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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드레아신부님복음묵상/용서도 훈련이 필요하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13 조회수1,824 추천수3 반대(0) 신고

안드레아신부님복음묵상

용서도 훈련이 필요하다.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자매님,

태풍 하이선에 의한

피해는 없으신가요?

울릉도에서는 마이삭과 하이선이

연속으로 몰려와서 피해가 큽니다.

사동 방파제는 복구가 되려면 많은

시일과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겠고

일주도로도 일부 구간은 언제 복구가

될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본당에는

큰 피해가 없었습니다.

텅 비었던 성당이 어제 저녁부터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어서

신자들의 밝은 얼굴로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이렇게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주일 미사에서는 더 많은 신자들이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합니다.

형제자매님,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 의미를 얼마나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립니까?

오늘의 제 1독서는 이 기도의

의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용서에 조건이 붙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의 역사를 통해서 하느님이 줄곧

베풀어주시는 용서를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오늘 응송에서

잘 나타나듯이,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과 계약으로 맺어진 백성 역시

남을 잘 용서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의 용서를

스스로가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일곱 번 용서하면 되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는 말씀으로 남을 용서함에 있어

그 한계를 없애라고 분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누구나

감정을 가진 인간이 남을 무한히

용서해 줄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이런 의문을

미리 다 아신 듯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왕에게 1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리고 1탈렌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하루 인건비를

10만 원으로 계산하면 종이 임금에게

탕감 받은 빚은 6조 원이고 친구가

그에게 진 빚은 천만 원입니다.

그러니 비유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이런 놈이 있나!” 하고

무자비한 종에 대해 의분을 폭발시킵니다.

그러나 한편 그렇게 욕하는

내가 무자비한 종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형제 자매님, ‘종이 일만 탈렌트의 빚을

졌다는 것은 갚을 길이 없는 엄청난

빚을 지고 하느님 앞에선 우

리 인간의 처지를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백 데나리온 정도 빚진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있는지요?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는커녕

마치 자기가 하느님이나 된 듯이

남을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집회서 28,18절에 보면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쓰러진 이들보다는 적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저런 사람이 어떻게 성당에 나오지?”

저런 사람이 우리 성당에 있다니

내가 부끄럽다.”

저런 사람이 성당에 나오니까

차라리 내가 성당에 나오지 말까?”

등등의 말을 많이 하고 듣습니다.

만일 그런 이유로 성당에 나오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은 본인이 성당을

떠나야합니다.

성당은 잘못이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용서를

실천하겠다고 결심합니다.

형제자매님, 그러한 우리에게

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옛 세례찬미가의 한 부분을

들려줌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깨우쳐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독서에 바로 이어지는 로마 14,10에서)

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그 무자비한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형제자매님, 참된 형제적 용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용서를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용서를 베풀면 그것이 자신에게도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꽁하고 가지고 있다면 나만 병듭니다.

진정으로 용서를 베풀 때 내가 비로소

참된 평화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2006102일 아침, 미국 펜실바니아

니켈 마인스에 있는 아미시 마을에서

우유 배달부였던 칼 로버츠가 난데없이

초등학교교실로 들어와 어린 학생 5명을

죽이고 5명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칼 로버츠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전원적 마을의 신화를

여지없이 깨 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미시 사람들은

살인자를 쉽게 용서했으며

남아 있는 살인자의 가족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졌고

사람들은 아미시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살인자를 그렇게 쉽게

용서했는지 몹시 궁금해 했습니다.

기자들은 아미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용서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아미시들은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문으로

기도합니다. 용서를 거부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 삶의 일상입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며 용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형제자매님, 우리가

그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큰 용서는 매일 작은 용서를 베풀면서

용서하는 것이 몸에 베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서

오늘의 미사를 봉헌합시다.

(울릉도 도동성당에서)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 드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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