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다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05 조회수1,114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1-18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 12절은 하느님을 직관한 양 설처대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을 겨냥한 반론인 것 같다. 12-13,16절은 하느님과 사랑하는 상호내주를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표현은 요한 1서에 여섯 차례 나온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뜻하지만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을 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뜻한다고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두 설을 합쳐서,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이라고 보는 설, 곧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적 사랑이라고 보는 제 3설도 있다.

 

그러면 어느 설을 따른다? 본디 사랑은 받고 주는 것, 교호작용으로 완성되는 것이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이요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 “구원자존칭은 신약성경의 경우 예수님을 가리키기도 하고 하느님을 가리키기도 한다. “세상의 구원자라는 표현은 신양성경을 통틀어 오직 요한계 문헌에만 두 번 나온다. 14절에서는 무슨 뜻으로 예수를 일컬어 세상의 구원자라고 했을까?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신 분.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신 분이라는 뜻이다.

종교사적으로 볼 때 칠십인역에서는 하느님을 구원자라고 했다. 헬라-로마 문화권에서는 임금 또는 황제를 그렇게 불렀다. 일례로 117~138년에 통치한 로마 황제 히드리아누스를 세상의 구원자라고 불렀다. 헬라 종교계에서는 신들에게도 같은 존칭을 사용했다. 예로,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구원자라고 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 예수께서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화신으로 이 세상에와서 목숨을 바쳐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런 삶을 본받아 마땅하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 때 사랑의 교호작용이 이루어져 완전해지는법이다. 사랑이 완전하게 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말 구원을 확신하면서 종말심판에 임할 수 있다. 공포는 사라지게 마련이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마르코 복음 6,45-52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 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 뱃사이다는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흐러드는 하구 동쪽 호숫가에 자리잡은 어촌이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곳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벳사이다에 대해 불행을 선언하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 예수께서는 종종 외딴 곳으로 또는 산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 유다인들은 밤을 삼등분했고 로마인들은 사등분했다. 새녁녘은 밤 사경으로서 오전 세시부터 여섯시까지이다.

욥기 9.8에서는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라 한다. 이제 예수께서 호수 위를 걸어가시니 그분은 흡사 하느님 같은 분이시다.

하느님이 모세에게나 엘리야에게 나타날 때도 지나치셨다한다. 여기 예수 시현사화에서도 흡사 하느님 같은 분이시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

나다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밝힐 때 쓰는 문구다. 하느님의 자기소개 정식이다. 여기 그리고 14.62에서는 예수께서 그 정식을 사용하신다. “나다나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라는 뜻이다.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는 것은 구체이적사화 양식 가운데 목격자들의 경탄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마르코는 그것을 경탄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의 올이해로 보았다. 제자들은 구제이적을 목격하고서도 정신이 나간 나머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유령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 제자들의 몰이해를 강조하는 52절은 시현사화나 구제이적사화 양식에 불필요 할뿐더러 마르코의 문체와 사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가 만들어 덧붙인 것이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뜻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뜻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 했던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따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