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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체로 모시는 예수님이 우리 인질이 되지 않게 하려면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21 조회수2,022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다해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성체로 모시는 예수님이 우리 인질이 되지 않게 하려면>

  

 

 

복음: 마태오 21,31-43.45-46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겐 자부로의 작품 사육은 한 명의 흑인 병사를 짐승처럼 사육하는 일에 종사하는 소년이 체험한 비극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미국과 일본이 한창 교전할 당시 한 일본 소년은 도시에서 떨어진 산 마을의 공동 창고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에 커다란 비행기가 떨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곧 수색에 나섰고, 저녁 무렵 비행복을 입은 흑인 병사 한 명을 끌고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멧돼지 덫으로 쓰이는 쇠사슬로 흑인 병사의 양쪽 발목을 묶고 지하 창고에 가두고는 짐승처럼 사육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멧돼지 덫에 묶여진 흑인 병사의 살갗이 벗겨져 염증이 생긴 것을 보고 덫을 풀어 주었습니다. 소년의 도움으로 흑인 병사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청에서 흑인 병사를 끌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흑인 병사는 지레 겁을 먹고 당황하여 자기에게 자유를 주고 먹을 것을 주었던 소년을 인질로 잡아서 난동을 벌입니다. 결국 흑인 병사는 소년의 아버지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게 됩니다.

 

 

아무리 생명이 소중하다고 해도 자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람을 어떻게 살려둘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인류가 죄의 족쇄에 채워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자칫 예수님을 인질로 잡고 아버지께 무언가를 얻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임금은 자신의 하인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자신이 가진 재산과 모든 능력을 투자하여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팠으며 탑까지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 자신이 경영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신이 믿는 종들에게 그 사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맡기고 당신은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다만 수입의 일부를 당신에게만 주면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하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사업체에 군침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사업체를 일구느라 지쳐있는 주인이 아무 힘도 없이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출 중의 일부를 주님께 바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모든 열매들 중의 일부인 선악과를 바치기를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임금의 충실한 동업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그 소출 중의 일부를 받아오라고 보낸 임금의 종들에게까지 못된 짓을 하고 그 임금의 외아들은 죽였습니다. 아버지를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아들을 존중할 리가 없습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우리들도 어쩌면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수입이 주님께서 주신 생명과 능력, 시간과 배려덕분임을 고백하는 도구입니다. 구약에서는 물론 신약의 예수님도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치 내 능력으로, 내 고생으로 나의 수입이 발생한 것처럼 내가 가진 재산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이것으로부터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의 회복은 십일조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봉헌하라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 덕분임을 작은 봉헌을 통해 인정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예수님도 같은 주인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주인의 자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반면 십일조를 통해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도와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 안에 당신 아드님이 사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당신 아드님의 것이 번창하도록 도와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아이가 소중하게 키우던 물고기가 시름시름 죽어갈 때 그것을 부모에게 주면 부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살려내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 아드님을 보내주시고 아드님을 통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축복이 넘치게 하십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에 신약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의 자세가 왜 십일조로 끝나야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사 안에서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먼저 빵과 포도주가 봉헌되어야합니다. 이는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축복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의 아드님임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니 우리가 모시는 아드님도 주님으로 인정할 것이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은 아드님을 통해 그 사람에게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대사제 멜키체덱이 하느님께 빵과 포도주를 봉헌할 때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신약인 성체성혈의 신비가 이루어질 재료를 봉헌하는 것이 곧 십일조인 것입니다. 사제가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는 신자들이 자신들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주인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가셔도 여전히 인질로밖에 머무실 수 없으십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구약의 십일조 봉헌이 진정 신약의 성체성혈의 축복으로 오는지, 오지 않는지는 시험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십일조를 봉헌하는 이에게 반드시 그만한 축복을 주시겠다는 의지표명이십니다. 십일조를 바치면 더 부족해질 것 같아서 봉헌하지 못한다면 주님 말씀과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평생 적어도 일 년 정도는 십일조로 주님을 시험해봅시다. 그래도 안 되면 이전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개신교는 거의 하고 있는 이 십일조를 가톨릭신자들이 1년도 해보지 않는다면 참으로 창피한 일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계산대로 산다면야 어디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자신의 계산을 믿지 않고 반대로 해볼 때 참으로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더 큰 믿음을 선물로 받게 만듭니다. 오늘도 마지막으로 주님의 이 간절한 외침을 듣고 새로운 결심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나 주님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희는 조상 때부터 나의 규정에서 벗어나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하면 저희가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고 말한다. 사람이 하느님을 약탈할 수 있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약탈하면서 저희가 어떻게 당신을 약탈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십일조와 예물이 아니냐! 너희 온 백성이 나를 약탈하고 있으니 저주를 받으리라. 너희는 십일조를 모두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양식이 넉넉하게 하여라. 그러고 나서 나를 시험해 보아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하늘의 창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넘치도록 쏟아 붓지 않나 보아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 떼를 꾸짖으리라. 그래서 그것들이 너희 땅의 소출을 망치지 않고 너희 밭의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면 모든 민족들이 너희를 행복하다고 하리니 바로 너희가 기쁨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말라 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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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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