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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전례 속 성경 한 말씀: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5 조회수5,729 추천수0

[전례 속 성경 한 말씀]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

 

 

‘홍길동전’ 하면 ‘호부호형(呼父呼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혈육이 분명한데도 서자(庶子)라는 이유로 신분상 제약을 받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심정은 오죽 답답하고 억울했을까!

 

그런데 핏줄 하나 섞이지 않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하고 예수님을 큰 형님이라 부를 수 있다. 곧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창조주이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혜를 받는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것을 불경하다고 여겨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을 결코 ‘아빠(Abba)’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그렇게 부르셨고, 그 영향을 받은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나(루카 11,2 참조) 기도할 때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갈라 4,6; 로마 8,15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요한 1,12)을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며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가까워지기를 원하신다.

 

성찬 전례는 봉헌 예식, 감사 기도, 영성체 예식으로 이루어진다. 주님의 기도는 영성체를 준비하는 데 가장 적절한 기도다. 사제는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라는 말로 신자들을 이 기도에 초대한다. 여기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자격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이 기도를 하도록 권고하신 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초세기부터 주님의 기도는 오직 세례받은 신자만 바칠 수 있는 신자 전용 기도였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 기도를 제대로 바치기 위해서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함께 경건한 자세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말 미사 경본에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다함께 정성 들여 바칩시다”라는 초대문이 추가되었다.

 

‘주님의 기도’ 전반부에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고, 그분의 나라가 도래하며,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이는 곧 예수님의 기원이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기원을 드리면서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분과 일치하기 위해 준비한다. 후반부에서는 주님과 일치하는 데 방해가 되는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면서, 용서의 전제 조건으로 형제와 화해하고 유혹과 죄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이미 초세기부터 전례 기도나 개인 기도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특별한 기도로 애용되었다. 2세기 초엽에 기록된 저자 미상의 <디다케>는 세례성사를 받은 모든 교우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세 번 바치라고 가르친다(8,2-3 참조).

 

특히 초세기의 단계적 입교 예식에 ‘주님의 기도 수여식’이 있을 정도로 이 기도의 비중이 컸다. 현행 ‘단계별 어른 입교 예식’에서 이 전통이 복구되었다. 5세기의 성 베네딕토가 그의 규칙서에서 매일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중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도록 명하였는데, 현행 성무일도(시간 전례)가 이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디다케>의 가르침과 초세기의 관습에 따라 교회는 매일 세 번 미사와 시간 전례 때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

 

주님의 기도는 4세기경 동·서방 전례에 들어왔으며 영성체와 긴밀한 연관을 지니게 되었다. 그 전에 교부들은 이 기도의 ‘일용할 양식’을 일상생활에 필요한 양식 외에 성체와 연결하곤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의 성체를 날마다 구원의 양식으로 받아 모십니다”(치프리아노).

 

주님의 기도에 이어 사제는 혼자 ‘부속 기도(Embolismus)’를 바친다. 이 기도는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 두 청원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와 “악에서 구하소서”를 확대한 것으로, 유혹과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평생 평화를 내려 달라는 간청이다. 부속 기도 후에 교회 공동체는 <디다케>에 나온 영광송으로 주님의 기도 전체를 끝맺는다. 이는 전형적 전례 응답인 ‘아멘’을 대신한다.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당시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느님께서 새와 들꽃에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보살피시리라는 것을 믿으라고 격려하시며,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면 다른 것 또한 모두 받게 될 것이라는 진리를 일깨워 주신다. 곧 예수님께서는 자기 힘으로만 성공을 거두려는 너무나 진부한 인간적 지혜를 거슬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단언하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 윤리적 악과 선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청한 뒤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해야 한다. 죄의 용서란 온전히 거룩하신 하느님만이 자유로이 허락하실 수 있는 것이기에 창조물인 우리는 죄의 용서를 청할 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 곧 너희가 사랑받기를 바라는 만큼 다른 이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 윤종식 신부는 의정부교구 소속으로 1995년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전례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2월호(통권 467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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