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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 (이사50,4-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4-05 조회수1,435 추천수0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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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 (이사50,4-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 (7)

 

이사야서 50장 6절은 주님의 종이 당할 극심한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는 사실을 예언한다.

그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로 견뎌낸 것은 그 고통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통이요그 고통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무엇보다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인 이사야서 52장 13~53장 12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예언되며그 고난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아픔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굴욕과 치욕감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고난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옷을 벗긴 상태에서 채찍으로 과격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며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인격을 철저히 무시하는 너무나도 크나큰 굴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신명25,9; 2사무10,4; 느헤 13,25; 예례7,29; 마태26,67; 요한18,22).

그러나 주님의 종은 그 고난을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성취하는 통로로 여기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를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본문에서 '나를 매질하는 자들에게'에 해당하는 '레막킴'(lemakim)의 원형 '나카'(nakah)는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는 그가 맞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께 맞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예언된다.

 

그러나 그는 무죄하면서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으며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등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실로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의 모진 채찍질을 묵묵히 참음으로써 이 예언을 성취하셨다(마태26,27; 27,26; 요한19,1).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암몬 임금 하눈은 그의 죽은 아버지께 조의를 표하고자 온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며 턱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린 일이 있었다(2사무10,4).

이것은 극심한 모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그래서 그 신하들은 다윗의 지시에 따라 턱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예리코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것즉 장식용이 아니라 남성의 인격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깎는다든지 뽑아 버리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깔아 뭉개버린다는 뜻이었다아울러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형벌(느헤13,25)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치욕적인 일이처럼 무고한 모독과 형벌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즉 자기 턱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뺨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는 가르침 (마태5,39)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모욕'으로 번역된 '켈림무트'(kelimmuth)는 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통해 주님의 종이 느끼는 인격적 상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26,67).

또한 '수모'로 번역된 '로크'(loq)는 구약에서 본문과 욥기 30장 10절 두 곳에서만 사용된 매우 희소한 단어인데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침뱉음을 뜻하고얼굴에 침뱉음을 당한다는 것은 턱수염이 뽑히는 것보다 더 드문 일이고 더 굴욕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은 그 굴욕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얼굴을 가리우지 않았다이것은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7)

 

앞의 이사야서 50장 4~6절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주님의 종의 고난과 고난을 받는 중에도 전적으로 참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다이제 이사야서 50장 5~9절 까지는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종이 승리할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노래한다.

 

먼저 이사야서 50장 7절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밝힌다그것은 자기를 종으로 세우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을 돕는다는 확신과 그 하느님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 것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극심한 수치와 모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은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감당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절은 원문상 접속사 '와우'(wau; because; for 혹은 but)로 시작하고 있다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앞절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주님의 종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그 고난을 자기 혼자 당하는 것도 아니며그 고난 때문에 자신이 절망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본절을 '와우접속사로 시작한다그리고 그 진정한 배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해 주시는 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도와 주시니'에 해당하는 '야아자르'(yaazar)의 원형 '아자르' (azar)는 이사야서 50장 4절에서 주님의 종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하다주님의 종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올바른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하느님을 통해 고난의 때에 도움을 받는다.

여기서 '아자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종의 사명 전반을 지지하며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이에 이어지는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구절은 인과(因果)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al ken; therefore)이란 표현으로 시작한다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신 결과그가 수치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를 앎으로써 고난과 모욕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본문 역시 앞 문장과 같이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으로 시작한다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시는 결과주님의 종이 자기 얼굴을 차돌같이 굳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든다'에 해당하는 '사므티'(samthi)는 '두다','되게 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sum)의 능동 완료형 1인칭 단수로서 본문의 행동의 주체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는 것이다.

 

'차돌'로 번역된 '할라미쉬'(hallamysh; flint)는 '아주 단단한 물건', '단단한 돌','부싯돌','바위'의 뜻이 있는데여기서는 매우 단단한 돌을 말한다(신명8,15; 시편114,8).

따라서 본문은 낯이 매우 두꺼운 것을 의미한다우리말에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낯이 두껍다고 하는데이것은 주님의 종이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치욕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처지를 전혀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이런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본문은 이중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는 주님의 종이 그런 치욕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결단코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그가 비록 죄인들이 당하는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마지막 날에는 결코 심판에 처해지지 않고자신이 의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을 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수치를 당하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보쉬'(ebosh; shall be ashamed)의 중의성 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형'뽀쉬'(bosh)는 수치를 느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창세2,25) 최후 심판에서 단죄되어 치욕스런 상태로 떨어진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창세45,16).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고소를 당해 수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마태26,65). 그러나 그들이 단죄한 그 신성 모독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 (요한1,1~3; 필리2,6)을 깨달았다면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단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위치로 끌어 올려 주셨다(필리2,10). 이 사실이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확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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