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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3주간 월요일]예리코의 소경치유 (루카18,35-4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18 조회수1,489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33주간 월요일]예리코의 소경치유 (루카18,35-43)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은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율법서를 불태우게 한다. (1마카 1,10-15.41-43.54-57.62-64)
그 무렵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화답송 시편 119(118),53.61.134.150.155.158(◎ 88 참조)
◎ 주님,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법을 지키리이다.
○ 악인들 때문에 분노가 치미나이다. 그들은 당신 가르침을 저버렸나이다. ◎
○ 죄인들의 올가미가 저를 휘감아도, 저는 당신 가르침을 잊지 않았나이다. ◎
○ 사람들의 억압에서 저를 구하소서. 저는 당신 규정을 지키리이다. ◎
○ 당신 가르침을 멀리하는 저들, 사악한 박해자들이 다가왔나이다. ◎
○ 악인들은 당신 법령을 따르지 않았기에, 저들에게는 구원이 멀리 있나이다. ◎
○ 당신 말씀을 지키지 않는 저들, 그 배신자들 보며 저는 역겨워하나이다. ◎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자, 그의 믿음을 보시고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신다. (루카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1마카1,10-15.41-43.54-57.62-64)

"안티오쿠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1마카 1,54~57.62~63) 

마카베오 상권'왕조 역사'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

마카베오 상권은 B.C. 2세기 3세대에 걸친 유다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 형태로 전한다.

이 가문은 마카베오(유다의 별명인 '망치'에서 유래함) 가문 또는 하스몬 가문이라 불린다.

한 가문에만 초점을 모으는 것은 그 가문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에서 종교적, 군사적, 정치적 권위를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

마카베오서의 구조에서 책의 목적이 드러난다.

마카베오 상권셀류코스 왕조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의해 야기된 위기와 마따디아에 의해 시작된 저항을 묘사한 뒤에(1,1-2,70) 유다 마카베오(3,1-9,22), 그의 형제들인 요나단(9,23-12,53)과 시몬(13,1-16,24)반란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하느님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사용하시어 셀류코스 왕조의 억압을 제거하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유다의 대사제가 이 가문에서 나오게 된 경위를 설명한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하느님의 고유한 왕조를 대표한다.

마카베오 상권의 전망은 5,61-62에서 밝혀지는데, 여기서 요셉과 아자리야는 군사적인 용맹을 떨치려고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유는 그들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람들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사제 마따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요한,시몬,유다,엘르아잘,요나단) 그리고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이다.

이 책은 유다와 요나단과 시몬을 이스라엘에 '구원'을 가져다 준 인물로 제시하는데, 이때의 구원은 적대적인 정치적, 군사적 힘에서 해방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이해된 구원을 가리킨다.

세 형제는 군사, 종교, 정치 문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요나단은 빈틈 없는 정치가이다. 시몬은 새로 세운 유다 행정부를 강화하고 조직화한다.

이 책의 설화 문체는 성서의 역사서들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모방하여 이스라엘의 과거 영웅들과 마카베오 왕조 사이의 지속성을 제안한다.

이 계획에서 중요한 요소'성서적인 재창조', 곧 마카베오 왕조의 행위들이 성서의 초기 영웅들의 말과 행위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적인 노력이다.

주축이 되는 메시지는 마카베오 왕조가 이스라엘의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승계한다는 것이다.

마카베오 상권의 주요 본문은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서의 본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이 본디 히브리어로 작성되었으나 나중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셈족화된 그리스어로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

현재의 본문은 '성서 그리스어'로  씌어 있으며 그리스어 성서의 초기 역사서들의 그리스어 본문과 매우 유사하다.

이 책은 B.C.134년부터 104년까지 유다의 대사제였던 요한 히르카누스의 공적을 요약하는 말로 끝난다.

이 책은 요한 히로카누스 재위 당시나 그 직후, 곧 기원전 1세기 초에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개의 '공적' 문서들(8,23-32;10,18-20,10,25-45;11,30-37; 11,57-59; 12,5-23;13,36-40 참조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헌들의 진정성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최근 학계의 동향은 기본적으로 진정한 문헌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 담론, 기도는 저자가 자유롭게 작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성서의 예들을 본보기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마카베오 상권 1-7장과 마카베오 하권 3-15장에서 저자들이 공통되는 원천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카베오 상,하권의 복잡한 전승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 원천이 된 본문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 상권의 제1부는 1장 1절 -2장 70절까지 이며, 위기와 저항을 다루고 있다.

위기(1,1-64)의 발단시리아의 임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율법을 준수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며 할례를 실천하는 유다인들의 생활 방식을 없애려고 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B.C.336-323) 부터 안티오쿠스 4세(B.C.175-164)에 이르는 헬레니즘 역사에 대한 묘사는 오만("그는 마음이 우울하고 오만해졌다")과 죄악("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안티오쿠스는 무엇보다도 악인이지만, 1장 11-15절에서는 그의 계획에 동조한 유다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1,11).

그의 계획은 율법 대신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르게 하고, 경기장을 세우며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전통적인 유다 종교)를 저버리는 것이다.

위기는 1장 16-40절에서 커진다

B.C.169년 안티오쿠스는 이집트를 쳐부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전을 약탈한다.

그 결과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28).

그런 다음 안티오쿠스는 167년에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약탈하기 위하여 '조공 징수관'을 파견하고 항거하는 유다인들을 25년 이상 괴롭히게 될 군사 요새, 곧 성채를 쌓는다.

그 성채는 "성소를 위협하는 복병이 되고 이스라엘을 늘 괴롭히는 흉악한 원수가 되었다"(11,36).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 근처에 성채를 쌓은 안티오쿠스는 1장 41-50절에서 성전 예배와 희생 제사를 바치지 못하게 하고  안식일과 유다의 축제들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남자 아이들을 할례 받지 못하게 하고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1장 51-61절에 따르면 안티오쿠스는 이 칙령을 내린 뒤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가져오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유다 전역에 분향 제단들을 세우며, 율법서를 찢어 불태워버리고  제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푼 여인들을 사형에 처한다.

안티오쿠스의 칙령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과 자기네 종교 전통을 충실히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죽기로 작정한 이들이 있었다(1,62-63).

위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1,64).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18,35-43)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41ㄴ)

 

마르코 복음의 병행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조차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다(마르10,50).

즉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외침에 응답해 주시자 너무도 기뻐한 나머지, 밤에는 이불이 되고 낮에는 거지 행세를 할 수 있는 유니폼이며 생계 수단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로 달려 갔던 것이다.

 

그렇게 달려 온 바르티매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으신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인식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셨다.

 

이에 대하 바르티매오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태20,33; 마르10,51)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고백했다.

 

희랍어에서 '보다'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동사가 '블레포'(blepo)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접두사 '아나'(ana)가 붙은 '아나폴레포'(anablepo)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바르티매오가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I want to see)사실을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의 용례는 단순히 '보다'는 뜻보다는 '다시 보다'(see again)는 을 지닌다(사도9,12.17; 22,13).

 

이것으로 보아 그는 전에는 소경이 아니었지만 소경이 되었고, 따라서 눈을 뜨고자 하는 욕구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원문에는 '해 주십시오'에 해당하는 동사 '텔로'(thelo; want, desire)가 생략되어 있는데, '텔로'(thelo) 접속사 '히나'(hina)앞에 있어야 완전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소경이 이렇게 '텔로'(thelo)를 생략하고 짧게 말한 것은,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이 너무나 급했고 절박했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 19일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우리가 진정 갈망해야 할 것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길가에서 구걸을 하던 눈먼 이가 그분께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습니다(18,38).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18,39). 

예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하시어,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8,41) 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그의 원의대로 다시 보게 해주십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다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그저 '지나가는 나자렛 사람 예수'(18,37)로 보았던 군중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주님"(18,39.41)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예리코의 소경이 다시 보기를 바란 것은 실은 주님과의 일치,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알아뵙기를 갈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현세 물질이나 권력과 명예가 아닙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주님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 집중해봅시다. 예수께서는 수난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가시면서도 길가에 버려진 이들을 보고 계셨고, 군중의 환성에 잘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은 이들의 외침을 ‘멈추어’ ‘다가가’ 들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이들을 관대하게 받아들이시는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의 거룩한 목마름을 지나치지 않으셨지요. 

우리네 삶이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예수님의 이런 처신과 말씀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순례가 우리 모두를 하늘나라로 이끄셨듯이, 우리도 일상의 모든 움직임이 하느님을 품은 천상순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곧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인 셈입니다. 이 순례는 다른 이들의 갈망을 채워주기 위한 사랑의 순례입니다. 

늘 사랑을 품고,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견디고 기다리면 사랑을 낳습니다.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은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소명은 주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일입니다. 이 갈망을 주고받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가던 길을 멈추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으로 치유하고 행복하게 하려면 ‘멈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하느님 앞에 두고, 하느님의 사랑을 내 안에 모셔들이도록 멈추고, 애정 어린 눈길로 다른 이들의 아픔과 한숨소리를 보고 들으려고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멈춤으로써 다른 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갈망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멈추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분으로 보지 말고, 내 영의 눈을 뜨게 해주실 주님으로 고백하며 갈망해야겠습니다. 그분을 갈망하기 위해 나의 발걸음을 멈추고, 그분의 갈망을 발견하기 위해 멈춰야겠지요. 멈추어 자비이신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기도하며, 그분을 갈망하고 이웃의 갈망에 다가가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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