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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에 대한 단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17 조회수1,435 추천수1 반대(0) 신고

 

(지극히 저의 개인적인 생각임을 감안하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여러 제자들 중에서 가장 반석 같은 사도로 생각하고 천국의 수위권을 맡기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사실 이 묵상 글을 올리면서 글 제목을 어떻게 정할지 고민했지만 그냥 이렇게 정했습니다.

 

제목이라는 건 별 중요하지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글을 쓰는 사람이 글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요점이 그 제목 하나가 대변해준다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의미를 더 잘 전달해 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또다른 제목을 부제로 정한다면 베드로 사도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건 바로 하느님의 의도였다 라고 다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건 저명한 신학자의 생각도 아니고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먼저 저는 만약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자신이 복음에 나오는 대로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실제로 한 번만 예수님을 부인했더라면 예수님에 대해 한때 스승이었고 인생의 좋은 교훈을 가르쳐주신 랍비 정도로만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신다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냥 성경 속에 나오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일반적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한번 생각해본다면 사람이 살다 보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신의를 저버리는 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비난의 대상은 될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한 당사자 입장에서는 뭐 그럴 수 있지 하고 자신을 합리화 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타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토록 스승을 아주 잘 따르는 제자처럼 행동하면서 스승의 입장이 곤경해졌을 때 스승을 부인한다는 건 도덕적인 비난을 살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 스스로나 또 타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합리화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스승에 대해 배신한 거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당연히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과 회개할 명분이 없었을 겁니다. 그럼 이번에는 세 번이나 부인한 사도의 입장에서 사도의 그때 심리 상황은 어떠했을까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물론 전자처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연약하기에 한 번 부인했는데 그까짓 것 세 번 부인하는 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이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사실을 성경으로 기록한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겁니다.

 

단순히 성경을 기록한 의미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근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건 즉 하느님께서 전달하시려는 의도가 다른 데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결국은 세 번 부인한 건 그냥 한 번 부인한 것과 같은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놓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단순히 두 번 더 부인했다는 그 의미가 아니라는 거겠죠.

 

이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예수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하느님이라고 표현한 건 이런 이유입니다.

 

물론 예수님이나 하느님이나 근본은 같은 분이시기에 넓은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굳이 하느님이라고 표현한 건 이게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생각해본다면 그럼 세 번 부인한 거랑 한 번 부인한 거랑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 표현 중에 '일말의 양심'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표현처럼 베드로 사도에게는 한 번 부인했을 때는 인간 내부 속에 있는 양심이 조금 덜 무디어 있기에 양심에 가해지는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사람에게는 일말의 양심이라는 게 여기서 작용하는 거겠죠. 세 번 부인했기에 그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같아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그토록 예수님을 따르는 훌륭한 제자처럼 자신만만하게 행동했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에 일말의 부끄러운 양심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절실하게 알 수 있었고 그래서 그런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이 예수님께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이 되었기에 자신이 복음에 나오는 표현처럼 슬피 울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걸 저는 하느님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하느냐면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성경을 봤어도요. 개종 후에 우연히 베드로 사도가 이미 성경에 어떻게 순교할지를 알려주는 예표가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알고 나니 예전에는 그게 그런 내용이었는지 몰랐지만 알고 난 후에는 최종적으로 나름 이런 결론을 내렸던 겁니다.

 

결국 하느님은 원래 나약한 사람을 하느님 일에 도구로 쓰신 게 그런 나약함이 오히려 지나고 보면 하느님 역사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사건이 하느님의 큰 계획 속에서  비록 나약하고 충동적이고 세상에서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점이 많은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그런 나약함에도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다시 하느님의 위대한 사도로 불림을 받았다는 걸 알려준다면 이런 사실이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되는 교훈이 됨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베드로 사도를 보면서 희망을 품을 수도 있을 거라고 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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