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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 사설/칼럼
2019.06.26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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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만나지 못하는 두 세계와 보편적 공감
홍진 클라라(사회복지평론가)


영화 기생충이 한국 영화 첫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에 힘입어 특수를 누리고 있다. 굵직한 감독과 배우의 만남이라는 점 외에도 다양한 은유가 내포돼 다회차 관람 관객이 많다는 것이 흥행 비결이다.

영화에서는 중간 계급의 몰락으로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모순을 통찰과 풍자로 여과 없이 드러내 현실 삶 속에서 고민을 더 하게 한다.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동시대인들 간의 소통 부재와 불평등으로 인한 공존과 공유의 모순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현시대의 부자와 빈자는 동시대에 살면서도 거주의 영역이 단절되어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심지어는 서로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흐름에 따라 능력주의가 중시되면서 낮은 지위에 머무는 사람은 사회에 유용하지 못한 실패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능력주의 체제에서 주거의 최후 보루라고 불릴 만큼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빈곤한 사람들은 주거지로 가장 열악한 공간인 일명 쪽방을 선택한다.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2018년 말 기준으로 쪽방은 서울에만 3296가구에 이르며 쪽방을 포함하여 안전에 취약한 비주택에 거주하는 가구 수는 2005년 5만 7066가구에서 2015년 39만 3792가구로 7배 가까이 폭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분절적인 주거복지정책으로 인해 거주인들은 정책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다. 물론, 지자체는 환경개선정책과 임대지원사업 등 빈곤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이 가난 앞에 허술한 법 울타리 안에서 소유주들은 더욱 비정하게 갈 곳 없는 이들의 삶을 담보로 불로소득을 추출하는 재태크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기본 권리인 인간의 존엄성도 사회 경제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집단은 이익을 독점하는 반면, 어떤 집단은 불평등 아래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만 한다. 이런 특정 집단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우리 일상에서 경험되고, 지역사회에서 확인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부는 개인이나 집단이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들의 권리를 제약당하거나 박탈당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할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으며, 보다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동안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현대 사회의 경제 시스템을 여러 차례 비판하였다. 교황은 사회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를 새로운 독재라고 말하며 인간을 배제한 채 이익 극대화에 눈이 먼 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하여 가난한 이들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위선을 질타한 바 있다.

이는 모든 것이 경쟁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이면, 힘없는 이들은 희망도, 현실을 벗어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유보다는 나눔을, 경쟁보다는 상생을 추구하는 모두를 위한 경제 시스템 건설에 동참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정부는 주거복지정책과 더불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해 계층 간 연대와 협력을 할 수 있도록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들이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박탈감이 아닌 이미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을 받고 있음을 느끼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문화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