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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지혜의 열매인 분별)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18 조회수1,172 추천수4 반대(0) 신고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

지혜의 열매인 분별

+ 찬미예수님!

오늘 강론 후 6명 아이들이

첫 영성체 예식을 할 겁니다.

준비들 잘 했어요?

궁금하죠? 예수님 맛이 어떨지?

그런데 맛없어.

달지도 않고 맛없어요.

예수님은 맛으로 먹나요?

그럼 뭐로 먹어요?

취미로? 믿음으로 먹어야죠.

어릴 때 엄마 손에 뺏어 먹으려고

했던 것을 오늘 드디어

내가 그 맛을 보는구나!

중국의 북송 시대에 큰 학자

사마광이란 분이 있었어요.

당대에 사마광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을까 할 만큼 북송 시대의

제일 큰 학자죠.

이 사마광의 일화는 많은데,

사마광이 7살 때 동네에서

같이 놀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중국에는 사람 키보다

더 큰 항아리들이 많아요.

애들이 항아리 근처에서 놀다가

아이 하나가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죠.

우왕좌왕, 바가지로 안에 있는

물을 푸려고만 했지요.

그때 어린 사마광이

큰 돌멩이를 가져 오더니

한 번에 항아리를 깨버려요.

물과 아이가 한 번에 빠져나왔겠죠.

어른들도 생각을 못 했는데,

그 조그만 아이가 간단히 해결한 거죠.

동네 사람들이

이 아이는 큰 나무가 되겠구나!

어떻게 이렇게 지혜로울까?’

그때 항아리를 깨서 친구를

구한 것 때문에 사자성어,

파옹구우(破甕求友)가 생겼죠.

오늘 복음의 핵심은 지혜입니다.

지혜의 열매는 분별입니다.

오늘 두 여인이 나타나요.

예수님을 맞이하는 두 여인,

마르타와 마리아.

이 두 여인의 집에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셨을 때 하는

행동은 전혀 다릅니다.

오늘 지혜의 열매인 분별을

어떻게 가지고 살아야 되는가를

같이 묵상하도록 합시다.

오늘 긴 복음은 아니었지만,

오늘 복음을 다시 한 번

그림을 그려봅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 어느 마르타, 마리아,

나자로집에 들르십니다.

집은 두 종류가 있지요.

편한 집과 불편한 집.

편한 집은 비록 다 쓰러져가는

집이라고 하더라도 따뜻한 게 나와요.

그리고 평화가 있고 거기 사는

식구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있어요.

그런 집은 사제가 오래 머물고 싶어요.

사제가 오래 머물고 싶은 집은

하느님이 오래 머물고 싶은 집이라고

봐도 맞을 것입니다.

불편한 집이 있죠. 으리으리한

대저택이라 하더라도 차가와요.

가족들의 얼굴이 교만에 가득 차 있고,

네 탓, 네 탓이라고 서로 손가락질해요.

우리 서운동 성당에 사제가 들어가서

오랫동안 쉬고 싶은 집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많이 있겠죠.

지금 2년 살았지만, 불행하게

두 집밖에 못 들어가 봤어요.

물론 축성하러 여러 집을 가봤지만,

신부님. 된장찌개 끓였으니

함께 식사하세요.’

신부님 오셔서 편안하게 오셔서

약주 한 잔 하고 가시죠.’

이렇게 한 집은 딱 두 집뿐이었어요.

앞으로 2년 남았으니까

두 집 더해 네 집은 하고

갈 거라고 희망을 가져 봅니다.

사제 초대하기가

엄청 부담스러운가 봐요?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은 미식가일 것 같아

함부로 초대하기 어렵습니다.’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참 먹는 것

촌스럽거든요.

된장찌개, 김칫국 하나 있으면

일 년 열두 달 아무리 소리

안 하고 잘 먹습니다.

아무튼 마르타, 마리아, 나자로는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했던

분들이었음은 분명해요.

나자로가 죽었을 때 그렇게 슬피 우셨고

다시 살게 하시잖아요?

아마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날은

예수님이 너무 피곤하여 몇 시간만이라도

혼자 쉬고 싶으셨던 날일 겁니다.

밖에서 사람한테 시달리고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은

집에 오면 말수가 적다해요.

TV에서는 사람들을 웃기지만

집에서는 말 한마디

안 하는 개그맨들이 많대요.

이해가 가는 얘기죠.

저도 피정에 많은 얘기를 하고 오면

며칠은 사제관서 말 한마디 하기 싫어요.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마르타는

알아채지 못했던 겁니다.

그저 오시니 반갑고 행복해서

대접해드릴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부산을 떱니다.

자기 딴에는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고 있었죠.

이러한 친절은 예수님이

원하는 친절이 아니었죠.

마르타는 자기 위주로

친절을 베풉니다.

?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당연히 분별을 못 했죠.

예수님이 집에 오셨는데,

지금 이 순간에 음식이 필요한 건지,

쉼이 필요하셨던 건지

마르타는 그런 지혜가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많은 경우에

자기 위주로 친절을 베풀고,

자기 위주로 사랑하려고 하고,

자기 위주로 봉사한다고 하고,

자기 위주로 남을 용서했다고

착각을 합니다.

자기 위주의 친절은 상대를

굉장히 부담스럽게 합니다.

나는 먹기 싫은데 먹으라고 하고

안 먹으면 굉장히 서운해 합니다.

자기위주로 친절을 베풀었을 때

상대편이 안 받아주면

상처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자기 위주의 자기 잣대의 친절은

오히려 안 하는 것만 못 했죠.

아무튼 마르타는 친절을 예수님께

자기 정성을 다하여 베풉니다.

음식 준비합니다.

그런데 자기 동생 마리아를 보니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공주인냥

우아하게 주님의 발치에 앉아

턱을 괴고 주님이 하시는 얘기를

듣고만 있지 않는가!

여러분이 그런 입장이라고 하면

그런 동생을 밉겠죠?.

참다못해 예수님한테 제 동생이 일을

저한테만 떠맡기는데 두시겠습니까?

저 좀 거들라고 얘기 좀 해 주세요.’

마르타는 100프로 예수님이 역성을

들어주실 줄 알고 그 말을 했어요.

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지치고

힘들어서 입맛, 밥맛,

혀 맛까지 다 떨어진 상태였고,

그냥 조용히 앉아서 대화하고

싶었던 그런 마음이었죠.

마르타의 역성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고 걱정을 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러니 그것 마리아에게서

빼앗지 말아라.’

이야기는 여기서 끊어집니다.

교회는 이천년 동안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 모습을 보며

많은 묵상을 합니다.

마르타를 활동하는 사람,

마리아는 기도하는 사람.

마르타를 전교하는 사람,

마리아는 관상하는 사람,

이렇게 얘기합니다.

교회는 마르타도 필요하고

마리아도 필요하고 두 사람의

모습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순서는 분명히 있습니다.

먼저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기도하는 인간이 된 후에,

마르타처럼 행동으로 보여야 될 겁니다.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기도가 밑바탕이 되어있지 않은

교회 활동은 오래 가지 못하고

끌려 다니며 체면 때문에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먼저 마리아처럼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듣고 묵상하면서

나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적셔져야만 마르타처럼 예수님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러시아의 어느 철학자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을 단 두 마디,

고독하면서 사회적인 인간으로

요약합니다.

고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

신과의 대화입니다.

고독하다는 것과 외롭다는 것은

다른 거죠.

외롭다는 것은 사람을 찾는 것이지만

고독은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같은 신앙인은

반드시 고독해야 합니다.

그 고독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 생각을 예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고독하기만 하면 안돼요.

동시에 사회적이어야 됩니다.

고독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그 영적 에너지를 갖고 세상에 나가

복음도 전하고 봉사도 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독히

고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주변 사람들과 친교

(community)를 못합니다.

반쪽짜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만 뜨면

사회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지랖 넓게 안 가는 데 없지만

혼자 있으면 그 시간을

주체를 못 합니다.

현대인들은 지금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혼자 골방에서 혼자만 살아가든지,

그저 밖으로만 떠돌든지 합니다.

고독을 통해 사회적 에너지를

충분히 받고 그 긍정 에너지를

사회에 쏟아야 됩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 가지고 계실 겁니다.

그 해결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내 곁에 머물러라. 세상 방법

쓰기 전에 먼저 기도해라.’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걱정하는 것을

기도라고 착각을 합니다.

걱정은 백날 해봐야 해결되는 것

없습니다. 마귀만 들끓습니다.

그러나 정말 깨어서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해결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마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걱정하는 것을

기도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기도까지 가 보지도 못하고

십자가 앞에서 걱정만 하다가 끝납니다.

인간은 기도로서 강해지고

하느님은 기도로서 약해지십니다.

우리 인간들은 기도할 때마다

담대해지고 영적으로 배짱이 생기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을 때마다

안 들어주고는 못 배길 정도로

약해지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시대는 분별의 시대입니다.

어떤 때는 마르타처럼

행동해야 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마리아처럼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발치에 머물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이 어느 순간이냐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분별의 몫입니다.

사제도 기도하지 않고

많은 사목활동을 한다면 사제의

마음속에 과연 행복이 있을까?

순서는 분명하다고 그랬죠?

봉사가 먼저예요,

기도가 먼저예요? 기도

2000년 동안, 또 앞으로도

순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순서가 바뀌면 착각이 들어요.

오늘 세 시간 봉사했으니

세 시간 기도한 것과 똑같아.

오늘 기도 안 해도 되겠지?’,

이런 맘이 들기 시작하면

지옥 가는 지름길이에요.

절대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아무리 교회를 위해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일했다 해도,

졸리더라도 하느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는 우리들이

다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먼저 마리아가 우선이고

마르타가 다음입니다.

저는 능력이 부족해 둘 중에

하나밖에 못 합니다.

그러면 어느 것 선택해야 됩니까?’

백 번 물으면 백 번 대답합니다.

봉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기도부터 하세요.

기도하지 않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분란을 일으킵니다.

반드시 공동체를 깨버립니다.

그러나 기도한 다음에

봉사하는 사람은 하는 일이

서툴다 해도 본인도 얼굴이 밝고,

일손은 느리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한테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있어요.

기도하고 봉사하는 신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2019년 연중 제16주일 (7/21)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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