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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우리교구,대리구
가톨릭신문 2019.02.19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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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독립운동에 함께한 교구 내 교회 흔적들

3·1운동은 1919년 한반도 전역과 조선인이 거주하던 외국 곳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당시 한국교회 지도층은 신자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금지했다. 1919년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만세운동으로 불리는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의 만세운동 당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에도 천주교 신자가 없었다. 이런 연유로 한국교회는 독립운동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했다는 인식이 컸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당시는 아직 교구가 설정되기 전이었지만, 교구 지역에는 독립운동에 함께했던 교회의 기억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수원교회사연구소(소장 정종득 신부)의 도움을 받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교구 내 교회의 기록들을 찾아봤다.

■ 독립운동을 도운 공베르 신부

3·1운동에 선교사들은 부정적이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지배를 인정했고, 한국인 신자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금지했다. 그러나 안성본당 초대 주임 앙트완 공베르 신부(Antoine Gombert, 한국이름 공안국, 1875~1950)는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운 선교사다.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당시 안성지역 사람들은 안성본당의 주임으로 신자들뿐 아니라 지역 사회를 도와온 공베르 신부를 찾아왔다.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어떻게 전개하면 좋을지 묻자 "낮에는 국기를 들고 밤에는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조언했다. 뿐만 아니라 만세운동을 질서 있게 전개하려면 지휘자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천주교 신자인 김중묵을 만세운동의 지휘자로 추천했다.

공베르 신부는 만세운동으로 신자뿐 아니라 안성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베르 신부는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본인을 죽이지 마시오. 당신들은 지금 맨주먹이니 일본인을 한 명이라도 죽이면 당신들은 수백 명이 죽을 것이오. 건물도 부수지 마시오. 독립을 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고, 못해도 당신들이 짓게 되니 아예 건물도 부수지 마시오"라고 충고했다. 또 일본군에게 박해중지를 요청하기도 했다.

안성지역에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일본군이 군중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에 쫓긴 군중은 공베르 신부가 있는 안성성당으로 몰려왔다. 그러자 공베르 신부는 성당 마당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공베르 신부는 일본군에게 성당 구역에 대해 치외법권을 주장하면서 국제분쟁의 위협을 들어 접근을 막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보호했다.

당시 경성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독립운동 참여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공베르 신부는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대목구장의 뜻을 거스른 것이라기보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도움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만세운동 당시 뿐 아니라 한결같이 안성지역 사람들을 도왔다.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병자에게는 약을 나눴고, 성당 마당에 놀러온 어린이들에게는 자신이 재배한 포도를 나눠주며 어울리기도 했다. 또 가난한 농촌인 안성 지역 주민들을 자립시키기 위해 모국인 프랑스를 32차례나 오가며 포도 재배를 실험하고, 지역 주민들이 포도를 재배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공베르 신부는 2012년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신자들이 주도한 만세운동

3~4월에 걸쳐 교구 내 곳곳에서는 신자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신자들 가운데 광주의 김교영, 수원의 이순모, 용인의 한영규와 김운식 등은 체포돼 실형을 선고 받았다.

3월 27일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의 만세운동은 신자인 김교영이 이끌었다. 당시 62세였던 김교영은 오늘날 통장에 해당하는 구장(區長)을 맡고 있었다. 그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듣고 한국독립을 목적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이 만세운동에 모인 9명 중 5~6명은 천주교 신자였는데 모두 태형을 받고 풀려났다.

3월 29일 경기도 용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도 천주교 신자들이 이끌었다.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에 거주하던 신자 한영규와 김운식은 마을사람 100여 명을 모아 한영규가 소유하던 태극기를 들고 내사면 양지리를 향해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3일 수원군 장안면과 우정면의 만세운동도 이순모 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선두에 섰다. 이날 운동에 운집한 군중은 20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날 김선문, 안경덕, 김광옥, 최주팔 등의 신자들이 체포됐다 방면됐다.

이 만세운동들을 신자들이 주도했고, 일제가 만세운동의 인원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경향을 생각해볼 때 광주와 용인, 수원 지역의 만세운동도 실제로는 더 많은 신자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를 저술한 윤선자 교수는 "이순모가 주도했던 수원의 만세운동에 2000여 명이 참가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체포된 사람들 중 천주교 신자도 일제 자료에는 6명으로 기록돼 있지만 그보다 많았으리라 여겨진다"고 밝혔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