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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미사 전례의 발전 역사3: 6-11세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29 조회수3,977 추천수0

[미사 얼마나 아십니까] 미사 전례의 발전 역사 (3) 6-11세기

 

 

교황 미사 시대(6-7세기)

 

6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로마 교황의 권위를 점차 의식하게 되면서부터 전례에서도 로마 교황 미사가 모범으로서 각지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교황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이었다. 이 교황은 로마의 주교로서 부근에 있는 성당을 순회하였는데, 이를 위해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의 지정 성당(Statio)이 정해지고 이것이 연중행사로서 전례력에 점차 고정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 시대에는 주교의 입당 행렬에 따른 입당노래가 자연적으로 발달하였고, 봉헌 노래와 영성체 노래도 봉헌 행렬과 영성체 행렬을 하는 신자들의 능동적 참가의 노래로서 형식이 점차 갖추어지게 되었다.

 

또한 시작예식에 '크리스떼 엘리이손'(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이 첨가되고, 대영광송(Goloria), 본기도, 예물기도가 만들어졌다. 감사송과 감사기도(성찬기도)가 구분되면서 감사기도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노래인 '상뚜스'(거룩하시도다)가 첨가되어 6세기에는 널리 불려지게 되었다.

 

7세기 말에는 교황 세르지오 1세에 의해 빵(성체)을 나눌 때 계속해서 부르는 노래로 '아뉴스 데이'(하느님의 어린양)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감사기도 안에 역대 교황의 이름이 전 교회에 열거되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 전구를 청하고자 사도들과 당시 로마에서 존경받던 순교자들의 이름이 첨가되었다.

 

그리하여 7세기에 이르러서는 시작예식과 마침예식을 비롯한 예물준비 예식, 영성체 예식이 대부분 정착되어 현행 미사 전례와 비슷한 행태를 갖추게 되었다.

 

 

신심 미사 시대(8-11세기)

 

완성된 로마 전례가 8세기에서 11세기에 걸쳐 유럽 대륙의 프랑크족과 게르만 민족에게 수용되면서 미사 전례도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제대, 제물, 복음서에 대한 분향 및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한 분향이 800년 경에 도입되었다. 미사를 바칠 준비로서 사제가 개인적으로 하던 '고백의 기도'를 11세기부터는 공적으로 하게 되었고, 사제는 모든 신자에게 사죄를 선언하였다. 신앙고백인 '니체아신경'이 1014년에 처음 로마 미사에 도입되었다. 또한 사제용과 신자용의 크고 작은 두 종류의 제병을 사용하게 되어 영성체 전에 빵을 떼어 나누던 것이 형식적이 되었다.

 

이 시대에는 미사의 공동집전을 하지 않게 되고, 사제들 사이에 미사를 개인적으로 거행하는 신심이 성행하게 되어 옆 제대 수가 늘어났다. 사제는 옆 제대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어도 대면하지 않았으며, 각 제대 배후에는 성상이나 성화와 조화를 이루도록 장식한 벽이 세워지게 되었다.

 

또한 미사 중에 소리를 내지 않고 혼자 속으로 외는 기도가 많아졌다. 심지어 감사기도인 '로마전문'(Canon)도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침묵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기도하였다. 제대가 점차 신자석에서 멀어져 사제석과 신자석 간에 거리가 생겼으며, 신자는 무릎을 꿇고 성체를 영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 시대는 객관적이고 공동체적인 교회의 신앙을 나타내기 보다는 주관적인 신심의 대상으로서 미사를 이해하게 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가톨릭신문, 2004년 2월 15일, 정의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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