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일도

전날 오늘 다음날

2020년 6월 26일 금요일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녹)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독서기도

하느님, 날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나를 도우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알렐루야.
찬미가
I. 독서기도를 밤이나 새벽에 드리는 경우 :

새벽닭 울음소리 어둠헤치고
한밤의 두려움을 없애버리니
착하신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간절한 우리서원 바치나이다

만상이 침묵속에 잠겨버리어
죽음의 종말모습 보여주어도
주님은 사람들을 수호하시려
빛으로 임하시어 깨어계시네

예수여 우리모두 간구하오니
죄악의 깊은잠을 깨워주시고
한밤의 옥중에서 풀어주시며
생활의 동반자로 빛을주소서

성부와 성자성령 삼위일체여
그이름 무엇보다 감미로우며
우리게 생명과빛 평화주시니
언제나 크신영광 받으옵소서. 아멘.

II. 독서기도를 낮에 드리는 경우 :

만물의 창조주여 찾아오시어
성부의 밝은영광 드러내소서
행여나 크신은총 거두시려나
이마음 두려움에 떨리나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채워져
마음에 하느님을 깊이모시고
악마가 우리믿음 앗으려해도
속임수 당하는일 없게하소서

현세의 생활양식 따라가면서
세속의 모든활동 하고있어도
온갖죄 조심하여 피해가면서
당신의 모든계명 지키리이다

사랑의 임금이신 독생성자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드리세
위로자 성령께도 언제나항상
세세에 무궁토록 영광드리세. 아멘.
시편기도
후렴1하느님, 내 애틋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옵소서. 악인의 부르짖음 때문이외다.
시편 54(55),2-15. 17-24
배반한 친구를 책함
예수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싸이셨다(마르 14,33).

I

2 하느님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
애틋한 이 기도를 외면하지 마옵소서.

3 이 몸을 굽어보시어 응답하소서 *
근심으로 나는 초조하며 어지럽나이다.

4 원수의 아우성과 악인의 부르짖는 소리 때문이오니 *
그들은 나에게 불행을 들씌우며 분노로 이 몸을 들볶나이다.

5 내 마음은 속에서 뒤틀려지고 *
죽음의 공포가 내 위에 떨어지나이다.

6 무서움과 떨림이 나를 덮치고 *
전율이 이 몸을 휘감나이다.

7 나는 말하나이다 “비둘기처럼 깃을 지녔더라면 *
나는 날아가 쉴 수 있으련마는,

8 저 멀리 떠나가서 광에서 살련마는 +
9 재빨리 숨을 데 찾아 *
회리바람 매서운 바람을 피할 수 있으련마는.”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후렴1하느님, 내 애틋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옵소서. 악인의 부르짖음 때문이외다.
후렴2주께서 우리를 원수와 그들의 음모에서 구하셨도다.
시편 54(55),2-15. 17-24
배반한 친구를 책함
예수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싸이셨다(마르 14,33).

II

10 주여 저들의 말이 섞갈리어 따로 나게 하소서 *
폭행과 분쟁이 성안에 있음을 보옵나니.

11 그들은 밤낮으로 성 위를 빙빙 돌고 *
성안에는 비리와 압박이 있삽나이다.

12 그 안에 음모가 도사리고 있사오며 *
폭력과 사기는 그 광장을 떠나지 않나이다.

13 원수가 나를 모욕했다면 참아 주었을 것을 *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맞서 왔다면 비켜나 숨었을 것을,

14 그러나 너였도다 내 동배 내 동무 내 친구 +
15 정다웁게 서로 같이 사귀던 너 *
축제의 모임에서 주님의 집을 함께 거닐던 너였도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후렴2주께서 우리를 원수와 그들의 음모에서 구하셨도다.
후렴3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 드려라. 그분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시편 54(55),2-15. 17-24
배반한 친구를 책함
예수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싸이셨다(마르 14,33).

III

17 나만은 하느님께 부르짖으리니 *
주께서 나를 살려 주시리라.

18 저녁 아침 한낮에 내가 슬피 부르짖으면 *
당신이 내 소리를 들어주시리라.

19 들볶는 자에게서 내 영혼을 곱다랗게 빼내시리니 *
실상 하고많은 사람이 나를 거스르도다.

20 하느님 들으시고 저들을 짓부수시리라 *
영원으로부터 다스리시는 그분께서.

저들이 회개하지 않고 *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21 그들 누구나가 손을 친구에게 내뻗치고 *
언약을 깨뜨려 버리도다.

22 그 입은 버터보다 부드러워도 그 마음은 싸울 뿐 +
그 말은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
실상은 빼어 든 칼이로다.

23 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 드려라 +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 리 없으리라.

24 하느님 당신이 저들을 멸망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니 +
피를 즐기고 속이는 자들은 그 세월의 절반도 채우지 못할 것이나 *
나는 당신을 믿으리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후렴3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 드려라. 그분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아들아, 내 지혜를 마음에 새겨라.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 의한 독서 25,14-24. 28-39
다윗과 아비가일
그 무렵 14 이 일을 어떤 일꾼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알려 주었다. “다윗이 광야로부터 사람들을 보내어 우리 주인께 축수하면서 무엇을 좀 달라고 하자 주인께서 마구 쫓아 보내셨습니다. 15 그들은 우리를 조금도 괴롭히지 않고 매우 잘 대해 주었습니다. 들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우리는 새끼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았습니다. 16 그들은 우리가 양을 치는 동안 밤낮으로 우리를 성처럼 감싸주었습니다. 17 그러니 이제 헤아려 처신하지 않으면 우리 주인이나 온 집안이 정녕 화를 입을 것입니다. 주인 어른은 성급하신 분이라 말씀을 드릴 수도 없습니다.”

18 그리하여 아비가일은 떡 이백 개, 술 두 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밀 열 말, 건포도 백 뭉치, 말린 무화과 과자 이백 개를 서둘러 마련하여 나귀에 실었다. 19 그리고 자기 시종들에게 자기는 뒤따라 갈 터이니 앞서가라고 일렀다. 그러나 남편 나발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20 그는 나귀를 타고 산굽이를 돌아 내려가다가 부하를 거느리고 내려오고 있는 다윗과 마주치게 되었다. 21 다윗은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내가 광야에서 이자의 재산을 지켜 무엇 하나 손실이 나지 않게 해주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모처럼 잘해 주었더니 이렇게 악으로 갚는구나. 22 내가 내일 아침까지 사내 녀석들을 하나라도 남겨 둔다면 하느님께 무슨 벌이라도 받으리라.” 23 아비가일은 다윗을 보자 나귀에서 급히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였다. 24 그리고 다윗의 발 앞에 엎드린 채 애원하였다. 28 “이 계집의 말이 마음에 거슬리더라도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주께서 앞장서시는 싸움을 나리께서 싸우셨으니 주께서 나리의 집안을 정녕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나리께서는 한평생 어떤 재난도 겪지 않으실 것입니다. 29 나리를 쫓아다니며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나리의 주 하느님께서 나리 목숨을 보물처럼 감싸 주시고 그 대신 원수의 목숨은 팔매 돌처럼 팽개치실 것입니다. 30 주께서 약속하신 온갖 복된 일을 이루시어 나리를 이스라엘의 수령으로 세우실 터인데, 31 이런 실수를 해서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손수 원수를 갚느라고 공연히 피 흘리는 일은 없도록 하십시오. 주께서 나리의 운을 터주시는 날 이 계집종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를 보내시어 이렇게 만나게 해주셨으니,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찬양할 뿐이오. 33 그대는 사리를 참 잘 판단하였소. 하마터면 내 손이 원수를 갚으려다가 피를 볼 뻔했는데 오늘 이렇게 말려주어서 정말 고맙소. 34 그대가 재빨리 나를 만나 주지 않았던들 나발 집안에서는 모든 사내가 내일 아침까지 죽고 말았을 것이오. 그대를 해치지 않도록 나를 막아주신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 정녕 그렇게 되었을 것이오.” 35 다윗은 그 여자가 가져온 것을 받고 말하였다. “댁으로 평안히 돌아가시오. 내가 그대의 말을 듣고 요청을 들어주었소!” 36 그리하여 아비가일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나발은 왕이나 차릴 만한 잔치를 베풀고 흥에 겨워 취할 대로 취해 있었다. 아내는 날이 샐 때까지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37 그러다가 아침이 되어 술이 깬 뒤, 나발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그만 실신하여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38 열흘쯤 지나서 나발은 주께 벌을 받아 죽고 말았다.

39 나발의 죽음을 전해 듣고 다윗은 주님을 찬양하였다. “주님은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라. 나를 욕한 나발을 당신께서 몸소 문책하시고 나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게 막아 주셨다. 주께서는 나발의 죄를 본인에게 갚아 주셨다.”
응송1사무 25,32a. 33b; 마태 5,7
오늘 그대를 보내시어 이렇게 만나게 해주셨으니,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 그대는 오늘 이렇게 나를 말려 주어서, 내가 피 흘리는 죄과를 범치 않게 하고 내 손으로 보복하는 일을 막아 주었도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도다. 그들은 자비를 입게 되리라.
그대는.
제2독서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론에서 (Orat. 6 De beatitudinibus: PG 44,1266-1267)
하느님을 뵈오리라는 희망
하느님의 약속은 너무도 위대하여 행복의 최고 한계를 초월합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이 하느님을 봄으로써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좋은 것을 맛본 다음 무엇을 또 원하겠습니까? 사실 성서에서 “무엇을 본다.”라는 것은 “무엇을 가지다 - 누리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에서 “예루살렘의 번영을 누리게 하여 주시기를”이라는 뜻으로서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게 하시기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악한 자는 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쫓겨나리라.”라는 말씀에서 예언자가 “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라고 말할 때 그는 “주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게”라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이 보는 행위 안에서 이 세상에서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게 됩니다. 그는 끝없는 생명, 영원토록 부패하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행복, 영구한 나라, 끊임없는 기쁨, 참 빛, 감미로운 영신의 목소리, 도달할 수 없는 영광, 그리고 끝없이 지속하는 용약 - 한마디로 온갖 선을 얻습니다. 희망 속에 약속된 행복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이렇게 많고도 큽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을 보는 것은 마음의 순수성에 달려 있으므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순수성은 우리 본성을 능가하고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은 한번 더 현기증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을 보는 것이 이 순수성에 달려 있고 또 한편 모세와 바오로가 자기들이나 어떤 누구도 그분을 볼 수 없다고 말하듯이 자신들도 그분을 보지 못했다면 이제 말씀께서 우리에게 제안하시는 행복은 그전에도 성취되지 못했고 또 실제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보게 될 수 있는지 알아도 우리가 알게 된 그 목적을 이룰 힘이 없다면 우리에게 유익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흡사 이승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천국에서 보게 되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것은 복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말이 천국에 도달하는 방법까지 보여 주어야만 참으로 유익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천국에 이르지 못하는 동안에는 천국에 있는 것은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국의 행복을 알면서도 그것을 아직 얻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앗긴 것으로 느껴질 때 번뇌와 환멸이 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 인간 본성과 능력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것을 명하신단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날개를 주시지 않은 이들 보고 새가 되라고 명하시는 일이 없고 뭍에서 살게 되어 있는 조물 보고 물 속에서 살라고 명하시지도 않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 법은 그 피조물의 능력에 맞게 되어 있고 그 능력 이상의 것을 지키라고 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약속된 이 행복은 우리 능력으로 가능한 것임을 알아 그것을 이루는 데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도 바오로도 모세도 또 그들과 같은 다른 이들도 하느님을 보는 데에 존재하는 그 초월적 행복에서 누리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는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으며”, 모세는 “모든 이에 앞서 너를 알았노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들이 행복을 이루었다면, 그리고 행복이 하느님을 보는 데에 있고 또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다면, 행복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그 순수성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같은 분들이 하느님을 보는 것이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이 사실이라면,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바오로의 말과 모순이 되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응송시편 62(63),2bc. 16(17),15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나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뵈오리다. 깨어나 당신 영광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
하느님.
마침기도
기도합시다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다스리시는 주여, 우리로 하여금 항상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며,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그 뒤에 특히 공동으로 바칠 때에는 다음의 환호를 덧붙인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