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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5 등록
[시사진단] 한반도에 평화라는 조건 달기(김태균, 그레고리오,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고 중국 시진핑 주석이 평양을 방문하는 등 일련의 행보를 통해 우리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식어버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엔진이 재가동된 것이 아니냐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이런 섣부른 희망은 북한의 완전한 핵 포기와 미국의 제재 해제를 한반도 평화의 최종 목표로 제한할수록 더욱 힘을 받게 된다.
북한의 완전한 핵 포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일 수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비핵화 달성뿐만 아니라 비핵화 이후의 남북한 관계와 한반도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적극적인 로드맵까지 포괄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반도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적극적 평화의 프레임에서 북미 관계를 수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주체로서 확고한 위치 설정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적극적 평화의 구체적인 상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조금 상상력을 동원해보자. 북미 간 종전 선언 또는 평화 선언이 선포되고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가 가동된다는 가정하에 다음 단계에서 한국이 주목해야 할 문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평화 선언 이후 북한에 대한 경제개발과 투자를 목적으로 몰려드는 공여국과 국제기구의 대북 지원일 것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 분쟁·재난 후 지역에 다양한 원조가 한꺼번에 몰려들 경우 결국에는 체계적인 관리의 실패와 개발 효과성의 저조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2015년 대규모 지진이 네팔을 급습했을 때 인도주의적 원조가 조율에 실패하여 오히려 재건 사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2016년에는 태풍 매튜 이후 아이티에 투입된 유엔 구호물자가 적절히 운영되지 못해 약탈의 대상이 된 쓰라린 경험도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원조 조정이 배제된다면 기존 실패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핵화 과정이나 그 이후 단계에서 중국, 미국, 일본 등의 대북 원조 투자가 체계적인 조율 과정이 생략된 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후죽순으로 투입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평화를 모든 대북 원조의 조건으로 적용하는 적극적인 평화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실제로, 유엔은 분쟁 이후 단계에 있는 국가의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지원하고 비효율적인 원조 배분을 통제하기 위하여 이른바 평화 조건(peace conditionality)을 그 국가에 투입되는 모든 원조와 투자에 일괄적으로 적용하여 왔다.
평화 조건은 일정 기간을 설정하고 이 기간에 제공되는 원조와 투자가 평화구축의 목적과 부합하게 사용되도록 유엔이 관리하고 조정하는 제도적 장치이다. 한반도에도 평화 선언 이후 이러한 조건을 북한에 투입되는 모든 형태의 원조와 투자에 실시할 필요가 있으며, 한국은 미리 제도적 절차에 관한 준비를 유엔과 협의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구에 따르면, 원조 대상국에 가장 영향력이 큰 국가가 유엔의 평화 조건 정책에 적극적으로 지지할 경우가 가장 핵심적인 성공 요건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공 사례로 잘 알려진 모잠비크 사례는 모잠비크의 오랜 식민제국이었던 포르투갈이 70년대 분쟁 이후 모잠비크 재건 원조에 평화 조건을 부여하는 유엔 정책에 동의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반도에서는 북한과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한 국가가 중국이라 할 수 있다면, 유엔의 평화 조건에 대한 중국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를 구축하고 공고화하는 과정은 북한의 개발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재원의 배분과 사용에 대한 정치적 협상과 설득의 기술까지 포함한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긴 호흡으로 보고 한반도에 평화라는 조건을 달기 위한 정당성과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우리가 얼마나 준비하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