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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 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28 조회수1,957 추천수13 반대(0)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3가지 차원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달마입니다. 달마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의지입니다. 무엇(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예전에 교리문답은 이렇게 묻고 답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왔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왔습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달마가 그 이유를 알았다면 달마가 가는 곳은 모두 동쪽(깨달음)일 것입니다. 반대로 그 이유를 몰랐다면 수십 년을 걸어가도 동쪽(깨달음)에는 도착할 수 없을 겁니다.

 

둘째는 동쪽입니다. 동쪽은 방향을 의미합니다. 방향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면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아담은 어디를 가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묻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우리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기꺼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리석은 성모상이 되기도 합니다. 포도주는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면 돈을 버려야 합니다. 권력 때문에 양심을 속인다면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방향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원칙과 기준이 뚜렷한 사람에게 장소는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습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더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에 더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습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습니다. 생하는 것이 있으면 멸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은 행동하기 전에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인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자국을 보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함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믿음과 사랑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깃발을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시기와 질투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욕망과 이기심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우리는 사탄의 깃발을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연민입니다. 죽은 라자로에 대한 연민이 있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연민이 있으셨습니다. 오천 명에게 빵을 먹이신 것도,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것도,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신 것도,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것도,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도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비롯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신 것도 연민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면 이렇게 죽어가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연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민의 마음이 가족, 이웃, 국가의 벽을 넘어서 함께한다면, 연민의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넘어서 원수와도 함께한다면 세상은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둘째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산상설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나라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춤추고, 늑대와 어린양이 같이 노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셋째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무한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과 욕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었고, 살아있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락방이라는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의미와 존재의 차원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으로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으며 인류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거룩한 신비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나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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