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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미사

제목 [미사]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02 조회수7,834 추천수1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1)

 

 

II. 성모 마리아의 마음으로 바라본 미사의 각 단계


2.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가. 시작 예식

 

시작예식의 기능은 한데 모인 신자들에게 공동체의 의미를 촉진시키는 데 있다. 전례는 신자들의 모임 자체와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이하 ‘총지침’ 46항 참조).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러한 정신에 따라 미사 시작 전에 충분한 여유를 두고 성당에 나와 함께 모여 경건하게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미사를 거행할 준비를 해야 한다.

 

1) 입당

 

신자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면 사제는 성찬례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봉사자들(독서자, 복사, 때로는 화답송 선창자)과 함께 제대로 나아간다.

 

입당 예식의 전체적 의미는, 우선 입당을 통해 미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입당노래(입당송)를 통해 공동체의 첫 번째 일치를 드러내며, 공동체가 모두 행렬하지는 않지만 사제와 함께 한마음이 되어 제단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들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구원의 신비를 거행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신자들은 성모님이 아들 예수님의 구원의 제사를 거행할 사제의 행렬에 활짝 웃으시며 함께 하심을 생각한다면 그 참여의 사제가 더욱 거룩해질 것이다.

 

2) 성호경/인사

 

미사를 시작하면서 주례사제와 교우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호를 긋는데, 각 위 하느님의 모습을 영적으로 떠올리며 흠숭, 사랑, 찬양의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하여 성호경을 해야 한다(제단 위 사제 뒤에서 정성을 다해 십자성호 그으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성호경을 하자!). 그리고 교우들은 세례 때의 신앙을 회상하며 초심의 마음, 진실한 믿음으로 미사 성제를 봉헌하겠다는 다짐으로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이어서 사제는 교우들을 향하여 팔을 벌려 인사를 하게 되는데, 이 인사는 하느님 편에서 신자들에게 하는 강복의 인사이며, 그리스도께서 진정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심을 선포하는, 곧 그리스도의 현존 의식을 높여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인사에 대한 대답으로서 교우들이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하고 하는데, 이는 특히 사제가 서품 때 받은 성령의 은사에 성삼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주례사제가 미사성제를 거룩하고 신비롭게 거행하도록 하시기를 비는 신앙의 표현이다.

 

여기서 미사를 거행하기 위해 제단에 서있는 사제를 바라보는 성모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자.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성모님께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아들 예수의 인격과 하나 되어 지극히 거룩한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사제를 위해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해 주시며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인사하실 것이다.

 

3) 참회 예식(사제의 참회 권고, 반성의 침묵, 공동 고백, 사제의 사죄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의 기념제요 하느님 백성의 감사제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남이요 형제로서 일치를 이루어 파스카 신비를 경축하는 공동체의 축제인 미사를 거행하기에 앞서 참여자들의 마음과 행동이 더욱더 맑고 깨끗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공동체는 미사의 시작 예식으로서 참회 예식을 거행하면서 우리 안에 하느님을 거스르는 요소가 없는지 혹은 형제를 용서하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회개의 시간을 갖는다.

 

교회는 초세기 때부터 성찬례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한 다음 깨끗한 마음으로 제사를 바치도록 권고하고 있다. 집회서의 다음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자. “주님께로 돌아오라, 죄를 끊어 버려라. 주님께 기도하여라,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말아라.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로 돌아오라, 부정한 행위는 버려라. 그리고 악한 것을 역겹게 생각하여라. 살아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는다면 죽어서 어떻게 지극히 높으신 분을 찬양할 수 있겠느냐? 죽은 자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집회서 17, 25~28)

 

성모님은 우리 신자들이 보다 거룩하고 합당하게 미사성제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영적 준비 없이 죄 중에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실 것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자신의 죄를 깊이 성찰하여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받는 일에 개을러서는 안 되며, 진실로 통회하여 맑고 거룩한 마음으로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지 않고 혼인잔치에 참여했다가 쫓겨난 개으른 사람처럼 되지 않도록 레지오 단원들은 늘 깨어 자신의 생활과 영적 상태를 성찰하고 성실히 고해성사를 받아야 하겠다.

 

그래도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소죄의 경우 ‘고백의 기도’와 사제의 ‘사죄경’(“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사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을 통해 용서를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로운 은총인가! 고백의 기도 중에 “내탓이요!”하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죄를 뉘우치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들과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전구해 주기를 바라는 기도를 바칠 때 성모 마리아께서는 정말 어머니의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실 것이다.

 

4) 자비송

 

자비송(Kryie, 기리에)은 참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자들의 환호이자 그분의 자비를 간청하는 고백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주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찬양으로 그분을 공경하고 섬김을 드러내는 환호이다. 마르코 복음 10장에 나오는 에리코의 소경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의 자비와 능력을 굳게 신뢰하는 가운데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크게 외쳤던 것처럼, 우리 모두도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이 자비송을 노래하거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평소에도 화살기도로 종종 ‘자비송’을 바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5) 대영광송

 

대영광송(Gloria)은 성령 안에 모인 교회가 하느님 아버지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간청을 드리는 매우 오래되고 고귀한 찬미가이다(‘총지침’, 53항). 대영광송을 노래하는 공동체를 보면 그 품격이 느껴진다.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공동체가 감격과 열정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간청을 드리는 모습에서 천상잔치에 닿아있음이 드러난다. 성모님과 천사들과 함께 기도하듯 더 열정적으로 기쁘게 바치면서 하느님께 영광 올려드려야겠다.

 

6) 본기도

 

본기도(Collecta)는 주례자인 사제가 신자들의 기도를 모아서 바치는 교회의 공적인 기도라는 뜻에서 ‘모음 기도’라고도 불린다. 형식상 본기도는 거의 항상 성부께 바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친다. 이 기도는 전례 시기나 그날의 축일, 미사 의미를 요약하여 담고 있어 그날의 기도로도 간주된다. 사제는 본기도를 시작하면서 먼저 “기도합시다”라는 권고로 신자들을 기도로 초대하는데, 신자들은 사제와 함께 잠시 침묵하면서 하느님 앞에 있음을 의식하고, 사제의 본기도에 집중하고자 마음을 모아야 한다. 사제의 기도가 끝나면 신자들은 그 기도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멘”하고 응답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4월호,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광주대교구 대치성당 주임)]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2)

 

 

나. 말씀 전례

 

1) 말씀 전례의 중요성과 내용

 

말씀 전례는 성찬 전례와 더불어 미사의 양대 골격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교부들은 말씀 전례가 성찬 전례를 위한 서곡이 아니며, 성찬의 전례와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만 해도 말씀 전례는 예비 미사라고 불릴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되어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말씀 전례는 성찬 전례와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성찬 전례와 같은 열정으로 말씀 전례에 참여하여 성체를 영하는(영성체) 만큼 신앙과 사랑으로 말씀을 영해야 할 것이다. 교부들도 손으로 성체를 받았을 때 축성된 빵의 한 조각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듯, 전례 중에 듣는 하느님의 말씀을 헛되이 흘려버리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말씀 전례의 구조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독서, 복음, 강론) 인간이 이에 응답하는(화답송, 복음 환호송, 신앙고백, 보편지향기도)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씀 전례의 중점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억하고 기념함으로써 하느님이 하신 일을 마음으로 깨닫고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는데 있다. 따라서 말씀 전례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선포하는 복음을 중심으로 하며, 여기에 두 개의 독서를 할 경우 첫 번째 독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결된 내용을 구약 성경에서 택하고, 두 번째 독서는 그 복음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사도행전과 서간에서 택한다.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한 그만큼 말씀을 선포하는 독서자는 영적(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 준비하여 내면적으로 완전히 말씀을 소화시킴)으로 준비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술적(속도, 발음, 음정, 높낮이 등을 적절히 조절함, 마이크 사용법도 읽힘)으로 잘 준비하여야 한다. 즉 명확히 발음하고 잘 띄어 읽음으로써 신자들이 말씀을 잘 알아듣고 그리스도께서 직접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확신을 갖고 말씀을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듣는 공동체(회중)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로 들음으로써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그분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

 

복음을 봉독할 때에는 말씀의 형태로 신자들 가운데 오시는 지극히 위대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모두 일어서서 말씀을 듣는다. 사제는 복음 봉독 준비기도로 “전능하신 하느님, 제 마음과 입을 깨끗하게 하시어, 합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독서대로 가서 봉독되는 복음을 통해 이 자리에 신자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한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라고 말하며 이마와 입과 가슴에 작은 성호를 긋는데,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건하게 듣고, 고백하고,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강론은 성체를 영해 주는 것과 같은 무게로 말씀을 영해주는 것이라고도 설명되어지는 만큼 전례의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로서, 독서를 통해 선포된 말씀을 삶과 연결시키고 적용시켜줌으로써 신앙생활의 영양소의 역할을 한다. 사제는 주일과 의무 축일의 모든 미사에서 강론을 해야 하며, 충분한 준비해야 함은 물론이다. 신자들은 사제의 강론 말씀을 인간의 소리로 듣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가슴에 새겨 생활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해 가야 한다.

 

2) 성모 마리아와 하느님의 말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성모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을 경우 당시 율법규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음에도 그것을 각오를 하고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이 하느님의 종, 곧 하느님의 소유임을 깊이 인식하고 자라왔으며, 천사의 수태고지 앞에 하느님의 것 답게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뜻을 순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줄곧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왔듯이 성모님은 십자가 아래서 차갑게 식은 아들 예수님을 품에 안으셔야 했을 때에도 예수님의 죽음을 순종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으로 응답하신 성모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의 모델이시다. 우리도 늘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실천에 옮기고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3) 신경(신앙고백)

 

성서봉독과 강론이 끝나면 신자들은 들은 것에 대한 답변으로 신경을 함께 외운다. 이것은 독서와 강론에 대한 응답일 뿐만 아니라 말씀전례 전체에 대한 응답으로서 말하자면 ‘큰 아멘’이다. 즉 주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 신앙심의 응답이다. 미사경본 총지침(43-44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경은 미사 중에 성경 독서와 강론으로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며, 성찬 전례 시작 전에 신앙 개조를 상기하는 행위이다. 신경은 미사 집전자와 교우들이 주일과 대축일에 외워야 한다.”

 

‘신경’이란 신앙적 교리를 교회가 권위 있게 공식 문구화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신경을 염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모두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즉 신자의 표시로 신경을 염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은 특히 신입 신자가 영세 때 천주교회의 참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처음으로 외우는 기도로서, 이 기도의 내용을 믿는 것은 신자의 의무였다.

 

※ 신경의 종류: 신경에는 ‘사도신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신경 외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도 있고 ‘아나타시오 신경’, ‘칼케돈 신경’도 있다. 그밖에도 다른 신경들이 있는데, 가톨릭교회가 공적으로 채택하여 사용하는 신경은 ‘사도신경’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참된 하느님이심을 부정하던 이단을 거슬러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참된 하느님이심을 선포했던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신경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다. 또한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전해준 신앙고백문이라는 믿음에 따라 ‘사도신경’이라 불린다. 이 두 신경 모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 그 외아들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 성령의 천주성, 사도전승의 교회, 후세의 삶” 등 그리스도교 교리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미사 중에 자주 사도신경을 사용하곤 하지만 미사 전례의 공식 신앙고백문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다.

 

4) 보편지향기도

 

신자들이 기도를 바친다는 뜻에서 ‘신자들의 기도’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그 내용이 교회의 필요한 일들, 위정자와 세계 구원, 고통 받는 이들, 공동체의 소망 등 보편적인 것을 지향하기에 ‘보편 지향 기도’(普遍 志向 祈禱)로 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보편지향기도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느님 말씀에 응답하고 세례 때 받은 사제직에 따라 하느님께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바치는 기도이다. 보편지향기도는 신앙인들이 하느님 말씀에 응답하기 위한 기도이며 신앙에 따라 사는데 필요한 은혜를 청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것을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하느님의 은총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는 우리들이 공동체를 위하여 하는 기도이다.

 

참고로 보편 지향 기도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공동체의 응답이기에 성경 말씀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즉 개인적 지향이나 신앙고백, 논평 같은 기도는 피해야 한다. 성경 말씀이 보편 지향 기도로써 신자들에게 내면화돼야 하기 때문이다.(‘총지침’, 71) 그리고 보편지향기도는 성모 마리아나 성령께 바치는 기도가 아니고 하느님께 직접 은총과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이다. 물론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전달되고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절실히 기도해 주신다. 기도지향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신중하면서도 자유롭게 준비한다. 또 공동체 전체의 청원을 드러내야 한다(‘총지침’ 71). 기도 지향 순서는 모든 교회, 위정자와 온 세상의 구원, 온갖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이들, 지역공동체 순이다(‘총지침’ 70).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5월호,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광주대교구 대치성당 주임)]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3)

 

 

다. 성찬 전례

 

하느님의 말씀, 복음을 듣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기쁨을 기도와 찬미의 노래와 봉헌으로 표현하는 성찬 전례(성체성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하느님 백성 공동체는 성찬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 업적을 기념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공동체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는 재물로 봉헌한다.

 

1) 성체성사의 중요성과 의미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위대한 기적은 바로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이라고 했다. 성체성사는 성사생활의 중심이자 정점(‘성사 중의 성사’)이며, 다른 모든 성사는 마치 목적을 향하듯 성체성사를 지향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식사, 즉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예수께서는 만찬을 시작하시면서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식사가 끝날 무렵에 “또 그와 같이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19-20)라고 하셨다. 교회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성체성사는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이다. 미사 중에 예수께서 빵을 들고 하느님 아버지께 주신 모든 은혜,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업적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업 그리고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화에 대해서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둘째,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것이므로 희생제사다. 성찬례가 지닌 제사적 성격은 성찬을 제정할 때 하신 말씀, 곧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바로 그 몸과,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마태 26,28)를 성찬례에서 주신다. 성찬 전례는 그 기원을 최후만찬 때 예수님께서 빵과 잔에 대해 하신 말씀과 행위에 두고 있다. (성체성사 제정 성경 근거: 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9-20; 1코린 11,23-26).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희생제사와 성찬례의 희생제사는 동일한 제사다. “제물은 유일하고 동일하다. 그때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바치신 분이 지금 사제의 직무를 통해 봉헌하시는 바로 그분이시다. 단지 봉헌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십자가 제단 위에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피 흘려 봉헌하신’ 그리스도께서 똑같은 제사를, 미사로 거행되는 이 신적 희생제사에서 피 흘림 없이 제헌하고 계시기에 미사는 참으로 속죄의 제사다.” “모든 선한 일을 다 합해도 미사 한 번의 가치에 이르지 못한다. 전자는 인간의 일이고 미사 성제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순교의 희생도 미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 하느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친 사람이 있다. 바로 미사 안에 계신 분, 자신의 살과 피를 인간을 위해 희생하신 하느님이 바로 그분이다.”(아르스의 파러 성인)

 

셋째, 우리가 미사 중에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을 기념하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게 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현존하시는 빵, 즉 성체를 영함으로써 그분과 긴밀하게 일치하게 된다(요한 6,56 참조). 세례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예수님과의 일치가 영성체를 통해서 더욱 굳건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과의 굳건한 일치를 이루면서 우리는 그분의 크나큰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이 사랑은 우리의 신앙 여정에 필요한 힘과 희망을 선사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든 사랑을 받아야 정신적, 영신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다. 육적인 생명은 밥을 먹어야 유지되지만 영신적인 생명은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해서 양육된다. 예수께서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면서 바로 이런 조건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에 성체는 우리 영혼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2) 예물 준비(봉헌)

 

예물 준비 예식은 예물 준비 성가, 예물 봉헌 행렬, 빵과 포도주를 제대에 차리며 바치는 준비 기도, 사제가 정결의 기도를 바치고 봉헌하는 마음을 깨끗이 하는 상징으로 손을 씻는 일, 예물 준비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곧 이어질 성찬 전례를 준비하는 ‘예물 기도’로 구성된다.

 

유스티노의 ‘호교론’에 의하면, 초세기에는 교우들이 빵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오면 부제가 받아서 사제에게 주고, 사제는 그것을 제대에 놓고 바로 감사기도를 바쳤다. 그러다가 4세기경부터는 교우들이 많아지고, 빵과 포도주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성직자 생활 부양과 교회 운영에 필요한 예물을 갖고 오게 되었다. 그래서 예물 준비 행렬이 길어지고 봉헌의 의미가 점차 강조되기 시작했다. 11세기 이후에는 예물이 헌금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다보니 ‘예물 준비’가 ‘제물 봉헌 행사’로 인식되고, 그 명칭도 ‘봉헌 예식’으로 바뀌는 오류를 빚게 되었다.

 

그러나 성찬 전례를 시작하면서 교우들이 바치는 빵과 포도주는 제물이 되기 전 예물이며, 봉헌하는 헌금도 제물이 아니다. 성찬 전례로 봉헌되는 제물은 빵과 포도주가 감사기도 중에 십자가의 제물로 축성되어 성변화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다. 따라서 예물 준비 기도는 교우들이 직접 가져온 빵과 포도주이던지, 교우들이 봉헌한 헌금으로 마련한 빵과 포도주이던지, 사제가 그것들을 제대 위에 차려 하느님 아버지께 그리스도의 몸(‘생명의 양식’)과 피(‘구원의 음료’)가 될 예물로 받아주시라고 청하는 기도이다.

 

한편 예물 준비의 단계에서 신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봉헌을 준비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미사에 참석한 교우들은 ‘예물 준비’ 예식에서 예물(헌금)을 바침으로써 제물로 바쳐지게 될(봉헌)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림을 나타낸다. 봉헌은 자기 자신을 전부 바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의 ‘온 몸’을 다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예물을 드림으로써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봉헌에 동참한다. 자신을 온전히 바쳐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사소한 노동과 희생, 인간적인 나약함이나 부족한 점까지도 포함한 우리 자신 전부,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를 바침을 의미한다. 교우들은 그 모든 의미를 담아 마음을 모아 봉헌하기 위해 예물 준비 동안 ‘봉헌의 노래’를 부른다.

 

봉헌에서 놓쳐선 안 될 점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다. 교회는 모이는 일, 모여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친교’를 나누지만, 이 나눔의 공동체는 결국 ‘봉사’하는 교회임을 말해준다. 교회 운영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돕는 일’이 먼저 해야 할 일임을 말해주고 있다. ‘가난’이란 표현은 물질에 관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무엇을 필요로 하는 이들 모두’를 가리키기도 한다.

 

교회가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구심적인 움직임뿐 아니라, 이웃에 봉사하고 나누는 ‘원심적인 노력’들이 필요하다.

 

신자들은 미사 중에 예물(헌금)을 봉헌하면서 자신이 바치는 그것이 감사와 찬미의 예물도 되겠지만, 더 나아가 성체와 성혈을 이룰 예물이라는 것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과 삶을 봉헌하는 것임도 알아야 하겠다. 그러기에 더욱 정성을 다해 기꺼이 봉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감사와 기꺼움이 없이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마음으로 무미건조하게 봉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쁜 소식과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 특히 십자가 상 죽음으로 우리 죄인을 구원해 주신 그 크신 사랑에 대한 감사의 정을 담아 겸손과 사랑, 흠숭과 찬미로 예물을 봉헌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 성가를 부르며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정성과 사랑으로 봉헌하는 모습을 대견한 마음으로 바라보신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도록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겸손과 온전한 사랑으로 주님의 잉태를 받아들이신 성모님의 봉헌을 우리의 봉헌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6월호,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광주대교구 대치성당 주임)]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4)

 

 

3) 예물 준비 기도에서

 

– 사제: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바치는 이 제사를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꺼이 받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 회중: “사제의 손으로 바치는 이 제사가 주님의 이름에는 찬미와 영광이 되고, 저희와 온 교회에는 도움이 되게 하소서.”

 

사제의 이 초대의 말로 우리가 드리는 미사 전례가 ‘제사’임이 분명히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미사 성제(聖祭)’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상 희생제사를 재현하고 그 제사에 참여하면서 사제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역할을 수행한다. 주례사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이 제사, 미사 성제를 기꺼이 받아들여 주시도록 정성되이 기도하자고 권고하는 것이다.

이 초대에 응하여 회중이 바치는 기도는 미사 성제가 가진 두 가지 본질적 목적인 ‘하느님께 흠숭’(상향적), ‘우리의 성화’(하향적)를 강조하고 있다. 미사 성제는 하느님께는 흠숭 감사 찬미를 드리고 백성은 성화의 은총을 얻기 위한, 곧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한 가장 탁월한 장이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중요한 미사 성제를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제자들 마음을 다잡고 함께 기도하셨듯이, 함께 해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이끄시며 간절히 전구해 주신다.

 

4) 감사 기도

 

성체성사는 무엇보다 성부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교회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와 창조와 속량과 성화로 이루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바쳐드리는 찬미의 제사다.

 

감사 기도는 미사 전례의 중심과 절정을 이루는 장엄한 기도로서,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빵과 잔을 들고 바치신 감사와 찬양의 기도에 유래한다. ‘미사 전례 총지침’ 78항에 의하면, 감사 기도는 사제가 전 공동체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는 감사와 축성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신자들로 이뤄진 회중 전체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찬양하며 제사를 봉헌하는데 그 뜻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종래의 ‘로마 전문’(1양식) 외에 세 가지의 새로운 감사 기도문을 도입하여 현재 네 가지 양식의 감사 기도를 사용하고 있다.

 

감사 기도의 본질적인 요소는 대화와 감사송, 환호(거룩하시도다), 연결 기도, 축성 기원 성령 청원 기도, 성찬 제정 축성문, 기념 환호(신앙의 신비여), 기념과 봉헌, 일치 기원 성령 청원 기도, 전구, 마침 영광송으로 이루어진다.

 

▶ 대화

 

감사송 전에 삽입되어 있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로 시작되는 사제와 신자들의 대화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그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면서 이어지는 감사 기도를 합당하게 준비하게 한다. 즉, 감사 기도는 말 그대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기도이며, 주님을 향하여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모아 미사 성제에 임하도록 성대하게 권고하는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미사 성제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깊은 믿음과 감사의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간절히 바라시며 전구해 주신다.

 

▶ 감사송

 

감사 기도의 첫 부분으로, 전례력에 따라 구세사의 특징을 진술하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내용은 전례시기에 맞춰 바뀌지만 구조는 모두 동일하다. 서론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림은 구원의 절대적 조건임을 고백하고, 본론에서는 감사의 이유와 동기(하느님의 구원 역사, 하느님의 현존)를 설명하며, 결론은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많은 단계로 섭리하시고 사랑으로 보호하고 이끄셨으며, 당신 아들 예수님을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자비하신 하느님께 언제나 어디서나 감사를 드려야 한다. 특히 미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가장 탁월한 자리이다. 진정한 감사의 정도 없이 건성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소극적이고 형식적이며 무의식적인 태도는 미사를 모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 거룩하시도다

 

이 구절은 모든 신자들이 감사 기도에 깊숙이 참여하도록 잘 표현되어 있는 환호이다. 전반부는 이사야 6장3절에서 따온 것으로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감사를 노래하고, 후반부는 마르코복음 11장 9-10절에서 따온 것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곧 성찬 예식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세 번 반복해서 부름으로써 더없이 거룩함을 드러내는 이 환호는 노래로 부를 때 그 찬양의 의미가 더욱 잘 드러난다. 우리가 매일 드리는 미사 성제에는 분명 성모님과 천사들이 함께 하신다. 우리는 천사들과 그리고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온 마음으로 노래하며 경건하면서도 기쁘게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

 

▶ 축성 기원 성령 청원 기도(에피클레시스 Epiclesis)

 

제대에 놓인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몸과 피로 변하게 해달라고 성령께 청하는 기도문이다. 무릇 교회의 모든 성사 활동이 성령의 역사와 그 능력으로 이루어지듯이 미사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성변화 때 성령의 역사를 청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사제는 이 기도를 바칠 때 안수와 십자표시를 하는데, 안수는 성령 역사의 표시이며, 십자 표시는 축성의 전형적 표시이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에 축성을 기원하는 성령 청원 기도와 안수로 성변화가 시작되어 성체 성혈 축성 제정문으로 축성이 완성된다.

 

이토록 지극히 중요한 순간이기에 회중은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해야 하며, 위대한 성체성사의 신비에 흠숭과 찬미를 드려야 한다. 종을 울리는 것은 그러한 신비로움을 강조하며, 회중의 마음과 정신을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그 순간 나자렛에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와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성령께서 빵과 포도주에 임하시는 것을 바라보실 것이다. 처녀이신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었듯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을 바라보실 것이다. 처녀 된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이 위대한 기적이듯이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 역시 참으로 위대한 기적이며 지극히 거룩한 신비이다. 그 위대한 신비를 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지극히 거룩한 순간에 성모님의 마음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의식하며 임하고 있는가? 얼마나 설레고 가슴 뜨거운 마음으로 사제의 안수를 바라보고 있는가? 성령님이 우리 안에도 임하시며 예수님의 지체들로서 보다 거룩하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요 복음의 일꾼으로 변화되도록 이끄시길 청해야 한다.

 

성모님은 그렇게 매 미사에 함께 하시며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해주시는 어머니이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7월호,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광주대교구 대치성당 주임)]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5)

 

 

5) 감사 기도

 

▶ 성찬 제정과 축성문

 

‘성찬 제정과 축성문’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빵과 포도주를 들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라 바치는 경문으로서, 예수님의 이 말씀과 행위를 통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룩하게 변화한다(성변화).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최후 만찬의 기억이 아닌, 현실에서의 재현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빵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가? 그것은 축성에 의해서이다. 축성은 어떤 말씀으로 이루어지는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 거룩하고 경이로운 일이 일어나는 순간, 사제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체 안에서 말하는 것이다.”

 

성체 축성의 단어들은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훌륭하고 놀라운 단어들이다. 그 단어들은 사제를 통하여 빵 조각과 포도주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 즉 예수님으로 변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놀랍고 신비로운 힘은 대천사의 힘을 능가하는 지고(至高)의 힘이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하는 힘인데, 이 힘을 당신의 사제들에게도 주신 것이다. 이 신성한 단어들을 발음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던 거룩한 사제들도 있었다.

 

쿠페르티노의 성 요셉, 그리고 현대의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축성의 순간에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 사제들은 아주 어렵게, 그리고 쉬어가면서 두 차례의 축성을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한 신부가 쿠페르티노의 성 요셉에게 물었다. “신부님께서는 미사 중에 경문은 아주 잘 바치시는데, 어째서 축성 때에는 그렇게 더듬으십니까?” 이에 성인이 대답했다. “가장 신성한 축성의 단어들이 나의 입술에는 벌겋게 타고 있는 석탄과 같습니다. 제가 그 단어들을 말할 때, 저는 펄펄 끓는 뜨거운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고통을 느낍니다.”

 

바로 이 신성한 축성의 단어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는 제대 위에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계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한 주교에게 교육 수준이 꽤 높은 이슬람교도가 물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주교는 대답하였다. “당신은 태어났을 때 아주 작았었지요. 그런데 당신이 먹은 음식이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됨으로써 당신은 몸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이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은 정말 쉬울 것입니다.”

 

그 이슬람교도가 다시 “그 작은 제병 안에 예수님 전체가 계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고 묻자, 주교는 “주위의 경치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에 비해서 당신의 눈이 얼마나 작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그 작은 눈 안에 저 넓은 경치의 영상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영상으로써 될 수 있는 일을 하느님께서 실제로 친히 하실 수 없으실까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슬람교도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한 몸이신 예수님이 모든 성당들과 모든 축성된 제병들 안에 동시에 계시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주교는 말하기를.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이 대답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자연 또한 이 질문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거울을 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마룻바닥에 던져 깨버리십시오. 깨진 거울 조각들마다에 깨지기 전의 거울 전체에 들어 있던 영상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상이 아니라, 당신 자신께서 여러 곳에 동시에 계실 수 있고 축성된 제병의 형상 하나하나에 모두 현존하십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 지극히 거룩한 성찬 축성의 순간에 성모 마리아의 눈은 얼마나 큰 감동으로 반짝이며, 마음은 얼마나 설레고 기쁨으로 가득 차겠는가! 천사 가브리엘의 알림과 성령으로 당신 태 안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하느님의 전능한 역사를 겸손되이 순종으로 받아들이셨던 성모님.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의 첫 기적 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셨던 성모님은 지금도 매 미사 때마다 성찬 제정 축성문을 외우는 사제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빵과 포도주의 성변화를 바라보신다. 지극히 거룩한 감사 기도에 참여하는 우리도 성모님의 눈과 가슴으로 성변화를 바라보며 온 믿음으로 겸손되이 받아들이고, 한없는 감사와 흠숭의 마음으로 받들어야 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성체에 대한 공경은 성변화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깊은 감화로 가르침을 준다. 그는 이렇게 권고한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실제로 육(肉)으로 거룩한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축성된 빵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육신의 눈으로 빵과 포도주를 볼 때, 그것이 참되고 살아 있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도록 또 굳게 믿도록 합시다. 이와 같이,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당신 자신이 말씀하시는 대로 주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과 함께 이런 형상으로 항상 계십니다. 형제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존경과 영예를 나타내도록 하십시오. 그분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평화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권고 1)

 

성 프란치스코는 성체성사에 대한 공경심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사제들을 존경했다. 따라서 그가 세속화된 사제든 거룩한 사제든, 그가 사제를 만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그들 앞에서 겸손했고 존경했다. 그가 그렇게 사제들을 존경했던 까닭은 사제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에 봉사하는 직분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 성혈 축성문

 

첫째, 축성된 성혈은 ‘계약의 피’이다. 그 계약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숫양의 피로 맺었던, 그러나 지키지 못하고 파기된 낡고 유한했던 옛 계약[舊約]이 아닌, 지극히 순결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새롭고 영원한’ 계약[新約]이다. 우리는 매번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새롭고 영원히 유효한 계약에의 참여를 갱신한다. 우리는 그 계약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구원의 은총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이스라엘 백성처럼 배은망덕하게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을 거듭 다짐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지어 계약에서 벗어날지라도 우리의 머리이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계약을 영원히 지키시니 계약이 결코 파기되지 않으며,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가면 그 계약의 은총을 회복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계약이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고 고귀한 피로 맺어진 것임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죄를 범하지 않고자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

 

둘째, 성혈은 ‘죄 사함의 피’다. 히브리서 9장 11~22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씻어준다. 죄는 하느님과의 단절이며, 그 단절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개선될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의 개입, 곧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만 그 단절을 개선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과연 그리스도의 피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다. 성체성사를 통해 그 피를 마실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다. 그 성혈을 마실 수 있는 미사를 멀리하고 냉담하거나 개종하는 신자들은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인가!

 

셋째, 성체 성혈의 성체성사는 ‘Anamnesis’(기념제)이다. 과거의 십자가상 구원의 희생제사를 단순히 회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희생제사를 ‘지금 여기에’ 현재화 하는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성체성사이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체 성혈을 축성하면서 그렇게 지금 이 자리에 구원의 사건을 재현시키는 성체성사에 우리는 진정 온 정성을 다해 참여하며, 그 신비에 젖어들고 하느님의 사랑에 온전히 일치해야 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8월호,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광주대교구 대치성당 주임)]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6)

 

 

▶ 기념 환호(신앙의 신비여)

 

성체 성혈 축성 후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환호하는데, 과연 성체성사 성변화는 진정 신비이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또 몸 안에 들어오시어 함께하려 하신다. 물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이다. 기적은 전과 후가 증명이 되지만 신비는 전후에 외적인 변화가 없다.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축성된 성체는 겉모습이 여전히 빵의 모양이다. 축성하기 전에도 빵의 모양이고 축성한 후에도 빵의 모습이다. 이건 진정 위대한 신비이다. 우리가 빵의 모양인 예수님의 몸을 먹고, 포도주의 모양인 예수님의 피를 마심으로써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라면 신앙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앙이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자연 현상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신앙은 보고 만져보아도 알길 없는 그 자리, 인간의 오관으로는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체 찬미가’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눈으로 보아 알 수 없는 하느님,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신성을 감추시고, 여기서는 인성마저 아니 보이시나, 저는 신성, 인성을 둘 다 믿어 고백하며, 뉘우치던 저 강도의 기도 올리나이다. 토마스처럼 그 상처를 보지는 못하여도 저의 하느님이심을 믿어 의심 않사오니, 언제나 주님을 더욱더 믿고 바라고 사랑하게 하소서.”

 

▶ 기념과 봉헌(성찬 축성 후 전구)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여 봉헌하는 성체 성혈을 보시고 들어주시길 간청하는 전구(轉求)의 시간이다.

 

우선 봉헌문 첫 구절에서 축성된 ‘생명의 빵’ 성체와 ‘구원의 잔’ 성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Anamnesis)하여 봉헌하는 것임과, 이 거룩한 제사 봉헌이 ‘봉사’임이 강조되고 있다. 본 원고 서두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전례(liturgia / 희랍어 λειτυρϒια)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봉사’(service)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찬미와 흠숭을 잘 바쳐 올릴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충만히 받아 성화되도록 도와주는 봉사이다(전례의 본질적 특성).

 

그래서 사제는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여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백성의 성화를 이루기 위한 봉사의 제사를 바칠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이 순간 축성된 성체와 성혈에서 눈을 떼지 못하시는 성모님께서도 얼마나 감격하며 감사를 드리시겠는가! 우리도 진정 이 위대한 신비 앞에 감격하며 성체와 성혈에 눈과 마음을 고정하고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다.

 

다음으로 공동체를 위한 전구가 이어진다.

 

공동체를 위한 전구의 요소 또한 ‘기념’하는데서 비롯된다. 그리스도 생애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세사 전체의 기념으로서, 그 안에 전 인류를 위한 기도, 우리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기억하는 기도가 포함되게 마련이다. 이 공동체를 위한 기도는 감사기도의 각 양식에 따라 각기 그 강조점, 뉘앙스, 세목이 다르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 전구방식에 있어서는 공통적이다.

 

기도의 주제를 살펴보자.

 

먼저 일치를 위한 성령 청원 기도로서, 미사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한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안에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를 간구한다. 영성체를 했어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일치를 이룰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세상의 온갖 분열을 아파하시는 성모님께서도 성체를 모신 우리 신자들부터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라며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기도하실 것이다.

 

다음으로 세상의 모든 교회가 목자인 교황, 주교, 사제와 더불어 사랑의 교회를 이루기를 전구한다. 가톨릭교회는 그 역사 안에서 수많은 분열의 상처를 겪어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치를 위해 오셨고, 교회는 주님의 그 일치의 과업을 세상 끝날 날까지 수행해가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부터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세상에 일치를 일으킬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특히 우리 사제단이 주교를 중심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 주기 바란다.

 

다음으로 죽은 이들이 성체성사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도록 기도한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우리 가톨릭의 통공교리와 맥을 같이 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치는 미사 성제는 죽은 이들을 위한 영적 자선의 가장 탁월한 장이다.

이어서 살아있는 우리 모든 믿는 이들도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천국에 든 성인성녀들의 대열에 참여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히 찬미와 영광을 드릴 수 있기를 간구한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바라는 참된 구원, 천상 행복이다. 성모님께서도 우리 자녀들이 그 구원에 이르도록 간절한 바람으로 전구하시지만, 안타깝게도 너무도 많은 영혼들이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고 멸망의 길로 나아가고 있으니 성모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 마침 영광송(doxologia)

 

모든 감사기도는 삼위일체 찬송인 장엄 영광송으로 끝맺는다. 이는 독솔로지아(doxologia)라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즉 마침 영광송은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나눔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이다. 지금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목표하듯이, 지금부터, 그리고 영원히 모든 것의 귀결이신 성 삼위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바쳐 올리는 것이다.

 

▶ 아멘

 

좁은 의미로 ‘마침 영광송’을 받지만 넓은 의미로는 감사 기도 전체를 받는 환호로서 미사 중 가장 중요한 환호이다. ‘아멘’은 믿음의 표현이고, 성체성사에 대한 신비를 인정하는 것이어서, 지금까지의 모든 성찬 기도가 사제, 신자 모두가 공동의 기도로 바쳤음을 알리는 신앙의 일차적 표시이다. 성 예로니모가 이 ‘아멘’의 외침이 로마의 바실리카 성전에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졌노라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미사 때의 이 외침이 정말로 자신의 신앙고백임을 인식하여 힘 있게 증언하여야 할 것이다. 미사총지침은 ‘아멘’을 가급적이면 노래로 합송하기를 권장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9월호,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광주대교구 대치성당 주임)]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7)

 

 

6) 영성체

 

이제 성체를 모시는, 미사에서 가장 은혜로운 ‘영성체’에 대해 살펴볼 시간이다.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성체 성혈 축성과 전구를 드린 후 우리 신자들이 성체를 영할 시간에 임하게 되었으니 성모님께서도 주님이시자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몸을 영하려는 당신 자녀들의 모습을 보며 온 마음으로 흐뭇해하실 것이다.

 

영성체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주님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인격적으로 일치함을 의미한다. 영성체의 명칭인 ‘꼼무니오’(communio)라는 용어는 ‘공동참여’, ‘함께 나눔’ 등을 뜻하는 단어로서, 1고린 10, 16의 친교, 일치, 참여, 나눔 등의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코이노니아’를 번역한 말이지만, 단순히 일치나 친교의 의미를 넘어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그분과 온전한 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영성체 예식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기 위해 올바른 준비를 하고 그에 맞갖은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해 부당한 우리 자신에 대한 죄의 용서를 바라는 준비를 하고, 형제들과 화해하고 일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성체 예식은 준비예식(주님의 기도 ~ 영성체 전), 본 영성체 예식(동반 행렬, 영성체 노래가 따름), 감사 예식(영성체 후 기도)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준비예식

 

① 주님의 기도*

 

자비하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례로 예수님과 지체가 된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녀들이 되었다. 성모님께서는 영성체를 준비하는 우리가 당신 아들의 몸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먹게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그 한없는 사랑을 깊이 느끼고 무한한 감사와 효성의 마음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다는 다짐으로 성체를 모셔 드리기를 바라시며 함께 주님의 기도를 바치신다.

 

주님의 기도는 마태 6,9과 루카 11,2-4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로서, 초세기 때부터 ‘Oratio Dominica’(주님의 기도)라고 하였다.

 

‘주님의 기도’ 전반부에서는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후반부에서는 성체를 일용할 양식으로 구하고, 주님과 일치하기 위해 필요한 주님의 용서를 청하며, 그 전제 조건으로 형제와 화해하고, 성체를 모시기에 합당치 않는 죄의 유혹,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청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영성체 예식을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하는 기도이다.

 

†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마라.

네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마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너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우루과이의 한 작은 성당 벽에 쓰여 있는 ‘주님의 기도’에 관한 글>

 

▶ 부속기도(“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 ‘주님의 기도’의 연장 기도로 교회가 새로 만들어서 삽입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 전체의 주제인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며’라는 사상의 연장선에서 모든 악에서의 해방과 하느님의 다스림에 의한 평화를 간구하고, 죄의 사함과 시련에서의 보호를 청하며, 전 인류를 위한 기원으로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희망의 기도를 바친다. 성모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임을 잊지 않고, 그래서 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재림하실 주님을 흠 없이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준비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② 평화의 예식

 

여기서 나누는 평화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수난과 부활로 완성하신 구원에서 흘러나오는 평화,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로서, 교회는 자신과 인류 가족의 평화와 일치를 간청하며, 신자들은 교회와 일치하고 서로의 사랑을 표시하는 것을 뜻한다.

 

▶ 평화의 기도 : 성자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로서, 비록 우리의 죄는 많고 크지만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교회가 분열과 온갖 어려움에 넘어지지 않고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게 해 주십사고 청하는 기도이다.

 

▶ 평화의 인사 : 영성체를 준비하기 위해 모든 이와의 화해, 사랑의 표시를 의미한다. 옛날에는 평화의 인사가 ‘신자들의 기도’라고 하는 공동기원 다음에 행하여졌다. 평화의 인사는 로마서 16장16절이나 베드로 전서 5장14절에 나오는 ‘사랑의 입맞춤’이란 사상에서 유래한다. 유스티노와 히뽈리토에 의하면, 그것은 말씀의 전례를 끝맺는 ‘기도의 봉인’(Signaculum orationis)이며, 성찬 전례에 들어가기 전에 신자들만이 서로 교환한 인사였다고 한다. 이 평화의 인사가 영성체 전의 순서로 옮겨진 것은 7세기경 그레고리오 1세 교황에 의해서이다.

 

평화의 인사대로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평화이시니, 영성체로써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마음과 심령에 풍성히 받도록 축복하며 인사를 나누자.

 

③ 빵을 쪼개는 예식

 

▶ 빵(성체)을 쪼갬 : 미사를 표현하는 명칭(Fractio panis)으로 불릴 만큼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당시 유다인 관습에 따라 하나의 큰 빵을 나누어 먹기 위해 행하신 준비 행위로서, ‘쪼개짐’은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며, 그리스도처럼 우리 자신도 다른 이들을 위해 쪼개어져야 한다는 희생과 사랑의 소명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우리가 영하는 것은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우리가 한 몸(일치)을 이루도록 초대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인 빵을 나누기 때문”(1고린 10,17)이다.

 

▶ 빵을 성혈에 섞음 : 원래는 단순한 식사 관습이었으나 후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를 혼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우리도 참여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 하느님의 어린양 : 하느님의 어린양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새 계약의 어린양이심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속량되었습니다.”(1베드 1,18-19)

 

미사 중에 빵을 쪼갤 때 주례자나 성가대가 신자들과 후렴식으로 노래하는 호칭 기도 형식의 기도이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원 다음 마지막 기원에서 종결 문장이 “평화를 주소서”로 바뀌는데, 이것은 성체성사가 마음과 영혼에 죄의 용서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새 파스카의 기념임을 거듭 강조한다.

 

* 주님의 기도 ‘주님의 기도’는 2세기경에 모든 세례 받은 신자가 하루에 적어도 3번 바치는 공적 기도로 부과되었으며, 미사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은 4세기경이다. ‘주님의 기도’ 안에 들어 있는 몇 가지 청원은 성찬례와 밀접한 관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부분에 대해 교부시대에는 이 양식을 성찬의 음식으로 해석하였고, 하느님과 형제들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에 따르면 영성체를 하기 위한 필요한 조처로 이해되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0월호,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광주대교구 대치성당 주임)]

 

 

[성모님 마음으로 전례를] 미사 전례의 각 단계 이해 (8)

 

 

(2) 영성체 예식

 

▶ 영성체의 자세

 

성체를 합당하게 받아 모시기 위한 준비 예식이 모두 끝나면 영성체 예식의 본 부분인 사제와 신자들의 영성체가 시작된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한 선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몸과 피를 지금 우리 손과 입을 통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 안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순간인가! 부족하고 합당하지 못한 우리가 감히 하느님을 빵의 모습으로,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모셔 들이는 것이다.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성체와 성혈을 영한다면 우리는 그 황홀함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인 생명의 빵과 구원의 피에 대해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58)

 

하느님의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끝없이 사랑하셨기에 밀떡, 빵 속에 들어가시어 우리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하셨다. ‘구원’이란 단적으로 말해서 하느님과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에 영원히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하느님과의 온전한 합일, 완전한 친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약속이며 우리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희망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지상에서부터 하느님과의 합일, 지극한 친교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셨다. 그것이 영성체이다. 우리는 영성체로써 하느님이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셔 들이면서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성체로써 지상에서부터 최상의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그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또한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심으로써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몸을 먹는 사람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산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며, 주님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다.성모님은 우리가 건성으로 성체를 영하러 나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신다. 더욱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성체를 모시기를 갈망하지 않고 너무 쉽게 미사에 빠지는 것을 보시며 몹시도 슬퍼해하신다. 파찌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이렇게 호소한다.

 

“하느님을 받아 모실 때 이 세상에 하느님과 여러분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하느님 안에 완전히 의탁하십시오!” “영성체의 시간이 우리 생애에서 가장 귀중하다. 그 시간은 우리 편에서는 하느님을 대하는 데 가장 적합한 시간이며, 하느님 편에서는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데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도 영성체에 대해 우리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핀다.

 

“영성체에서 너의 관심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더욱 깊고 강하게 하고, 영성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오직 사랑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분을 받아 모신다면 너의 목포는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꿰뚫고, 당신을 믿는 사람들과 몸과 마음으로 가장 친밀하게 일치하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음식으로 낮추신 구세주의 사랑과 자비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 영성체 후 개인기도(감사 침묵기도)

 

영성체가 끝나고 성작과 성반을 닦은 다음 사제는 주례석에 앉아 신자들과 함께 얼마동안 거룩한 침묵 가운데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이때의 침묵은 마음속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도하는 침묵으로서, 모든 이가 잠깐 영성체 및 미사 전체의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 안에 오신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이다.(※미사 중에 몇 차례의 침묵시간이 있지만 그 위치나 의미로 보아 영성체 후의 침묵시간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침묵을 생략하거나 지나치게 짧게 하거나 묵상 안내, 악기 연주 등으로 묵상을 방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영성체 후에 각자 자신 안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사랑을 다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성체로서 우리 안에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갈망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곳에 오는 거의 모두가 내게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다. 사랑으로 나는 죽었고 또한 그 사랑으로 나는 부활했다. 그 후로 사랑으로 나는 너희 한 명 한 명을 기다린다. 그러나 너희는 내게 너희의 사랑이 필요하고 너희의 사랑에 목마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영혼을 위한 이 장엄하고 극히 본질적이고 의미심장한 순간에 내가 ‘사랑을 구걸하는 자’라는 것을 기억하여라.”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청하고 구걸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주님께 사랑을 드리려 하지 않는다. 더욱 기막힌 것은, 사랑 중의 사랑이신 분, 영원한 봉헌으로 당신 자신을 주신 유일한 사랑이신 분을 만나러 가는 것을 피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영성체를 기피하는 이들에게 성 베드로 줄리앙 에이마르는 이렇게 힘주어 가르친다. “당신이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해지기 위해서 영성체를 해야 한다!” 거룩하게 성체를 모셔 들여야 하겠지만 더욱 거룩해지기 위해서도 성체를 자주 모셔야 한다.

 

 

라. 마침 예식(강복 및 파견)

 

영성체 후 미사의 ‘마침 예식’이 있는데, 이 예식은 주례 사제가 신자들에게 집회를 마치는 인사를 한 다음 그들을 강복하면서 세상에 파견하고 미사 전체를 마감하는 단순한 예식이다. 이때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파견사를 하는데, 이 파견으로 교우들을 헤쳐 보내어, 각자가 자신의 일터로 돌아가 주님을 찬미하며 맡은 임무에 충실한 가운데 복음화에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

 

사제가 마침 강복을 주기 위해 제단에 서면 거룩하신 동정녀,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집중해서 강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사제가 무엇을 하는지 주의해서 보자. 이 강복은 우리가 사제의 손에서 받는 마지막 강복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축성된 손이 우리에게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의 이름으로 강복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이 우리 일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존경과 흠숭하는 마음으로 십자성호를 그으며 강복을 받도록 하자.

 

▶ 파견 받은 자의 삶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가 특별히 거룩한 성체성사의 신비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성체성사의 해’(2004년 10월~2005년 10월)를 선포하고,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이하, 교서)를 발표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교서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신앙은 증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했으며, 이 교서가 단순히 성체성사 거행을 강조하고 성체성사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특히 평화 건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를 강조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례 정신의 기본인 ‘믿는 규범(Lex credendi)을 기도하고(Lex orandi), 기도한 바를 생활해야 한다(Lex vivendi)’는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교서라 하겠다.

 

과연 올바르게 거행된 성체성사(미사성제)라면 그것은 당연히 우리로 하여금 삶의 성체성사를 거행하도록 재촉한다. 미사성제를 거행하면서 말씀으로 양성되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양육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활로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나누어지고 그리스도의 피가 되어 이웃을 위해 희생하도록 파견되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미사에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소명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1월호,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광주대교구 대치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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