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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11.1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18 조회수1,71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9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마카

1,10-15.41-43.54-57.62-64

그 무렵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복음 루카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어느 자매님께서는

늘 어디가 아팠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소화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힘이 없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함이 밀려듭니다.

 큰 병이 생긴 것 같은 불안감에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했지만,

병원의 의사 선생님께서는

별 이상이 없다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운동에

집중하기를 권했습니다.
평소에 운동을 잘하지 않았던

자신을 떠올리며, 곧바로 아침에

 일어나 걷는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하지 않았던 운동이기에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사실 운동하면 힘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운동은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발을 떼어

 앞으로 내딛는 것도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고, 운동기구를

드는 것 역시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됩니다. 이 자매님은 중력을

이겨내기가 너무 힘들었나 봅니다.

 다시 예전처럼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고 싶어지면서 이러한

비관적인 말이 나옵니다.
‘나는 안 돼.’
‘나는 중력을 거스를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냥 포기하면 어떨까요?

 아마 앞으로 그 어떤 운동도 하지

못하고 계속 힘들다고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력을

이겨내야만 비로소 운동의

즐거움도 얻을 수 있습니다.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입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운동을

할 힘이 없는 것처럼,

세상을 이길 힘이 없을 때

 손쉽게 할 수 있는 저항이

바로 비관입니다. 비관하는

것에는 에너지 소비가 적기에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낙관적이고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살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겨낼 힘과 의지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비관이라는 손쉬운 선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힘과

의지를 키워야 할 것입니다.
눈먼 이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으면 더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비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어도,

또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실

주님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힘과 의지를

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힘과

의지를 보였기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즉시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비관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계시기에 또한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힘과 의지를 세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큰일을 하는 경우에서는

기회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눈앞의 기회를 잡도록 힘써야 한다.

(라 로쇼푸코)

(예리코의 소경을 고쳐주시다)


섞인다는 것,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군대의 비극은

섞인다는 것이다.”
개별적 다름이 섞여서 개인이

인정되지 않기에 슬픈 일,

즉 비극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섞이는 공간에

오랫동안 살아왔던 저로서는

인정하기가 조금 힘듭니다.
신학교 7년, 군대 3년.

이렇게 10년 동안 서로의

 다름 안에서 섞여 살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어렵고

힘들기도 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섞임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 안에서 더 큰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사회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섞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더 편안함과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섞이지 않겠다면서 상대방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혼자서

도저히 살 수 없는데도 말이지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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