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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Credo - 나는 믿나이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13 조회수6,572 추천수0

[전례, 그 능동적 참여] “Credo” - 나는 믿나이다!

 

 

묵주기도의 첫 기도문인 사도신경은 라틴어의 “나는 믿는다”라는 뜻을 가진 “Credo”로 시작된다. 라틴어에서 “o”로 끝나는 동사는 바로 그 동사의 행위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1인칭 주격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어 사도신경은 라틴어와 어순이 달라 신경의 첫마디를 “전능하신 천주성부”로 시작하기에 신경을 봉헌하는 주어보다 신경의 내용인 하느님이 먼저 등장하고 이 믿음을 선언하는 “나!”라는 주어는 생략되는 안타까움이 있다.

 

교회는 묵주기도의 첫 기도문에 신경을 배치하였고, 그 신경의 첫 마디가 ‘나!’이므로 묵주기도의 첫 기도문의 단어는 결국 나!인 셈이다. 즉 묵주기도는 믿음의 기도이며 이 믿음을 선포하는 나에 대한 영광스러움과 자랑스러움으로 시작하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선언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하느님과 관계된 운명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믿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에 대해 내가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할 수 있는 것임을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셨다. 이를 해석하자면 믿음의 수단은 육신의 눈과 세상적 전망(展望)이 아니라 신앙의 눈이며 사랑을 이루기 위한 희망적 노력임을 성경은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의 진면목을 요한복음 9장에서 믿음으로 치유 받은 태생소경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다.

 

태생 소경은 볼 수 있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그 침으로 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다 바르신 후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라고 하셨다. 그 후 그는 보게 되었다. 바리사이들은 그를 불러 안식일 날 그의 눈을 뜨게 해준 예수는 죄인이며,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고 비하하였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께서 “한 일을 보면 하느님께서 보낸 분임을 알 수 있지 않냐?”고 대꾸하였다. 바리사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뒤집어써서 장님이 되었던 주제에 감히 그들을 가르치려 하느냐고 그 사람에게 욕을 퍼부으며, 그를 회당에서 쫓아내었다.

 

소경은 바리사이들에게 “누구든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하느님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주십니다.” 라고 소신 있는 대답에 이어 예수님께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Credo)”라고 믿음을 선언하였다. 위의 눈먼 소경의 이야기에서 오히려 하느님을 안다는 바리사이들의 교만한 편견이 오늘 바리사이들을 눈멀게 했다.

 

위의 교훈 안에서 내가 비록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죄인이거나, 보잘것없이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신감을 잃은 존재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선언하는 순간 나!라는 존재는 더 이상 약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되는 운명이 됨을 알 수 있다.

 

홍해바다를 건너기전 하느님은 분명 말씀하셨다.

 

“너희는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모세가 손을 뻗자 하느님의 힘은 홍해를 갈랐다.

 

또한 병의 치유를 얻기 위해 믿음의 행위를 보인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말씀하셨다.

 

위 말씀에는 믿음의 용기에 대한 칭찬이 서려있다. 용기란 무엇인가를 무릅썼다는 것을 전제한다. 용기란 자기한계를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시작한 묵주기도는 우리를 사랑의 실천가로 만들어

 

마음 약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의심할 수 있다. 믿음은 강요 없는 자신의 용기 있는 결단이지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모님은 믿음의 전형적 모범이시다.

 

천사에게 자신이 처녀임에도 성자의 잉태를 믿고 그 목적과 섭리에 동의하며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지금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신다.

 

성모님의 응답은 믿음이란 내가 하느님 당신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닌 그분의 뜻으로 살아감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은 실상 그 누구의 소유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릇된 이기심으로 하느님 없는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려고만 한다. 하와의 선악과 따먹음과 카인의 살해 그리고 바벨탑 사건 등이 성서에서 그것을 말해준다.

 

하느님은 우리의 봉헌과 순명 그리고 믿음만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우린 그분의 자녀이며 서로 사랑할 계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기대감과는 다르다. 역사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제사에서 태어난 믿음이다.

 

믿음은 사랑의 눈이라 생각한다. 눈을 뜨자!

 

우리가 사랑할 때 믿을 수 있다. 즉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떤 믿음도 가질 수 없다.

 

“내가 당신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으로 시작하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소유이며 동시에 하느님을 소유한 위대한 자아라는 주체의식을 가져야 한다. 믿음으로 시작한 묵주기도는 어느새 우리를 사랑의 실천가로 만들고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2월호, 허윤석 세례자 요한 신부(의정부교구 광릉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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