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뜨끔한 강론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06 조회수1,335 추천수2 반대(0) 신고

 

 

115일 화요일 저녁 미사를 참례했습니다. 오늘 잘하면 참례를 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정말 참례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지도 못한 강론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강론이었습니다. 오늘 강론하신 신부님은 손님 신부님이십니다.

 

원래는 예정에도 없었는데 이번주부터 본당 신부님이 한 주간 휴가를 가시는데 오늘 강론하신 신부님께서 작년에 1년 동안 안식년하시면서 저희 본당에서 더부살이처럼 하셨고 해서 며칠 머물 수 있냐고 하셨는데 마침 휴가라서 잘 됐다고 하셔서 신부님 휴가기간 동안 좀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나도 휴가라 하루만 강론을 하고 미사를 드려줄 수 있다고 하셔서 오늘 강론을 하셨습니다. 올해 태국으로 발령이 나서 그곳에서 사목을 하십니다.

 

입당하실 때 신부님이 나오셔서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완전 태국 사람 다 되셨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도 말만 태국말을 하면 완전 영판 현지인이라고 해도 속을 정도입니다. 이 신부님은 강론을 약간 코믹하게 하시면서도 뭔가 던지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이 신부님께서 안식년을 1년 동안 저희 본당에서 보내시면서 들은 강론 10개 중 7개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정말 작년 연말 대림 때 새벽미사 때 강론을 하신 게 있는데 마침 그 강론이 전주교구에 제가 잘 아는 자매님께 그 강론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부님의 강론을 듣기 전에 그분과 주고받은 문자가 있었는데 그때 그 자매님의 의문에 대한 답이 바로 새벽미사 때 신부님의 강론이 해답이 되는 강론이었습니다.

 

강론을 들으면서 이 강론 원고를 신부님께 부탁해서 자매님께 전달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미사 후에 신부님께 여차여차 해서 그러니 신부님 강론을 좀 주실 수 있는지 부탁을 드렸는데 신부님께서 정말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다른 건 몰라도 신부님 강론이 다른 곳에 전달되는 걸 아주 쑥스럽게 생각하셔서 사양하셨습니다. 그렇게 사양하시는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쉬움을 달래면서 알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린 후 그날 오후에 자매님께 카톡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날 있었던 일을요. 그러면서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제가 오늘 들은 강론을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서라도 복원을 해 한번 보내드려도 될까요 하니 답장이 왔습니다. 자매님께서도 궁굼하셨는지 한번 할 수 있으면 해 달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 강론을 꼭 그분께 전달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절절했는지 제가 나름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서 복원을 하고 몇 번을 읽어보고 확인을 했지만 정말 제가 했지만 거의 복원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 일도 있고 해서 오늘 신부님의 강론을 혹시 몰라 제가 녹취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뵌 모습이 태국인처럼 변해가는 듯해서 웃음으로 맞이해서 밝은 마음으로 미사에 임했는데 점차 본격적인 강론으로 들어가면서 제 마음이 심각한 모드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소 신부님의 강론원고가 외부로 전하는 걸 불편해 하시는 분이라 그점을 감안해서 나름 간략하게 요지 정도로만 해서 알려드리고 제가 이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느낀 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굳이 다 언급하지 않아도 제가 그분이 오늘 강론하신 내용의 핵심과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신부님께서 강론하신 내용을 전하겠습니다. 이 앞전 휴가 때 20년 지기 친구를 만났다고 합니다. 신부님과 어려서 같은 성당에서 지낸 친구였나 봅니다.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소식을 듣고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만날 당시에 이 친구가 냉담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계신 모양입니다. 만나 친구랑 커피를 마시면서 친구가 대뜸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 신부님, 개신교의 하느님과 천주교의 하느님이 다른가요?” 신부님 입장에서는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질문인가 하는 생각이셨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이 지금도 변함없이 하느님을 믿지만 현재는 개신교의 하느님을 더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적으로는 같지만 사목적으로는 다르고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걸 이야기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 모양입니다. 옛날 주일학교 교사를 할 정도의 사람이었데 어떻게 냉담까지 이어진 건 이해할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친구가 개신교 신자로 된 모습에 많이 놀라하셨습니다.

 

주일학교 교사 때는 성당을 다녔지만 하느님을 잘 몰랐다고 합니다. 냉담 후에 마음으로만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딸이 심장병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이웃 교회에서 자매님들이 상당히 신경을 써주고 무엇보다 친구를 위해 헌신적인 기도를 해 주는 마음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한두 번 가게 되었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개신교 신자가 된 모양입니다. 교회는 감리교입니다.

 

신부님께서 감리교에 대해 잠시 분위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개종하기 전 교회가 감리교라서 대충은 잘 알지만 요즘은 변경된 내용이 있는지 하나의 설명은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건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친구가 한 질문에서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목적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당은 다른 곳이라는 것입니다. 개신교 예배와 우리의 미사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을 해주고 싶지만 이 친구에겐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하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친구의 마음 상태가 개신교에 다님으로써 충분히 마음의 위로를 받고 있고 성당을 다닐 때 느끼지 못했던 걸 느낄 수 있다고 하니 교리와 신학을 친구에게 설명해주는 게 그 상황에서는 친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겠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진다고 할 때 그냥 지금 편하면 된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게 바로 종교의 다원주의의 영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는 나의 믿음의 뿌리와 세례 때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성소의 명분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런 부분에 대해 우리 신자들도 고민하는 분도 아마 계실 분도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우리는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면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쉽게 하는 말 중에 성당을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기쁨이 없고 딱딱하고 때로는 성당에서 상처를 입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당을 기계적으로 다니고 어떤 체험을 하지 못하니 무미건조하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신부님께서 2000년 가톨릭 역사에서 우리 천주교만큼 세상 어떤 종교도 순교와 피흘림, 신앙의 체험이 많은 종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강론을 통해서 이 사실이 저에게는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신앙이라는 게 그냥 입만 벌리고 있으면 그냥 뭔가 자동으로 들어오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이 내용을 오늘 복음과 연관지어서 강론을 하셨습니다. 오늘 손님 신부님의 강론의 틀은 여기까지가 대충의 내용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강론을 오늘 복음으로 연결시킨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정리해서 올릴 기회가 있으면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신부님의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제 머리에는 하나는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다른 한 쪽은 신부님 강론에 대한 제 생각이 어떤 영감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마치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이제 제가 이 강론을 듣고 느낀 생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친구와 만나 헤어진 친구를 보면서 학교 다닐 때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생각나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수필을 중3 때 배운 수필입니다. 아마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건 마지막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에는 아사코를 만난 것에 대해 약간 후회하는 듯한 느낌을 말하는데 추측하건데, 그럴 것 같습니다. 결국 친구와 헤어졌을 때 그때 친구가 개신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모른 체 헤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 말씀이 무슨 느낌인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오늘 강론의 내용에 대한 뭔가 여운을 남깁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계속 제 머릿속에 하나의 화두가 되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오늘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타이핑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각이 새벽 1시를 향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강론 내용을 100% 전달은 되지 않았지만 개괄적인 말씀을 드린 후에 제 생각을 말씀을 드려야 제가 가진 생각이 잘 전달될 것 같아 대충 개요만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신부님 강론을 들으면서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안 되겠지만 다시 한 번 더 신앙생활을 좀 더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이틀 전에도 자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최근에 올린 글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남 보기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남은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의 양심과 내면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밖에 없고 또 이런 모습을 정확하게 보시는 분인 하느님이 계시고 또 사람의 눈은 제 속맘을 정확하게 볼 수가 없지만 하느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기에 정말 지금에 와서 봤을 때 저는 하느님께 제가 나이롱 신자 같다는 생각을 해서 정말 이런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건 어쩌면 성당 마당만 밟는 신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나름 고민을 하던 차에 오늘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뜨끔했던 것입니다.

 

상세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보다 간략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저의 생각처럼 여러분들도 나름 자기만의 생각을 한번 가져보시는 게 어쩌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강론에서 가장 와 닿고 신앙생활을 할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을 해봐야 되는지에 대한 생각입니다. 바로 그냥 기계적으로 시계추처럼 아무 생각없이 성당을 다니는 건 아닌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쉽게 말해서 미사의 은혜는 크다고 하니 그냥 미사에 참례를 하는데 정말 단순히 참례하는 데 의미를 두는 건 아닌지 소위 말해서 일종의 출석부에 도장 찍듯이 단순히 참례에 의미를 두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이걸 너무 제가 비약하는 건 아닌지 모르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사실입니다. 사실 예전에 오래된 책인데 어떤 교황님께서 저술하신 책입니다.

 

미사에 대한 책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 책에 의하면 실제 신자 100명 중에 1명이나 제대로 미사를 온전히 바칠 정도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미사 하나만 단적으로 말씀드려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미사도 이런데 다른 건 어쩌면 논하기가 부끄러울지도 모릅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순간 드는 생각입니다.

 

신앙에 대한 2000년 동안 수많은 주옥 같은 교부들이나 교황님 또는 성인, 성녀들의 말씀이 있었지만 가령,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을 이렇게 믿고 이렇게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이 수없이 많이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주 중요하지만 사람에게는 남과 비교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있는 기본적인 본능입니다.

 

남과 비교해봤을 때 자기가 나름 열심한 신자라고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고 상대적으로 하느님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봐야 하는데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만족하는 신앙에 많은 사람들이 젖어 있지는 않은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마치 성전에서 바리사이가 세리를 보면서 자기의 신앙에 만족하는 고백을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처럼 말입니다.

 

바로 어쩌면 우리 모두에겐 이런 바리사이파의 마음이 과연 없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니 저도 어느 한 순간은 제 자신도 모르게 이런 바리사이파의 기도와 같은 고백이 제 마음 한 곳에 숨어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비록 무의식 속에 있다고는 하지만 무의식 속에 있다는 건 언제나 어떤 환경에 맞딱뜨리면 충분히 그런 속성은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항상 신앙은 주변을 볼 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양심을 비추어 자신을 살펴봐야 자기가 제대로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오늘 강론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1040분 정도부터 타이핑하기 시작해서 지금 새벽 130분을 지나니 거의 세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일단 자정이 지났지만 오늘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만 제 생각을 전혀 수정 없이 그대로 정리를 하지 않고 올려드립니다.

 

두서가 없겠지만 이렇게 하는 이유는 순수하게 제가 느낀 그 느낌을 솔직하게 전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딱 세 시간 걸렸습니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제 생각을 공유하고 싶어 올린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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