표는 말씀 속에 그 해답이 있다고 알려주고 있으며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도 예수님을 죽이는 형상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려주시는 하나의 경종일 거라고 봅니다.

 

오늘 복음 40절을 잘 묵상하면 왜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예수님을 죽이는 꼴과 같다고 표현을 하셨는지 스스로 한번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제가 평신도라서 제가 말씀드릴 사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사제라면 말할 수가 있겠지만 그건 신부님들의 영역이라 그만 여기서 남은 묵상은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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