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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 옷, 새 부대 그리고 찢어짐 (루가 5:25~3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06 조회수1,444 추천수1 반대(0) 신고

새 옷, 새 부대 그리고 찢어짐 (루가 5:25~39)

(루가 5:24~39)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33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오늘 본문은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자주 인용을 해다가 쓰는 아주 유명한 비유예요. 사람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때나 구 정권이 물러가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을 때 혹은 신출래기의 선거 유세 등에 새 술은 새부대에 라는 구호를 자주 인용해다가 쓰곤 합니다. 전혀 잘못된 인용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술과 새 부대 ,새 옷 조각과 헌 옷의 비유는 그보다 훨씬 웅숭깊은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비유예요.

먼저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 누구인가부터 살펴봐야 되겠죠.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인 세리 레위가 등장해요. 레위는 누구죠? 마태오예요. 마태복음을 쓴 마태오 레위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와요.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나오죠. 그런데 같은 비유가 적혀 있는 마태복음으로 가면 비방하는 무리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라고 나와요. 자 볼까요.

마태복음 914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하고 있는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하여 세례요한의 제자들까지 다 포함된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그렇다치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 편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렇게 공개석상에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나섰을까요?. 하느님은 지금 묵은 것을 좋아하는 죄인들의 속성을 폭로하고 계신 거예요. 거기에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일지라도 자유로울 수가 없더라라는 걸 보여주시는 거예요.

심지어 세례자요한까지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면서 '오실 그이가 정말 당신입니까?'라고 물어봤을 정도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구약적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게 뭐예요? 단식이잖아요 왜 우리는 단식하는데 너희는 먹고 마시냐 그것도 세리의 집에서 이게 문제에요.

우리가 알다시피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일 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에 단식을 하라라는 규례가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율법에서 또 다른 날 단식하라라는 말이 없어요. 율법에 기록된 단식은 딱 하루에요. 일 년에 한번 대 속죄일 레위기 23장에 나오죠.

단식이라는 것은요. 인간의 육신에 에너지 공급을 중단을 하는 거죠. 그건 곧 육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에너지, 곡기를 끊으면 인간은 죽어요. 그런데 그걸 끊어라라는 건 육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거예요. 육의 죽음. 따라서 단식이라는 건 인간이 자신들의 처음자리  죽은 흙의 자리. 그걸 또 다른 말로 어머니 자궁안에서의 자리라 그래요. 왜냐면 어머니 자궁안에 있는 존재는요 태아는 어머니로부터 그 생명선이 끊어지면 죽잖아요. 죽은 흙도 마찬가지예요. 하느님으로부터 생기가 불어넣어지지 않으면 생령이 될 수 없어요. 그게 자체가 죽은 거예요. 움직인다 할지라도 그래서 짐승은 죽은 거예요. 죽은 흙이에요. 그냥 네페시에요.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인간은 하이 네페시 하야 살아있는 영, 생령인 거예요. 그 이외에는 다 죽은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식이라는 건 인간이 자신들의 처음자리, 즉 죽은 흙의 자리를 직시하고 수긍하는 거예요. 쉬운 말로 인간 존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스스로 인정을 하고 나는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행위가 단식이었어요.

대속죄일의 단식은 그렇게 하느님의 죄 사함의 은혜 앞에서 인간은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고 그 죄 사함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그 어떤 것도 기여할 수 없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 그게 자기부인이잖아요. 그게 죽은 흙임을 인정하는 거예요.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거 ...그걸 인정하고 하느님의 대속의 은혜를 그냥 꼭 붙드는, 은혜를 붙드는 수밖에 없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내기 위해 밥을 굶어 버리는 거, 하느님 협박하는 거, 굶어서 땡깡 부리는 거, 이게 단식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 단식은 성경에 없어요. 그러니까 함부로 밥 굶고 그러지 말아요. 헛것 봐요. 자 단식이 그러한 것인데 인간들이 기특하게도 일 년에 한 번만 하면 되는 단식을 자기들 마음대로 계속 늘려갔어요.

 

즈가랴서에 보면은 유대인들이 45710월에 어떤 특별한 날을 정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단식을 하고 있었던 기록이 나와 있어요. 그건 하느님이 시킨게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늘려간 거였어요. 그게 계속 늘어나다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 심지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이틀 일주일에 두 번 단식을 했어요. 그건 율법도 아니었어요. 그냥 원로들의 전통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일 년에 한 번만 하라고 요구하신 단식을 그들 스스로 매주 두 번으로 늘려서 하느님을 감동시키려고 한 거예요. 기특한 일입니까? 성경은 그걸 죄라 그래요. 문제는 그들이 단식을 통해서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깨달은 게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들의 경건함을 자랑했고 오히려 자기들의 가능성을 보인 거란 말입니다.

경건함을 자랑했고 이방인들과의 구별됨과 차이성을 드러냈어요. 쟤네는 안 하는데 우리는 합니다라는 이런 구별됨과 차이성을 드러내는데 썼단 말이에요. 단식을. 그건 밥은 굶기는 굶는데 하느님이 의도하신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양으로, 대척점에서 밥을 굶은 거예요. 그런 단식은 하느님이 카운트도 안 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게 혼난다 말입니다. 그런 단식은 나를 드러내고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하는 그런 단식은 이방 예언자들이 하는 단식이었어요. 갈멜산 위에서 이방 예언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신을 협박합니까? 자해를 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려고 하잖아요. 단식이 내가 밥을 굶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려고 하는 그런 용도로 쓰인다면 그게 이방인들이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죄에요

그렇게 우리가 밥을 굶는다고 하느님이 어이구 내 새끼 그래 밥 먹어 너 밥 굶으면 내 가슴이 아프다 뭘 원해 이렇게 들어준다면 그렇게 수시로 하느님의 보좌가 우리가 밥을 굶는 것으로 흔들린다면 그게 무슨 하느님입니까? 아무 계획도 없이 우리의 땡깡에 의해서 자기의 계획을 수시로 바꾸는 그러한 하느님 그러한 하느님을 믿으시겠어요? 그런 단식은 없어요.

하느님은 나의 속죄, 은혜 앞에서 너희들의 처음자리를 확인하고 너희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여 자기를 부인하라 내가 너희들을 지금 대 속죄일에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은 죄가 속해지는 날이었잖아요. 대 속죄일에 속죄를 해주는데 그건 너희들이 밥을 굶어서 속죄가 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은 이 속죄에 그 어떤 것도 기여할 수 없는 시체라는 것을 알아먹어라라는 의미에서 명령한 게 밥을 굶고 시체화되는 거예요. 그게 단식이란 말입니다. 하느님이 명령한 단식은 그거 하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밥 굶고 땡깡 부리면서 하느님 내 소원 안 들어주면 나 계속 굶어서 나 죽어버릴 거예요. 일주일 굶었는데 안 들어주면 나 40일 굶어버릴 거야! 이런 식으로 단식을 오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마귀의 사고에요. 밥 굶고 마귀편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짓 하지 말란 말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단식하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신약 시대에 오면 그럼 단식을 안 해야 되는가? 아니에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파송할 때 안티오키아 교회가 단식했어요. 하느님이 하실 거니까 우리는 완전히 무력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으로 하느님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고백으로 단식한 거지 우리가 이렇게 단식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니까 이들을 지켜주세요.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하느님이 바오로를 그렇게 죽이면 안 되는 거예요. 단식하며 기도했는데. 우리들의 소원을 이루는게 단식이 아니라 하느님 오히려 하느님 뜻대로 하세요가 단식이에요 나는 죽은 자입니다. 고백하는게 단식이란 말이에요.

그런 의미로 하느님이 단식을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우린 이렇게 도에 지나는 단식까지 함으로 해서 하느님은 일 년에 한번 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을 함으로 해서 하느님도 감동하시는 기특한 일을 할 수 있는 자다라는 걸 그들이 보이고자 한 거예요. 자기 영광 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단식을 한 거예요.

'나는 단식한다 어휴 3일째가 제일 힘들어' 이거 물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과는 좀 다른 의미로 단식을 했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오실 메시아에 관해 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에도 그들은 메시아를 맞기 위해서는 단식이라는 자신들의 기특하고 경건한 행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중에도 '야 예수님 다시 오실 때 내가 기도하고 있어야 될 텐데 예수님 다시 오실 때 내가 교회에 있어야 될 텐데 내가 혹시 부부싸움할 때 오시면 어떡하지? 내가 혹시 놀음할 때 오시면 어떡하지?' 요런 걱정하는 사람들 있죠? 요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인 거예요. 구원에 있어서 재림하는 예수를 내가 맞이하는데 있어서 내가 뭘 할 거는 없어요. 하느님이 은혜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뿐이란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단식을 한건 바리새인들처럼 단식이라는 행위를 자랑으로 여긴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율법에 행위가 메시아를 맞이하는 자들의 최소한의 예의이며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믿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게 율법주의에요. 기특한 일인 거 같지만 그게 율법주의입니다. 그런거 조차도 필요 없어요.

 

아무튼 그렇게 자신들이 힘들게 단식을 하고 있는 바로 그날 예수라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세리 마태오의 집에 들어가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거예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한 일이 옳은 일이었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비방을 해서는 안되죠.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은 굶고 있는데 포도주를 마시고 식사를 하시자 비방을 하고 나선 거예요. 그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들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이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새 옷과 헌 옷의 비유인 거예요 

본문 말씀을 잘 보시면 예수님은 당신을 혼인잔치의 신랑으로 표현을 하세요. 혼인잔치에 신랑과 함께 있는 이들이 어떻게 단식을 하겠느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의 단식이라는 건 혼인잔치에서의 신랑과의 그 잔치 누림, 혼인잔치에서의 신랑과의 잔치 누림까지로 가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었지, 신랑이 함께 있을 때에는 전혀 무용한 것이다라는 그런 말씀이에요.

좀 더 쉽게 말하면 단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는데 필요한 몽학 선생이었던 것이지 그것 자체에 어떤 효능이나 효과가 있었던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단식을 해서 그들의 죄가 대속된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들에게 뭔가 가르쳐 주기 위해 단식을 하라는 거지, 그걸 근거로 죄를 대속해 준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오히려 단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우리가 단식을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 우리는 오직 신랑이신 예수가 율법을 다 지킴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가 다 해결이 됐다라는 은혜의 복음으로 가라고 율법을 준거에요.

너희들은 이것을 못 지키니까 예수의 은혜를 꼭 붙들어야 돼... 그런 의미에서 너희들은 죽은 흙이야 밥 굶어봐 어떠니 배고프지 그렇게 계속 굶으면 죽는 거예요. 너희들은 원래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면 그렇게 죽은 거야! 죽은 흙이야! 그런데 내가 너를 은혜로 덮어 거저 공짜로 너를 구원해 주는 거야!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 단식 혹은 율법들을 허락해 주신 거예요.

로마서 320절 보세요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노바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거예요  골로새서 2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신약시대에 지금 주어지는 규례에요 명령이에요 그런거 인제 없다라는 거예요. 너희들 단식 안 한다고 누가 뭐라고 그래도 너희들 신경 쓰지마 이런 뜻이에요. 이것들은 장례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런 건 그림자였다라는 거예요. 실체는 누구?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와서 다 성취하실 것이었어요. 율법은 전부다 안식일, 십일조 다 마찬가지예요. 예수가 와서 다 성취하신 거예요.

 히브리서 910절 보세요 10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몸을 씻는 여러 가지 예식과 관련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새 질서의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만 부과된 외적인 법규일 따름입니다.

먹고 마시는 거 단식 정결한 음식 부정한 음식 이딴 거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신약시대가 확 열릴 때까지만 필요했던 거예요. 그림자로 모형으로! 그러니까 신약에 와서는 먹고 마시는 거 단식이나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그건 단지 예수가 오실 때까지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해 주어졌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성경이 우리 성도의 인생 전체를 단식의 삶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단식의 삶! 우리는 단식을 안 해도 되는데 예수님이 단식을 하셔서 우리에게 단식한 자로 당신의 단식을 전가시켜주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금식 같은 거 안 해도 돼요. 그런데 성경은 너희의 삶 자체가 단식이래요.

 

신명기 81-3절 보세요 1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살 수 있고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며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어떻게 됐어요? 못 지킨다로 결정 났죠. 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구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의 이유와 목적이 적혀 있는 구절이에요. 광야 여정.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라는 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의 과정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을 총칭하는 거예요. 애굽에서 세상에서 나와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는 거 이거 전체가 성도의 인생이에요. 가나안은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가시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의 모든 인생 역사를 광야라고 그래요. 성경이. 그래서 그걸 그 광야를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명명을 해도 무방하죠. 그래서 스테파노는 그의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광야교회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이게 바로 교회가 겪는 신앙생활의 모습이다. 그것의 모형이다를 설명해 주기 위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광야 교회라고 이야기한 거죠. 그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인생 전체가 바로 광야에요.

그런데 이 구절 속에 이스라엘의 그 광야 인생의 이유와 목적이 함축되어 한마디로 요약이 되어 있는데 그게 뭡니까? 낮추시고 시험하고 주리게 하심이죠. 그러니까 성도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낮추어지고 시험당하고 주려 죽는 삶이어야 맞아요. 주려 죽는다는 건 옛사람의 아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난하게 굶어 죽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이 옛사람을 살찌우기 위해 세상 힘들을 마구 모으고 얻어내어서 옛 사람을 어떻게 하면 높은 자리로 올려놓을까? 이걸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게 할까? 더 살찌울까? 이것만 걱정하고 있는데 성도는 그 옛사람을 하느님의 말씀을 근거하여 굶겨 죽이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서 낮추고 주리게 하신다라는 히브리 단어가 라이브 아나라는 단어에요. 그런데 이 단어가 레위기의 속죄일 규례 속죄일에는 뭐 해야 된다  대속죄일에는 뭐 해야 된다? 단. 그 속죄일의 규례에 그 단어가 그대로 나온다 말입니다. 한번 볼까요. 레위기 1629-3129 이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규칙이 되어야 한다. 일곱째 달 초열흘날에 너희는 고행을 하고,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이게 아나에요 스스로 괴롭게 하다 이게 아나 단식하라라는 뜻이거든요. 본토인이든 너희 가운데에 머무르는 이방인이든 마찬가지다. 30 바로 이날이 너희를 위한 속죄 예식을 거행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너희는 주님 앞에서 너희의 모든 잘못을 벗고 정결하게 된다. 31 이날은 너희에게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다. 너희는 고행을 해야 한다. 이는 영원한 규칙이다.

그들에게 계속해서 스스로 괴롭게 하라 스스로 괴롭게 하라 주려라 단식하라라고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 일을 겪은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일은 단식하는 일을 말해요. 그리고 그 단어는 그대로 신명기 813절에서 그대로 쓰였어요. 낮추고 시험하고 주리게 하시는 걸로 그런데 신명기 8절의 그 이야기는 성도의 광야 인생을 요약하여 설명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성도의 광야 인생은 낮추어지고 시험당하고 주려 죽는 삶인데 그 전체가 단식의 삶이다란 뜻이죠. ? 성도의 삶 전체가 단식에 삶이에요.

하느님 앞에 나는 죽은 자에 불과하니까 하느님의 은혜로 나를 덮어 주세요. 그 길 밖에 살길이 없네요. 은혜로 나를 덮여 주세요라는 그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 단식이라는 종교행위여야 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밥을 굶는다면 언제든지 오케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땡깡을 부리는 목적으로 단식을 한다면 억지로라도 퍼 먹일 거예요. 그런 단식은 죄에요.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다이어트 하려 그런다고 그럼 용서해 드릴게요. 그러면서 무슨 뭐 나는 저녁 단식한다고 그거 다이어트지 뭐예요.

 

우리 성도의 전 인생이 요약이 되어서 하느님 앞에 바쳐지는 행위 그게 단식이에요.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이 세상의 왕으로 살고 싶어 했던 옛사람이 단식의 삶. 성도의 그 단식의 삶. 주려 죽는 삶. 하느님이 주리게 하시죠. 세상의 힘을 자꾸 끊어 내신다 말이에요. 마음을 자꾸 끊어 내세요. 주려 죽는 삶에 의해 단식의 삶에 의해 굶어 죽어가게 되고 마지막 죽는 그 그때가 부활하는 때예요. 옛사람이 다 죽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옛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죠? 자기에게만 부어졌던 자기 사랑이 비로소 하느님과 이웃에게 나누어지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삶이에요.

근데 조금 한번 솔직해져보자고요. 리들은 지금 구원을 받으셨죠. 따라서 우린 지금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낮추고 주리게 하고 시험을 하시는 광야에 삶을 살고 있어요. 단식의 삶을 살고 있어요 맞아요?. 그러면 우리의 옛사람이 지금 자꾸 굶어 죽어가고 있어야 돼요. 아사되어져 가고 있어야 하는데 진짜 그렇습니까? 진짜 아니면 주려 죽기는커녕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세상의 떡을 향한 정욕과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어요? 후자죠.

오늘날 교회가 하느님 앞에 구하는게 전부 뭡니까? 떡 주세요! 떡 주세요죠! 하느님은 단식의 삶을 통하여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야,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을 목적으로 하여 사는 거란다 라를 가르쳐 주려고 단식의 삶을 우리에게 허락했대는데, 광야 인생 신앙생활을 우리에게 허락했대는데, 오늘날 교회가 하느님께 구하는게 뭡니까? 떡 주세요. 건강 주세요. 명예 주세요. 인기주세요. 이거 아닙니까? 그들을 신자라고 이야기하는 게 맞아요? 그들이 불신자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기가 부인당하는 그 삶을 내어놓지 못하고,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내 목적은 이거고 내 계획은 이건데 당신은 그냥 군소리하지 말고 나 가르칠 생각하지 말고 내 뜻을 좇아 힘만 빌려줘 이들을 불신자라고 하는 거예요. 불신자들이 온통 성당에 앉아서 자기의 욕심, 자기 영광 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로 가보면 하느님께서 진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단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적어 놨어요. 이사야서 584~7절을 보세요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나만을 위해서 산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툼이 나오는 거거든요식은 내가 너희들에게 너희는 죽은 흙이며 너희들이 가장 낮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너희들은 무력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준 건데 어떻게 그런 단식이라는 걸 하면서 '네가 더 잘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남과 다투니?'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그게 어떻게 너희들을 괴롭게 하는 너희들을 부인하는 일이 되겠느냐? 너희들을 자랑하는 거지. 이런 뜻이에요.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밥을 굶으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밥을 굶으면 압제당하는 자가 그 압제에서 풀려나요? 묶여 있는 자가 풀려납니까? 이건 누가 하신 일이에요?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신 일 아닙니까! 단식은 예수가 완성하시는 거예요.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부요하신 예수가 가난한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해진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골로새서에서 당신을 비워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살려내신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일을 누가 하셨냐고요? 예수가 하신 거예요. 8절 보세요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런 일을 하면 하느님이 능력과 복을 더 붓고 하느님이 지키신대요. 이게 복음이에요? 거기서 아멘하면 안 되죠.

우리들이 그런 능력이 있냐고요? 그걸 행하면 하느님이 복 주고 하느님이 능력 주고 지킨다고 하는데 그걸 행할 능력이 있어야 복을 받을 거 아닙니까! 성경은 분명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랬어요. 그런데 누가 어떤 능력을 갖고 이 일을 하냐고요. 이 단식을 할 수 있는 이는 예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가 그 인생 동안에 단식을 하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아사하여 죽는 거예요. 내가 목마르다 단식의 완성자로 예수가 오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우리에게 허락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뭘로 시작하세요? 40일 단식. 40일이라는 건 40년 광야 인생의 상징입니다. 내 인생이 바로 이 40일 단식 주려 죽는 인생이 되는 거야 그리고 거기서 낮아지시고 시험을 받으시잖아요. 그런데 그 시험에 예수님이 그렇게 낮아지고 주려죽는 그 자리에서 그 시험의 어떤 답을 내놓으세요. 하느님이 주신 답안지에다가 무슨 답을 쓰십니까? 사람이 빵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거야라고 정답을 쓰시잖아요. 신명기의 그 답을 예수가 마태복음에서 쓰신다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단식을 우리에게 거저 전가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단식한 자가 되었어요. 그리고는 그 단식이 어떻게 너의 삶에서 이루어졌는지를 가르쳐 주심으로 말미암아 '어 내가 한 게 하나도 없구나 하느님이 다 해주셨구나'라고 내가 낮아지면서 내가 하느님의 지혜에 의해 점점 부인이 되고 그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내가 굶어 죽는 거예요. 그게 자기부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단식의 삶을 살아요. 그런데 어떤 식으로 단식의 삶을 사냐면 내가 열심히 단식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나를 아사시켜 가는 나의 옛사람을 아사시켜 가는 그런 단식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단식이 내 안에 뚫고 들어와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나를 점점 밟아 그 은혜가 나를 죽여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은혜를 아는 만큼 죽어가는 거예요. 은혜를 아는 만큼 내가 아사되어져 가는 거예요. 내 옛사람이... 그게 하느님의 지혜에요. 그게 복음이에요 이사야서의 그 이야기를 예수가 행하시는 거예요. 그런 능력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없어요. 하느님이신 예수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는 우리에게 이제 단식이 필요 없어진 거죠. 왜냐면 예수님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온전한 단식을 갖고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단식을 시켜주세요. 우리의 삶 속에서 나를 아사시켜 가니까...

그러면 그 신랑단신 예수와 관계있는 자들은 구약의 그 밥을 굶는 단식을 할 필요가 있어요? 없는데 그들이 단식 일을 정해서 단식을 하고 있고 예수님은 그날 일부러 밥을 드시고 계세요. 그것도 세리의 집에서 창녀들과 예수님이 뭘 이야기하려고 하시는지 아시겠죠? 구약 전체를 부정하는 거예요. 기각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고 하느님의 은혜로만 존재할 수 있어요. 그러한 복음의 현실 속에 들어있는 자들 그리고 그 전체 복음을 새 옷 새 포도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새 옷 새 포도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와 있는데 헌 옷, 헌 부대가 묵은 것들이 와갖고 '너네는 왜 밥 안 굶어?' 이렇게 비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빗대어 지금 비유로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자 그 새 술과 새 옷의 주인공들이 이 세상에서 그 복음에 현실 안에서 새 부대 안에서 일차적으로 누려야 하는 게 뭡니까? "아 나는 이제 단식을 안 해도 되는 자구나 내가 단식해서 구원받고 내가 단식해서 죄 사함을 받는 게 아니라 내가 단식해서 하느님에게 이쁨 받고, 하느님에게 기특한 자라는 칭찬받는 게 아니라 예수의 단식으로 나는 살아나는 자구나 예수의 단식 때문에 나는 기특한 자라는 칭찬을 받는 거구나" 하며 그 혼인잔치를 예수와 함께 즐기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신랑이 같이 있는데 왜 굶고 있니? 그건 신랑이 오기 전에 너희들에게 뭔가를 교훈하기 위해 하느님이 내 아버지가 명령하신 건데 너희들 왜 지금까지 밥을 굶고 있어 신랑이 왔잖아! 왜 나를 못 알아봐! 아하 너희들은 묵은 것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새것인 나를 못 알아보는 거야!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신을 비방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묵은 걸 좋아하는 헌것들이라 구약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나를 못 알아보는구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처음 자리가 자기들의 처음 자리가 뭔지도 모른 체 스스로 경건한 행위와 종교행위를 함으로써 하느님을 지금 감동시키고 있는 거예요. 마구마구 굶으면서...예수님이 그걸 보면서 왜 굶고 그래 신랑이 왔는데 왜 굶고 그래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 새 옷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은혜의 복음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해요. 신약시대는 예수님의 은혜로 창조가 되고 은혜에 의해 경륜이 되어야 됩니다. 그 새 포도주와 새 옷은 절대 헌 옷과 헌 부대 구약과 조화가 될 수가 없어요. 절대 안 돼요. 왜냐면 새것은 헌것을 파괴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새 옷을 헌 옷에다 붙이면 새 옷이 헌 옷을 찢어발깁니다. 당겨서...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발효가 되면서 헌 부대를 찢어발겨요. 새 포도주인 새 언약의 주인이신 예수가 왔어요. 참 성전인 새 성전 예수가 왔더니 돌로 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구약의 그 율법의 성전이 부서져 버리는 거예요. 같이 공존하면 안 돼요. 그래서 이 시대에 지금 이스라엘에 무슬림 사원이 서있는 그 자리에 새 성전이 서면 안돼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 자리 못 뺏고 있는 거예요. 아직까지... 그것만 하더라도 하느님이 살아계시다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까짓거 왜 못 뺏겠어요. 하느님이 못 뺏게 하는 거예요.

새것과 헌것은 함께 갈 수 없어요. 그 자리 뺏어서 이스라엘이 성전 지으면 제사가 다시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은 거기서 제사 지내기 위해 시오니즘을 주창한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성전 지을라고 그런데 세계 대전 때문에 그걸 못 뺏고 있는 거예요하느님이 둘을 절대 공존시키지 않아요. 그런데 그 새 언약의 새 부대의 주인이신 예수 앞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구약의 율법, 묵은 것들이 와서 너희들 왜 단식안해? 하고 엉겨 붙는 거예요. 어떻게 될까요? 새 옷에 의해 찢어지는 것입니다.

새것은 그렇게 헌것을 찢어요. 그런데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교회가 하느님의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자꾸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자기의 공로를 앞세워서 잘난 척을 하고 있어요. 선한 행실과 도에 지나는 헌신으로 개인과 교회의 명성을 높이고자 해요. 자기들의 힘으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오게 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요. 작은 천국을 자기들이 구현할 수 있대요그래서 데모도 하고 촛불 들고 나가기도 하고 사회정화, 사회개혁도 하기도 해요. 그런 사람들의 설교에서 예수에 대한 설명을 몇 번이나 들어보셨습니까? 그건 인간들이 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서 여기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행복 추구하며 사는 거 아니에요. 그건 죽은 흙들이 그렇게 사는 거고...

하느님의 백성은 여기가 아닌 하느님의 은혜로 완성이 된 하느님 나라! 거기 희망하며 이 세상에서 아사되어져 가는 거라니깐요. 굶어 죽어가는 거예요. 단식의 삶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너무 잘나서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그 분이 우리에게 선물하시는 그 나라를 구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뭐를 해서 이 땅을 살기 좋게 만들어 주겠다는 거예요.

가난한 자들을 평등한 대우를 받게 해주겠다는 것이죠. 교회가 교회는 그런 일을 하는 걸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아서 살면 안돼요. 멀리갈 필요도 없어요.

우리가 왜 신앙생활하세요? 왜 성당에 오셨습니까? 오기 싫은거 죽겠는데 억지로 온 분들 분명히 계실 거예요. 왜 오셨어요? 천국가기 위해 오셨죠? 그리고 좀 더 저급한 분들은 소원 성취하러 오신 거예요. 보험료 납입하러 온거죠. 한주 미납입하면은 혹시 서스펜드 될까봐... 아이 빠지면 재수없을까봐...

그냥 매주 가주기는 한다. 그러고 오신 분들도 계세요. 좋아요. 조금 고급한 분들 나는 천국가기 위해서 여기 왔어요! 라는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기 성당에 안오면 천국 못가나요? 그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에요. 그게 바리새인들입니다. 우리는 여기 안와도 천국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오냐면 그러한 죽은 흙에 불과한 나를 하느님이 도대체 내가 뭐라고 그렇게 큰 은혜를 부으셔서 이렇게 살려 내셨는지 그 비밀을 조금더 알고 싶어서 더 알고 싶어서 그 하느님이 너무 감사해서 그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싶어서 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나는 천국가기 위해서 왔는데요. 이 사람들이 묵은 것이에요. 그게 옛 부대입니다.

  

우리들의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돼요. 그게 아직까지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거예요. 나의 구원 나의 천국을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라 죽은 흙에 불과한 나를 그 하느님이 도대체 왜 사랑하셨는가를 궁금해하고 그것을 안 자로서 그냥 이렇게 허투로 막 살 수 없으니까 교회의 삶을 살고 싶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시간이나 되는 미사 지루해 죽겠는데~~~~

천국은 예수의 공로로 완성됐어요. 그리고 우리는 예수의 공로로 거기에 이미 들어가 있는 분들이에요.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가 거길 들어갈려고 뭘 한다라고 한다면 스탑하세요. 그런 마음으로 착한일도 하고 그런 마음으로 종교행위도 하고 뭐 이러니까 요즘 제가 은혜에 대해서 말하니까 자꾸 공격해 들어오는 거예요. 보세요.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냐라는 말이 나온다는 건 자기가 하기 싫은걸 지금 억지로 하고 있었다라는 얘기거든요.

내 안에서 내가 부인된 상태에서 예수가 사는 삶 갈라디아서 이야기처럼 내가 죽고 예수가 성령이 내 안에서 사는 삶이 나와 종교행위가 나오고 선한 삶이 나오고 헌금이 나오고 섬김이 나왔다면 제가 그 어떤 걸림돌을 던진다 할지라도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이런말 할수가 없어요. 그건 지금 지가 하고 있었단 얘기거든요. 그러면 스탑하라는 거예요. 그런 질문이 나올 정도면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군요 죽은 흙이군요라고 내려가고 있었는데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성령의 열심이 나의 열심으로 화하여 내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그 하느님을 어떻게 하면 내가 섬길 수 있을까라는 마음에서 나온 거라면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이런 말이 안나온다 말입니다.

그걸 지금 자기가 천국가는데에 필요한 어떤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게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말이에요. 그래 그럼 하면은 어떻게 되는가요. 하면 그걸 근거로 천국 보내주냐 말이에요. 이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라니깐요. 이게 바리새인들인 거예요. 그거 아니에요.

우리들이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런데 내 안에 성령이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그 열심이 나를 열심있는 자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 이 복음, 은혜의 복음을 더 많이 배우셔야 돼요. 하느님과 친해지셔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행하는 모든 선한 일 종교행위는 다 자기 의에요. 목숨걸고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이들이 하느님을 향해 비방을 하잖아요. 너 왜 율법 안지키냐구.

  

예수님이 이 시대에 와서 우리 주일날 다 미사드리고 있는데, 요 앞에 술집에 가서 창녀들하고 소주를 한잔 하고 계세요. 그 그림이잖아요. 그때에 우리들은 뭐라고 그러시겠냐구요? 저 인간은 도대체 누군데 우리는 이렇게 경건하고 깨끗하게 미사드리는데 이경건한 주일날 그것도 창녀들하고 술을 마시고 있냐? 아니 예수님 말고 제가, 여러분은 여기서 열심히 예배 드리고 있는데 딴 사람도 아니에요 창녀들 몇명을 어디서 불러왔는지 불러다가 요 앞에서 소주를 한잔 마시고 있어 세리들하고 죄인들하고 막 강도들 모아놓고 그러면은 여러분은 저를 어떻게 평가하시겠냐구요? 비방할거 아닙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비방한게 잘못된 거예요? 아니잖아요. 율법주의의 세계관으로는 당연한거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왜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세요.

신약의 시대 은혜의 시대에는요 인간들의 육적인 눈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시대가 아니란 뜻입니다. 구약시대는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들이 하느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그것으로 선악의 판단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자기들이 악하다 생각하는건 그냥 악한 거예요. 왜 단식일날 창녀들하고 왜 술먹어? 예수님을 욕했단 말입니다. 그게 이 세상 도덕과 윤리의 기준으로 봤을때 이 세상 선악구조의 세계관으로 봤을때는 나쁜 일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일을 행하셨다는건 은혜의 시대에는 인간의 선악구조로 뭐가 판단되어지는 시대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거는 구약시대의 세계관이에요. 구약시대에는 인간이 율법도 잘 지키고 선한일도 해서 가치있는 존재가 됐어요. 그리고 가시적인 세상 복을 받았단 말입니다. 그게 구약시대에요. 인간이 한 만큼 받는거...

그러나 신약은 인간은 단식하는 자에요. 예수가 은혜로 부어져서 거저 건져 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오로가 나는 이제 육체대로 모든 사람을 알지 않기로 했다라는 거예요. 그가 육체대로 모든 사람을 봤을때는 율법의 수호자로 그가 서 있었을 때에는 스테파노가 죽을때 그가 당연히 죽어야 할 자로 여겼다 그래요. 사도행전 8장에 그죠.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은혜를 알게 되니까 정작 죽어야 할 자는 나였는데 내가 살았단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죽을 자냐는 거예요. 내가 그 스테파노를 죽였는데 내가 은혜에 의해 살아났다면 이 세상 그 누가 죽을 죄를 진 자냐 말이에요. 그게 구약이란 말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만 죽어요. 그 위에 모든 성도는 그가 한 행위에 의해서 상을 받고 벌을 받는 게 아니에요. 하느님의 은혜로 영생이라는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일부러 단식하는 사람 앞에서 소주 한잔 하시는 거예요. 일부러 안식일 지키는 자들 앞에서 제자들아 먹어, 밀 비벼 먹어! 일부러 안식을 지키고 있는 그자들 앞에서 병자 일으켜 세워 버리는 것입니다. 일부러 구약을 부셔 버리는 거예요. 계속해서 율법을 부수고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런 행위와 노력과 열심으로 구원에 이르는거 아니라 너희들은 죽은 흙이라니까 선악과 먹지말어 그러면 안먹어야 되는 그런 존재인데 왜 따먹고 왜 그건 쳐먹고 지금 너희들이 하느님 노릇하냐는 거예요.

 

요한복음에서 하느님이 하느님의 백성을 신이라 했다 그랬어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하느님 백성이 신입니까? 우리 종교인들은요 니들은 신이야 그러면 아니라 그래요. 무슨 신이야? 그런데 사는 삶은 전부 하느님처럼 살아요. 내가 우주의 중심이에요. 그거 예수님이 비꼬시는 말입니다. 니들 신이라매 아니 언제 신이라 그랬어 아니 하느님이 니들 신이라 그랬잖아 니들이 신이야...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신이야~ 아니에요. 우리는 하느님 섬긴다니깐요. 율법지켜요. 제사지내요. 무슨 신이에요?. 근데 니들이 신이야 너희들은 나를 도구요 방법으로밖에 안쓰잖아! 그럼 니들이 신이지 뭐냐! 그런데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 왔는데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왜 나보고 뭐라 그래 말씀하시는 거예요.

인간들은 전부 신처럼 살아요. 자기들이 하느님이에요. 다 그게 구약이라니깐요. 그걸 깨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신약의 예수가! 그런데 거기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 바리새인들 오늘날의 교회가 구약을 헌 옷을 갖고 그 새 부대에게 엉겨버리는 거예요. 한번 해볼래 나도 할 수 있다니까. 그리스도의 푸른계절 우리도 만들수 있어, 나도 칭찬받는 일할 수 있어 이러고 나서는 거예요. 자 그렇게 새것에 헌것이 와서 엉기면 어떻게 된다구요? 찢어진다 말입니다보세요 우리 인생이 성도에요. 우리가 주려 죽는 단식의 삶을 살아야 돼요. 신약의 삶을 살아야 된다 말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우리는 옛사람에게 먹이를 주고 있잖아요. 세상의 힘 뭐 여러 가지 선한 행위 이런거 얻어서 이런거 쌓아서 우리의 가치챙기기 하고 있잖아요. 그게 구약이란 말입니다. 그때 하느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찢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삶이 찢어짐의 삶으로 점철이 되는 거예요. 그게 찢어지지 않으면 그게 가짜인 거예요. 그걸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느님의 복음이 신약이 새 술이 뚫고 들어와 옛 푸대와 옛 옷을 찢어발기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는 헌 부대네. 우리는 묵은 술이네. 우리는 헌옷이네. 이걸 폭로당하면서 예수님에 의해 찢김을 당해요. 그렇게 찢김을 당하는데 그 예수의 은혜에 의해 내가 죽는 거예요. "난 아니구나"라고 죽는 거예요. 그때 내가 아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노력으로 내가 아사하는게 아니라 나는 계속 실패하는데 예수가 뚫고 들어와 나를 찢어 발김으로 말미암아 내가 죽어가는거야, 내 옛사람이 죽어가는 거예요. 그걸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수지 맞은 거예요. 그 은혜를 아는 이들이 어떻게 하느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타나는 현상이나 아니면 사람들의 됨됨이를 보고 선이다 악이다 우리들이 판단하면 안돼요. 이제는 우리는 구약시대의 그 판별법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되는 것입니다역사를 역사의 관점으로 해석하는게 아니라 역사를 창세전의 묵시에 관점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하느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이게 유용한 일이냐 아니냐로 판단을 하는 것이지, 묵시로 판단이 되는 거지 역사를 역사와 현실로 판단하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좀 잘난 사람들은 잘난척하면 안되는 거예요. 못났다고 하는 사람들은 내가 못났구나 자괴감 가지면 안돼요. 그게 구약이에요하느님의 말씀이 복음이 떨어지면 옛 푸대에 젖어 사는 우리는 계속 찢어 발김을 당해야 돼요. 그래서 아파야 돼요찢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잘가는 거예요. 찢어져야 돼요! 우리는 아직 부활의 몸을 못입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희가 단식을 해야 되는 날이 온다. 그러죠? 이거 아주 중요한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단식을 해야 하는 때는 신랑을 빼앗겼을때래요.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언제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는 날이에요. 그때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거든요. 그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빼앗기고 단식을 하면서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가 돌아가셨습니다 라는 그 가장 낮은 죽은 흙의 자리,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가 죽은 것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내 육의 죽음을 경험하는 그리고 그 육의 죽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그런 자가 되야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요.

하느님의 백성은 예수를 빼앗긴날 내가 예수 죽인 자입니다라는 그 단식의 자리로 내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식사를 하실 때 단식을 하던 그들이 예수님을 빼앗겼을때 어떻게 했어요? 그때 단식했어요? 그날이 무슨 날입니까? 유월절. 유월절은 무슨날 명절 뭐했겠어요? 잔치 벌렸습니다. 그게 죄인들의 세상이에요. 예수님을 빼앗긴 자들은 반드시 죽은 흙의 자리로 내려가서 내가 예수 죽였습니다. 저 자리가 내 자리입니다.라고 예수의 십자가에 나를 같이 못박아야 돼요. 그게 신랑을 빼앗긴 신부들의 단식이에요. 그게 육의 죽음!

그런데 온 세상은 자기들의 노력과 열심과 깨끗함을 종교행위를 부정해 버리는 예수가 죽자 잔치를 벌려요. 자기의 더러움을 폭로해 버리는 그러한 예수가 죽자 잔치를 벌리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가 온 겁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자들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도 끊임없이 그 예수의 십자가를 앞에 놓고 잔치를 벌리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 앞에서 내 유익만을 챙기고 있어요. 내 가치만을 챙기고 있어요.  내 가족 내 나라 다 내꺼 아닙니까? 그게 나에요. 나 민족주의 라는게 무슨 대단히 기특한 건줄 아세요? 가족사랑이라는게 뭐 대단히 기특한 것인줄 아십니까? 그게 나를 사랑하는 죄에요. 내꺼밖에 없어요.

기도의 내용 보세요. 전부 나, 내 가족, 내 자식, 내 부모, 내 교회 왜 그게 잘되면 내 위상이 올라가거든요! 그걸 죄라고 해요. 그걸 위해 사는걸 헌 부대라고 하는 거예요. 헌옷이에요. 그게 묵은 술입니다. 그게 구약이라니깐요.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축복을 받으면 부자가 돼요.

신약에서는 정 반대에요. 고난을 통과하는 자가 하느님의 백성이었어요. 그런데 신약이 와서 구약을 찢어 발겼다니깐요. 그런데 여전히 구약 안에 갇혀가지고... 이 시대에 교회에 예수가 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가 예수를 못박아 죽일 겁니다. 내가 원하는 걸 안주는 그런 예수 필요없는 거죠. 그래서 오늘 본문이 묵은걸 좋아한다, 사람들은 묵은 포도주 묵은 걸 좋아한다 그러는 거예요. 묵은게 좋은거에요? 진짜 저는 잘몰라요. 묵은 포도주에 맛을 들인 사람은 새 포도주 안먹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아신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은 포도주를 음료수 처럼 먹었기 때문에 포도주에 대한 견해가 뚜렸했어요. 너희들 묵은 것 맛들이고 새것 먹을 수 있겠니? 그만큼 세상에 대한 사랑 나라는 존재에 대한 사랑은 끊어내기가 그렇게 힘든 거예요. 그만큼 매력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끊어내요. 그래서 예수님이 단식의 삶을 살고 우리에게 거저 주신 거예요. 그리고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직접 들어오셔서 가르치고 계시는 거예요. 우리를 헤체 시키는 거예요. 찢으시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1034절 보세요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예수님이 뭘 갖고 오셨어요? 복음 갖고 오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칼이라고 표현하세요. 뭘 찢는 거예요. 구약의 사고를 찢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부자 되는게 축복인줄 알어? 건강한게 축복인줄 알어? 천만에 말씀. 영생을 이해하고 은혜를 이해하는게 축복이야! 찢어발기는 거예요.

히브리서 412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이런 일 당해보신적 있으세요 골수를 칼로 쪼개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아파본적 있으세요? 아파서 울음이 나와야 돼요. 내가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를 말씀 앞에서 폭로당하면서 우리 통곡을 해야 돼요. 골수를 칼로 찔러 쪼갤때 처럼 아픔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된다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들 잘나서서 쪼개지지가 않어, 들어가지가 않어,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듯 나는 잘났어 착하게 살고 있거든요. 아닙니다. 우리들은 말씀 앞에서 난도질 당해야 돼요. 포가 뜨이는 경험을 하셔야 돼요. 아프셔야 돼요그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찢어 가실 때에 말씀이 찢어 가실때 우리가 비로소 내 안에 있는 새 부대를 발견하는 거예요. 아 여기에 넣어야 되는 거구나! 그리고 우리가 입고 있는 헌옷 벗어버리고 예수님 주시는 새 옷으로 갈아 입는 거예요. 그게 부활의 옷입니다. 그 전까지는 계속 찢기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래서 금단을 선물받은 자가 주려 죽는 삶을 역사속에서 사는 거예요. 이해가 가시죠? 그래서 우리 삶이 그렇게 단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에요. 신랑이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면 신랑을 빼앗기면 같이 그 죽음에 동참해 버리는 신부 그 신랑에게 귀속되어져 있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게 바로 성도란 말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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