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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주일] 와서 보아라. (요한 1,35-4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17 조회수1,25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월 17일 주일

[연중 제2주일와서 보아라. (요한 1,35-42)

   

1독서 <주님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3,3-10.19)

그 무렵 사무엘이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그가 .” 하고 대답하고는,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돌아가 자라.” 하였다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그러나 엘리는 내 아들아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돌아가 자라.” 하였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세 번째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자그는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지요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아이를 부르고 계시는 줄 알아차리고,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말씀하십시오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10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아까처럼 사무엘아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화답송 시편 40(39),2ㄱㄴ과 4ㄱㄴ.7-8ㄱㄴ.8-9.10(◎ 8과 9)

◎ 주님보소서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주님께 바라고 또 바랐더니 나를 굽어보셨네새로운 노래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내 입에 담아 주셨네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제가 왔나이다.”

○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주 하느님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보소서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주님당신은 아시나이다

 

2독서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1코린 6,13-15.17-20)

형제 여러분, 13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그리고 몸을 위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4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우리도 당신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모릅니까?

17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18 불륜을 멀리하십시오사람이 짓는 다른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이루어지지만불륜을 저지르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복음<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묵었다.>(요한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연중 제2주일 제1독서(1사무3,3ㄴ~10.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19)

 

오늘의 독서 말씀인 사무엘 1서 3장 3(ㄴ)~10절과 19절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 우선 사무엘 1서 3장 1절(ㄴ)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한다.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다.'(1ㄴ)

 

주님께서 아론과 미르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내 말을 들어라. 너희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으면 나 주님이 환시 속에서 나 자신을 그에게 알리고 꿈 속에서 그에게 말 할 것이다.'(민수12,6)

따라서 사무엘 상권 3장 1절(ㄴ)의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실로'성전의 최고 책임자인 엘리 사제의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하여 잘 볼 수가 없었다(1사무3,2)는 표현은 단순히 물리적 육체적 노쇠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영적 분별력을 상실했음을 말한다.

사제 엘리가 영적으로 무감각하니까 주님께서 아무것도 보여 주시지도 않고 말씀 하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엘리의 아들들 마저 타락하고 부패하였고 (1사무2,11~17), 이스라엘 전체가 그러하였다.

 

이미 하느님의 사람을 통해서 엘리 사제의 죄악을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하신(1사무2,27~30) 주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대신할 새로운 인물을 준비하시고 부르신다(1사무2,35; 3,1.4).

주님께서 네 차례에 걸쳐 사무엘을 부르신다(1사무3,4.6.8.10).

오랫동안 침묵하신 주님께서 마침내 사무엘을 부르시고, 사무엘은 주님의 음성인 줄 모르고 엘리에게로 달려간다(1사무3,5~8),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1사무3,9ㄱ) 이라는 말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민수기 7장 8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모세는 주님과 말씀을 나누려고 만남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면, 두 커룹 사이에 있는 증언 궤에 놓은 속죄판 위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곤 하였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때때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음성으로 말씀하시면,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라고 엘리는 사무엘에게 말한다.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님의 믿음직한 예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사무3,19~20)

사무엘의 예언, 즉 주님께서 위탁하여 주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으로써 온 이스라엘이 주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한 말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것은 위로, 하늘로, 주님께로 올라갔다는 말인데, 주님께서 들어 주시고, 응답해 주시고, 추인해 주시고, 진실됨을 입증해 주셨다는 말이다(야고3,2참조).

이것은 바로 주님의 일꾼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을 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동행해 주시며, 그를 통해 주님께서 역사(役事)해 주실 때에 진정한 봉사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심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창세기의 요셉 보면, 고난 중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복 된 자가 되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므로, 그는 모든 일을 잘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기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서 살았다. 그 주인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그가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그의 손을 통해서 잘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시면서 그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전옥의 눈에 들게 해 주셨다~

 전옥은 요셉의 손에 맡긴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며, 그가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잘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창세39,2~3.21.23)

 

사실 주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심은 그의 믿음과 경건(거룩)과 의로움과 관계가 있다(시편5,4~6; 15,1~2).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엘리를 버리시고 징벌하시고, 사무엘과 함께 한 이유이다.

하나는 영적인 무지와 죄 가운데 있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을 경외하고 의로움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연중 제2주일복음(요한1,35-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39)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인 안드레아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와서 보아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대의 랍비들이 교훈을 할 때에 자주 사용하고, 탈무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어투로서 권위있는 이가 제자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상투적 어법 이상의 뜻이 들어 있다.

 

'와서 보아라'에 해당하는 '에르케스테 카이 옵세스테'(erchesthe kai opsesthe; come and see; come and you will see)에서 우리는 두 동사의 시제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와서'로 번역된 '에르케스테'(erchesthe; come)는 원형 '에르코마이'(erchomai)의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명령법은 명령이나 금지만을 나타내지 않고 요청을 나타내거나(마태6,12), 명령인 동시에 허락 혹은 찬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안드레아와 요한에게 '에르케스테'(erchesthe)라고 하신 것은 명령인 동시에 그들의 요청에 대한 허락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당신을 찾는 이들을 피해서 숨지 않으시며, 당신에게로 오는 이들을 거절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지금 곧 오라'는 뜻으로 현재 명령형을 사용하신 것이다.

 

또한 '보아라'로 번역된 '옵세스테'(opsesthe; see)는 '호라오'(horao)의 미래형이다.

희랍어에서 미래 시제는 미래에 있어서의 계속적 동작이나 반복적 동작을 나타낸다.

그리고 '호라오'(horao)가 단순히 '보다'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경험하다'(experience)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지각하다'(perceive)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대답이 가지고 있는 뜻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 안에 있는 영적 생명과 위대한 권능의 비밀을  알고 싶어 했음을 아시고,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앞으로 계속적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이 경험하게 될 풍성한 영적 축복을 '호라오'(horao)라는 단어에 담아서 전달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즉시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날 예수님과 함꼐 거기서 묵었다.

 '그분과 함께 묵었다'에 해당하는 '카이 파르 아우토 에메이난'(kai par auto emeinan; and abode with him; and spent with him)에서, 전치사 '파라'<para; 모음 앞에서는 '파르'(par)>가 여기처럼 여격을 지배하게 되면 공간적 접근성을 나타내어 '곁에'(by), '가까이'(near), '함께'(with)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에서 충분한 소통을 하여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로 쓰였다.

 당시 예수님께서 누구의 집에 머무르고 계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안드레아와 요한이 추구한 것은 화려한 궁궐에서의 연회와 같은 속 된 것들이 아니었기에, 그분께서 계신 곳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든지 예수님과 함께 머물거나(stayed) 함께 시간을 보내는(spent that day) 사람만이 제자로서의 도리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요한15,1-5; 필리4,13).

예수님에게서 물질적인 부나 화려함, 명예나 권력 같은 것들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고난의 길을 추구하시는 그분과 함께 머무를 수가 없다.

사도 바오로 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죽어야만(갈라2,20) 그분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기꺼이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오후 네시쯤'은 유대 시간 계산법을 따른 것이고, 로마 시간 계산법을 따르면 오전10시를 가리킨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자신들의 인생을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기에, 그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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