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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주님 만찬으로의 초대14: 십자 성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15 조회수6,264 추천수0

[주님 만찬으로의 초대] (14) 십자 성호


신앙 고백과 하느님 자녀임을 드러내는 몸짓

 

 

십자가, 구원의 상징

 

그리스도교를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십자가만큼 강렬하고 역설적인 것이 있을까? 사실 십자가는 역사적으로 죄수와 노예를 처단하는 가장 잔인한 사형도구였다.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로마 팔라티노 언덕에서 발견된 유적 가운데 3세기 초반에 한 이교인이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십자가 처형 그림이 있다. 본디 ‘페다고지움’(Pedagogium)이라 불린 황실 노예 학교의 벽에 낙서처럼 거칠게 새겨진 그림은 당나귀의 머리를 한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한 인간의 우스꽝스런 모습과 그 발치에서 경배하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 그리스 말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알렉사메노스가 그의 신을 경배한다.”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한낱 우스갯거리로 치부해버린다. 이처럼 십자가란 치욕스런 죽음의 표지였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1코린 1,23)이었을 뿐이었다. 

 

십자가 안에서 제자들이 하느님의 감추어진 구원 계획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뜨거운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처럼 그 만남은 제자들의 마음을 다시 타오르게 했고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깨닫도록 이끌었다. 이 놀라운 부활 체험이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였고 바오로 사도처럼 고백할 수 있는 빛을 던져 주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1코린 2,2)

 

 

십자 성호, 신앙의 표지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일찍이 십자 성호를 신앙을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표지로 사용함으로써 십자가를 자기 삶의 중심에 두었다. 

 

2~3세기의 라틴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는 당시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던 십자 성호를 긋는 관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길을 걸을 때, 방에 들어서거나 나갈 때, 옷을 입을 때, 씻을 때나 잠자리에서나 식사 때, 책상에 앉을 때, 우리의 모든 일에 있어서 이마에 십자가를 긋습니다.”(De corona, 3,4)

 

일상의 모든 행위에 앞서 이마에 작은 십자가를 긋는 관습은 점차 전례 안에도 도입되어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늘날 단계별 어른 입교 예식의 첫 단계인 ‘예비 신자로 받아들이는 예식’에서 후보자들의 이마와 감각 기관에 십자 표시를 해주는 것이라든지, 유아 세례 예식에서 아기의 이마에 십자표를 긋는 것은 교회의 오랜 관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미사에서 복음을 봉독하기 전에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작은 십자 표시를 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미사의 시작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말하며 십자 성호를 크게 긋는 동작은 14세기에 이르러서야 확인할 수 있고 1570년 트리엔트 미사 경본을 기점으로 보편화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례자인 사제만이 하는 개인적인 예식 동작으로 남아 있었다. 

 

오늘날처럼 사제와 신자들이 함께 십자 성호를 크게 그으며 미사를 시작하는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 개혁에 따른 것이다. 입당 노래가 끝나면 사제는 이마에서 가슴 그리고 양 어깨에 걸쳐 십자 성호를 크게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말한다. 이때 신자들도 함께 십자 성호를 그으며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신앙 공동체는 십자 성호의 이 단순한 동작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사건을 표현한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말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믿음 안에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십자 성호는 우리가 받은 세례 때의 신앙을 기억하게 하고 우리가 오로지 하느님께 속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어떻게 보면 세례와 함께 시작하여 무덤의 십자 표지와 함께 지상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십자 성호 안에 요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후에 제시하신 길은 아주 명확하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은 십자가 없이 생각할 수 없다. 가톨릭신자들은 십자 성호를 그을 때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새기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성된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 삶으로 드러낼 것을 다짐한다.

 

김기태 신부(인천가대 전례학 교수) - 인천교구 소속으로 2000년 1월 사제품을 받았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8년 7월 15일, 김기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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