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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심판주의 고뇌를 묵상하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15 조회수1,36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올해 위령성월을 맞이하여 경남 고성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서 위령성월 합동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미사 집전은 교구장님께서 하셨지만 강론은 은퇴를 앞둔 신부님께서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신부님이십니다. 그때 강론을 하시는 중에 독특한 단어를 하나 사용하셨습니다. 일반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잘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심판주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언급하셨습니다. 사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심판주와 동의어는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의미는 동일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도 풍기는 이미지와 뉘앙스는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이게 언어가 가지고 있는 묘미입니다. 저는 그때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강론 내용은 별도로 하고 그때 심판주라는 이 말씀에 뭔가 꽃혔습니다. 다음에 이 단어를 가지고 뭔가 묵상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위령성월 달입니다. 바로 죽음을 많이 묵상하는 달입니다. 죽음 후에 우리에게 닥칠 심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제 올린 글에서 심판은 하느님이 하신다고 보기보다는 자신 속에 있는 양심과 자신이 세상에 뿌린 삶의 궤적이 심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은 정반대로 한번 묵상해보았습니다. 바로 심판주이신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주인으로서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한 기업의 자산구조와 재무구조를 알고 또 기업의 견실 정도를 알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때 사용하는 데 쓰이는 도구가 기업의 재무재표입니다. 대차대조를 통해서 기업의 재무상태를 진단해서 최종적으로 기업의 재무상태를 파악할 수 있고 이것을 토대로 기업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평범한 보통의 신앙인이 한평생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했을 때 마지막에 하느님 대전에서 심판을 받을 때 하느님께서 선택의 경우의 수가 양단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결정을 내리실까를 고민해본다면 그 고민이 어떤 것일까를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사실 다르게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게 고민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머리는 인간의 머리와 다르고 또 슈퍼 슈퍼 컴퓨터보다 더 우수하기 때문에 그냥 단박에 어쩌면 딱 보자마자 한 사람의 일생에 대한 평가가 계산되어 바로 마태오복음 최후의 심판처럼 판결하실 수 있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저는 이런 기계적인 생각을 벗어나서 한번 정서적인 감정으로 이 부분을 들여보고자 합니다. 이런 식으로 판결하면 너무나도 매정한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그래서 심판주의 고뇌라고 제가 제목을 붙였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다보면 때로는 하느님의 마음처럼 넓고 넓은 마음으로 착하게 살 때도 있지만, 때로는 정말 옹졸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옹졸한 삶을 살 때도 있을 테고, 나약한 인간인지라 이기심에 눈이 멀어 정말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패륜범죄 같은 죄도 지을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패륜은 인간과 인간의 삶에서 아니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면서 하느님에 대한 패륜을 말합니다. 보통의 인간의 삶이 이러할진대 이런 삶을 두고 하느님께서 마지막에 심판주로서 판단할 때 심판주의 고뇌가 있을 겁니다. 시각을 좀 달리 생각한다면, 또 재미있게 표현한다면 심판주도 할 짓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상에서도 법은 사법부가 판단하지만 집행은 행정부에서 하고 그 집행의 최고 책임자는 법무부 장관이 합니다. 만약 사형을 집행한다고 하더라도 법무부 장관의 최종 승인이 있어야 합니다. 근데 보통 사람의 심리가 판사도 마찬가지이고 법무부 장관도 마찬가지이지만 자기 재임시절에 그런 걸 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게 일반적인 심리입니다.

 

왜냐하면 법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가능하면 자기 재임시절에 그런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은 심리가 다분히 깔려있어서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보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이런 입장을 바라본다면 정말 하느님도 하느님의 위치가 이만저만 고역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치 않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어떤 판결을 한다고 하더라도 판결하는 사람과 판결을 받는 사람의 이해관계는 남남인 관계임에도 이렇는데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이건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이건 보통 관계가 아니니 심판하실 때 그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세상 말에도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하고 아무리 속썩이는 자식이라도 핏줄이라는 것에 연연하는 게 인간의 마음이고 성경에서는 설령 자신을 낳은 부모가 포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그런 내용이 있기에 하느님의 마음이야 우리들 인간의 마음과 같겠습니까? 방금 전에 언급한 내용은 머릿속에는 어떤 표현으로 했는지 알겠는데  성경 내용을 잘 인용을 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내용은 이 내용입니다. 아마 이사야서에 나올 겁니다. 젓먹이라는 말과 함께 어디 나올 겁니다. 제가 할 짓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표현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꼭 부정적인 뜻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긍정적인 표현도 있습니다. 저는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했을 때의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어떻게 심판하실까를 나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제가 심판주가 아니기 때문에 별 실익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오늘 묵상하면서 제가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나중에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때 이런 고뇌를 하시더라도 가능하면 최대한 적게 할 수 있게 해드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 최대한 하느님 말씀대로 살 수만 있다면 그런 삶을 산 사람을 심판할 때 심판주께서 무슨 고민을 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살았다면 하느님께서는 너무나도 행복한 고민을 하실 겁니다. 왜냐하면 고민도 하지 않고 심판을 하게 되니 말입니다. 마지막까지도 하느님을 고민에 빠뜨리는 삶을 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될 것 같습니다. 억조창생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인간이 어떻게 상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그래도 한번 상상을 한다면 정말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하느님께서 심판주가 되시는 그 심정 정말 고역일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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