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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사회 > 여론
2019.06.26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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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돋보기] ‘장소’를 잃어버린 실향민들
이학주 요한 크리소스토모(보도제작부 기자)


최노엘 할아버지는 올해 83세다.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평양 동대원리 504번지"라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가톨릭 집안인 할아버지 가족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1951년 1ㆍ4 후퇴 때. 지금으로부터 무려 70년 전 일이다. 그런데도 할아버지의 기억은 또렷했다. 대동강이 마치 어제 산책했던 한강이라도 되듯 생생히 묘사했다. "겨울에 대동강이 얼면 스케이트를 타곤 했어. 그런데 성당 빼먹고 놀아서 신부님한테 혼도 났어." 개구쟁이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냐고 묻자 "썩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뜻밖의 답변에 머쓱한 기분도 들었다. "내가 다녔던 성당이랑 학교가 다 없어졌을 것 아냐. 이제 거기에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는 안 남아 있을 거야."

"장소는 기억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추억이 담긴 장소도, 사랑했던 사람도 모두 사라진 평양.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평양과 지금의 평양은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장소인 셈이다. 막상 평양을 다시 찾았을 때 전혀 낯선 광경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는 않을까. 도리어 상실의 아픔만 재확인하게 되지는 않을까.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무엇 하나 가벼운 것이 없었다.

70년 동안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이북 실향민들. 그들의 슬픔과 회한은 깊고 깊다. 단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다. 설령 돌아간다더라도 예전의 그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이 아니라 장소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실향민들은 다시 고향을 찾아야 한다. 과거의 공간을 새로운 기억, 생생한 기억으로 채워야 한다. 마음속에 죽어 있던 고향을 되살리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화와 통일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온 겨레의 기도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