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24 주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12 조회수3,544 추천수12 반대(0)

지금은 대부분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만 어릴 때는 손수레, 우차, 마차를 많이 보았습니다. 손수레를 앞에서 끈 적은 없고 주로 뒤에서 밀었습니다. 이사 갈 때 뒤에서 밀었습니다. 김장 배추를 담은 손수레를 뒤에서 밀었습니다. 솜씨가 좋은 작은 형은 손수레에 좌판을 만들고 지붕은 천막으로 덮어 멋진 포장마차를 만들었습니다. 형과 함께 동네 모퉁이에서 포장마차를 했었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소달구지의 뒤에 앉아서 간 적도 있습니다.

 

손수레는 구루마라고도 불렀습니다. 50년 전에는 시장에 많은 구루마가 있었습니다. 지게로 짐을 나르던 사람들에게 구루마는 자동차와 같았습니다. 바퀴가 달려서 더 많은 짐을 나를 수 있었습니다. 지난 성모승천 대축일 때입니다. 한국에서 80년 된 구루마를 십자가로 만들었고, 교황님께 선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축성하셨다고 합니다. 80년 동안 노동자와 함께 했던 구루마가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십자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십자가로 변하였습니다.

 

서울의 밤을 나타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남산 타워의 불빛이 있습니다. 한강 다리의 조명이 있습니다. 홍대, 신촌, 대학로에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청계천에서는 물고기를 볼 수 있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경복궁을 볼 수 있습니다. 하천이 정비 되어서 산책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밤은 안전하고 쾌적합니다. 서울의 밤을 나타내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빨간 색의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자동차에도 묵주나 십자가를 걸어 놓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우들의 가정에는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는 성지(聖枝)를 십자가에 놓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합니다. 십자가를 고상(苦像)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 그리고 허리에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받아들이신 고통을 기억하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믿고 사랑했던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서 도망갔습니다. 유다는 은전 몇 닢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맡겼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해 주셨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걷게 해 주었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었고, 중풍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었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은 배불리 먹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조롱과 야유를 보내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참된 자유와 평화보다는 지금의 풍족함이 더 중요했습니다. 빌라도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외면하였습니다. 코로나19는 분명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미사에 참례할 수 없었고, 단체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으면 코로나19의 위험에도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예수님께 받았던 사랑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지만 모든 사람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적당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0%만 용서한다. 50%만 용서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용서는 온전히 100% 용서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미진한 마음으로 용서한다면 그것은 참된 용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분노와 원망이 있기 때문에 기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내가 베푸는 선행이 아니라 어쩌면 용서는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용서하고 용서받을 때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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