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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9.1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17 조회수1,241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9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제1독서 1티모 3,1-13

사랑하는 그대여,

 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3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4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5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 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8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9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10 또 그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나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경우에만 봉사직을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11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12 봉사자들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기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3 사실 봉사직을 훌륭히 수

행하는 이들은 좋은 명성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복음 루카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며칠 전, 비 온 다음 날 새벽에

아침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끌고 도로를 나갔습니다.

밤새 비가 많이 왔는지 이곳저곳에

빗물이 고여있었습니다.

그래서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앞으로

 가다가도 빗물이 고여있는 곳을

 피해서 가거나 아니면 물이

튀지 않도록 속도를 줄여서

고여있는 곳을 조심히 건넜습니다.

물이 튀어서 옷과 자전거가

지저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한 대의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가면서

고인 물이 물벼락처럼 제게

날아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습니다.

옷도 엉망이 되었고, 자전거도 개흙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지저분함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 제 얼굴도 엉망진창이 되었지요.
짜증과 함께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뒤 저는 신나게 자전거를

 탈 수가 있었습니다. 어차피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니 빗물이 고여있어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오히려 물을

 튀기면서 지나는 재미를 즐기면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워낙 엉망진창

몸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는 않더군요.
사실 우리는 피하려고만 하면서

오히려 더 힘든 순간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냥 즐기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눈치를 보면서 조심에 조심을

더할 뿐입니다. 이 과정 안에서

스스로의 힘듦만 가중됩니다.

즐긴다는 것은 어쩌면 내 몸을 완전히

내어주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습니다.

주님께 우리를 완전히 맡기면 편안함과

함께 큰 기쁨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보다는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지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데 더 큰 관심이

 있기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한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과부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찬양하고

 감사를 드렸던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께 푹 안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이 순간을 즐길 수가 있으며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닌 세상에 집중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못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작은 꿈들이 하나하나 모여

커다란 나를 만든다.

(나인이라는 고을의 과부

외아들을 다시 살리신 예수님)


그밖에 조금 더

한 학생이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성공한 사업가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학생은 사업가에게 성공의 비밀이

과연 뭐냐고 물었지요.

사업가는 한동안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한 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밖에 조금 더.”
“나는 어린 시절에 보통 사람과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의 차이가

그 한마디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최고인 사람들은 자기 몫을 다하고

 ‘그 밖에 조금 더’했다는 사실을.”
지치고 힘들었을 때,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 ‘

그 밖에 조금 더’하면 어떨까요?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때 ‘

그 밖에 조금 더’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누군가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에도

 ‘그 밖에 조금 더’ 하면 어떨까요?
‘그 밖에 조금 더’는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푹 안기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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