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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손을 뻗어라. (마르3,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0 조회수1,085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월 20일 수요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손을 뻗어라. (마르3,1-6)

연중 제2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1독서<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히브7,1-3.15-17)

형제 여러분, 1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서, “여러 임금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15 멜키체덱과 닮은 다른 사제께서 나오시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16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17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하고 성경에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화답송 시편 110(109),1.2.3.4(◎ 4ㄴㄷ)

◎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 주님께서 내 주께 이르셨나이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주님이 당신 권능의 왕홀을 시온에서 뻗치시리이다. “너의 원수들을 다스려라.”

○ 네 권능의 날에 주권이 너와 함께하리라거룩한 빛새벽 품에서 나는 너를 낳았노라

○ 주님은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않으시리이다.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마르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히브7,1-3. 15-17)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 로서, "여러 임금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1-3)

 

히브리서는 크게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고 완성시키신 예수님의 여러 가지 구약적 요소들에 대한 우월성을 논증하는 1장 1절에서 10장 18절까지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을 다룬 10장 19절에서 13장 25절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전반부의 4장 14절에서 7장 28절까지는 레위 사제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의 대사제로서의 지위 대해 언급한다.

 

히브리서 7장은 이러한 맥락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약의 성취로 이 땅에 오셔서 최종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구원을 이루신 분임을 논증하는 일관된 주제를 갖고 있는 히브리서 전체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멜키체덱의 반열을 쫓아 완전한 대사제되심을 다룬다.

그 가운데 7장 1-10절은 멜키체덱이 레위 계통의 사제보다 우월한 영원한 사제임을 밝힌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레위 사제들보다 우월함을 밝히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멜키체덱의 우월함을 논증해 나가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7장 1-3절에서 우선 멜키체덱의 약력을 밝힌다. 멜키체덱은 살렘의 임금이다.

'정의의 임금'(the king of righteousness)이라는 이름 뜻을 지니고 있는 멜키체덱은 창세기 14장 17-20절에 등장한 인물로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그에게서 십일조를 받은 살렘의 임금이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당시의 '살렘'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예루살렘'의 별명이라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


멜키체덱은 임금일 뿐 아니라 주 하느님의 사제였다. 그는 제정일치(祭政一致)사회에서 임금 겸 사제였던 것이다.

그는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의 사제였고, 최초의 임명직 대사제 아론이 있기 이전의 사제였으며, 아브라함이 그를 알기 이전부터 사제였던 인물로서 이스라엘의 종교 제도 너머에 존재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임금이면서 사제였다는 사실이 레위 계통 사제들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이다. 레위 계통의 사제들은 임금의 직무를 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멜키체덱은 사제이면서 임금으로서의 직무도 수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은 히브리어로 '엘 엘리온'(el ellion)이며, 하느님을 지칭하는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엘리온'은 '가장 높은'(most high)을 뜻하는데, 영어 성경들은 이러한 고유 이름으로 사용하여 대문자 'the Most High'로 표기했다.

'엘리온'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기본적인 개념 가운데 특히 하느님의 존귀하심과 압도적인 위엄을 드러내는 명칭이다. 이것은 특히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나타내는 신명(神名)이다.

 

멜키체덱은 유일신이신 주 하느님의 사제이며 평화를 뜻하는 살렘의 임금이다. 고대 제정일치의 세계에서 임금과 사제직을 겸하는 것이 생소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존재는 많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다.

고대 근동의 셈족들은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이 많은 신들 가운데 멜키체덱이 어떻게 주님을 섬기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의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갈대아 우르라는 이교적인 우상 숭배가 성행했던 환경에서 아브라함이 주님을 섬기게 된 결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은 하느님의 선택과 예정이라는 보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그 답을 찾는 것 적절하다. 어느 시대나 이 세상에 하느님의 백성이 없었던 때는 없었으며, 그리스도 이전과 모세 이전도 예외가 아니다(사도18,10; 에페1,4.5).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다'


 이것은 멜키체덱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동기 관한 언급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엘람 임금 크도를라오메르와 연합한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네 임금에게 사로잡혔을 때, 아브라함이 훈련받은 장정 318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만났으며,그를 축복하였다(창세14,13-20).

 

여기에서 '축복하였다'로 번역된 '율로게사스'(eullogesas)의 원형 '율로게오'(eullogeo) 동사는 '잘', '훌륭하게' 를 뜻하는 부사 '유'(eu)와 '말하다'를 뜻하는 어근 '로그'(log)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문자적으로는 '좋은 말을 하다', '좋게 말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구약의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는 '축복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빠라크'(barak)의 역어로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이 히브리어 동사는 기본적으로 생산, 장수, 번영, 부귀와 같은 '유익한 능력을 부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세 가지 의미로 쓰였다.

첫째는 '칭찬하다', '찬양하다'라는 뜻이고(마태14,19; 루카1,64)

둘째는 '축복하다'라는 뜻이며(루카24,50.51; 요한12,13),

셋째는 하느님이나 그리스도께서 '복을 주신다'라는 뜻이다(마태25,34).

희랍어의 원래 의미로 보면 첫째 의미로도 볼 수 있으나 70인역(LXX)의 용례나 문맥에서 볼 때 둘째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명백하다.

 

멜키체덱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을 복을 받으리라.적들을 그때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창세14,19-20)라고 기도함으로써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것이다.

이처럼 멜키체덱이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그가 아브라함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과 아브라함을 위한 중재자(중보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믿음의 조상이요 하느님의 약속을 가진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의 축복을 받았다면, 멜키체덱이 아브라함 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단정할 수 있다(히브7,7).

 

히브리서 저자는 멜키체덱의 반열을 따른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난 레위 계통의 사제직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이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성도들 사이의 중재자(중보자)로서 성도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심으로써 성도들을 축복하신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리품으로 얻은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떼어 멜키체덱에게 준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창세기 14장 20절의 인용이며,이를 통해 우리는 멜키체덱이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이브라함의 품 속에 있었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레위 계통 사제들보다 더 큰 자임을 알 수 있다.

야곱이 하느님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기도한 것처럼(창세28,22), 아브라함이 멜키체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는데, 이것은 자신의 소유가 멜키체덱에게 속한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창세28,22; 레위27,30).

 

십일조는 '나의 모든 소유가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표시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의 절대권과 주권을 인정하는 표시로 소산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나누어 주었습니다'로 번역된 '에메리센'(emerisen)의 원형 '메리조'(merizo)는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마아셰르'(maasher)의 역어이다.

아브라함의 이 행위가 당시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관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멜키체덱을 하느님의 사제로 알고 이렇게 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것을 십일조의 기원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히브리서 저자가 특별히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멜키체덱의 사제직이 레위 계통의 그것보다 뛰어남을 증명하기 위함이다.유대의 사제들은 자기 동족들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았다. 또한 이것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사제의 법적 권한이었다(민수18,21; 신명14,22).

하지만 멜키체덱은 혈통적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받았으며 더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율법에 따라 주어진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설명하기 힘든 어떤 권위 혹은 하느님에 의해서 주어진 권위에 의해서라는 점이다. 이 사실만 가지고도 그가 레위 계통 사제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사제 직분과 레위 계통의 옛 사제 직분을 비교하는 말이다.

'아버지도 없고'로 번역된 '아파토르'(apator)는 고전 희랍어 문헌에서 고아, 주운 아이, 사생아, 부랑자, 불량배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들의 경우 '아버지 없다'라고 묘사될 때는 그들의 초자연적인 출생을 의미하는 말이된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 단어는 '어머니도 없고'에 해당하는 '아메토르'(ametor)와 함께 쓰여 신의 속성, 즉 신성과 영원성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신약에서 '아파토르'(apator)는 여기에만 나온다.

히브리서 저자는 '토라(율법; 모세오경)에 언급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랍비주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 이 논의를 전개시켜 놀라운 결론 이른다.

 

구약 어디에도 멜키체덱의 혈통이나 부모, 출생, 죽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을 들어

그는 임금이자 사제인 멜키체덱의 사제 직분이 하늘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하늘의 존재로서 멜키체덱은 사제직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사제의 혈통을 가져야 한다는 절대적인 전제 조건을 가진 레위 계통의 사제들보다 우월하며(느헤7,64), 아울러 그는 레위 계통에 속하지 않고 선재하는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표상인 것이다.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 3월15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손을 뻗어라.(마르 3,1-6)

 

(마르 3,1-6)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의 말을 버렸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일을 하십니다일 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드립시다. 228절에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신 그 말씀을 반복적으로 다시 가르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 그 예수님의 대속으로 얻는 용서구원 생명을 받아드리지 못한그래서 쉼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입니다그는 자신의 뜻을 위한 무거운 짐의 신앙으로 하늘의 평화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신앙이 아닌 자신의 뜻을 위한 종교행위에 열심 했던 사람은그 자신의 수고희생이 아까워서 절대 예수님의 대속을 안식으로 받아드리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그들에게는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1고린2,14참조)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십자가를 진리로 말하면 박해와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그러니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신앙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가운데에덴하느님의 동산(나라)~

 

(창세2,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이 말씀을 하느님의 눈으로 봐야합니다.

 

(요한1,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 들이지 않았다.

(하늘)께서 죄()와 한 몸이 되시려 오셨습니다그것이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법입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는 것죄인을 다시 살리는 좋은 일구원의 합당한 일진리입니다선과 악이 나누어지면 법이 되어 죄인에게 용서를 줄 수가 없어 끝내 죽이게 되는 불의입니다그것이 사람의 법계명입니다.

그 죽이는 사람의 계명이 오히려 다시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계명을 고발하려 합니다그래서 진노하십니다.

 

5ㄱ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선악의 그 인간들의 법을 고집하는 완고함입니다그 마음에 주님이 슬퍼하십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요한11, 32-35) 3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그들이 주님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어디에하늘그 하느님의 길(구원)로 묻었느냐그 사람의 길(죽음)로 묻었느냐물으십니다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땅의 길입니다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것하늘의 길입니다.

그러자 그들이(사람) ‘주님와서 보십시오.’ 합니다곧 예수님께서 사람의 길(죽음)- 그곳으로 오셔서 보십시오입니다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요한1,39) 나에게로나의 길로 와서 보아라’ 하셨듯이 라자로의 죽음을 예수님의 길구원으로 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사람의 길죽음으로 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애통의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5ㄴ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너의 마음 가운데 들어있는 선악 구조의 그 죽음의 계명을 버리고생명의 계명을 향해 뻗어라 하십니다그러자 선이 악을 덮어 생명을 주는 그 생명의 계명이 이루어집니다손이 났습니다.(치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를 벗는 나의 법, 계명 그 길을 버리는 그 일 뿐입니다그러면 말씀의 용서 구원이 채워집니다. 그 깨달음이 없이 보이는 그대로만 말씀을 읽으면받으면예수님의 말씀이 헛된 것말씀이 죽는 것입니다그렇게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기적은 사람을 더 완고하게 합니다절대 믿음으로 가지 못합니다성경을 사람의 눈으로 보고 사람의 귀로 듣는 것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하느님의 눈으로 보고귀로 들을 수 있도록 성령께 청합시다.

그래서 죽어(잠들어)계신 예수님을 우리가 다시 깨웁시다.(살립시다.)

 

(마태8, 24-26)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교회)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예수님의 뜻그 말씀이 사람의 뜻()으로 교회에 가득 찼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주무시는죽음이 되셨습니다그러면 우리는 영원한 죄인(죽음)일 뿐입니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구해 주십시오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일은 말씀이 하십니다우리의 말을 버렸을 때~

 

(1데살2,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아멘 -*^^*-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3,1-6)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5)

 

여기서 '노기'에 해당하는 '오르게스'(orges; anger)의 원형 '오르게'(orge)가 사람에게 적용되면 일반적으로 감정적 분노를 나타내며, 성경은 이런 종류의 감정 표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야고1,20).

그러나 이 단어가 마르코 복음 3장 5절처럼 악(惡)에 대한 신적(神的) 반응으로서 언급되면, 이것은 하느님의 공의의 심판과 형벌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 분노는 마지막 심판의 때에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쌓아 놓았다가 부어지는 하느님의 공의로운 진노(indignation)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로마2,5; 묵시6,17).

 

마르코 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님의 분노 역시 공의의 분노이다.

이것은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과 결탁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몹시 슬퍼하시면서'로 번역된 '쉴뤼푸메노스'(syllypumenous; being grieved; deeply distressed) 원형 '쉴뤼페오'(syllypeo)는 '함께'라는 뜻의 '쉰'(syn)과 '슬퍼하다','괴로워하다'라는 뜻의 '뤼페오'(lypeo)가 결합되어, 어떤 사람으로 말미암아 또는 그와 함께 '깊이 슬퍼하다' 또는 '고뇌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하느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당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율법에 대한 편협한 해석에 연연하여 당신을 감히 판단하고 단죄하려는 바리사이 무리들에 대해서 공의로운 분노를 품으시면서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깊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심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는 과정은 간단하다.

'손을 뻗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자신의 손을 '뻗어' 순종하자 '다시 성하여졌다'는 즉각적인 결과가 나왔다.

특히 '다시 성하여졌다'라고 번역된 '아페카테스타테'(apekatestathe; was restored)의 원형 '아포카티스테미'(apokathistemi)는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가다'(히브13,19)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하느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사도1,6).

따라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느님의 첫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더군다나 이 회복은 첫 창조보다 더 나은 상태로 이루어질 것이고,  궁극적인 상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처럼 주님 앞에 나아오는 이들이 모두 온전하게 회복되어 주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영광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 3장 2절에 나오는 데로, 바리사이들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관하여 자신들이 따르는 규정들보다 당신 자신의 해석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단죄하기 위한 구체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의 시제가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보여주는 미완료의 시제로 기록된 점을 볼 때, 마르코 복음 2장 23~28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며 당신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곡식을 자른 행위를 정당화시킨 사실을, 바리사이들이 공개적인 석상에서 드러내어 율법을 어긴 자로 고발하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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