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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우리교구,대리구
2019.06.25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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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당 주보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한국교회의 첫 사제이자 순교자다.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난 성인은 신심 깊은 집안에서 자랐다. 성인의 증조부인 복자 김진후(비오)는 1814년에 순교했고, 성인의 아버지 성 김제준(이냐시오)도 1839년 9월 26일 순교했다.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던 성인의 가족은 성인이 7살 되던 무렵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떠난 성인의 가족은 경기도 용인 한덕골에서 머물렀고, 다시 골배마실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인은 골배마실에서 가까운 은이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곳에서 세례를 받고, 또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성인이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16세가 되던 해였다. 박해가 이어지던 시기, 신학생이 됐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제가 되는 길은 죽음보다도 더 큰 시련의 길이었다.

겨우 16세 소년이었던 성인은 은이에서 9000리, 약 3500㎞에 달하는 길을 걸어서 중국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까지 이동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신학을 공부해야했고, 1839년에는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해야 했다. 이 험난한 길에 함께 신학생으로서 유학을 떠난 최방제(프란치스코)는 병사를 하고 말았다.

신학생 시절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 입국을 시도해오던 성인은 부제품을 받은 후 마침내 한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인은 한양에 머물면서 신학생 선발, 지도 작성,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 수집, 안전한 가옥 매입 등을 수행했다. 그리고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다시 중국 상하이로 떠나 1845년 진자샹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사제가 된 성인은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상하이에서 라파엘호라는 작은 나무배를 타고 조선 입국을 시도한 성인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기도 했다. 조선에 입국도 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는 항해였지만, 성인은 포기하지 않고 결국 입국에 성공한다.

이후 성인은 은이를 거점으로 서울과 용인 지방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성인이 국내에서 사목활동을 한 기간은 불과 1년 정도다. 성인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연평도, 백령도, 순위도 등을 잇는 바닷길을 찾던 중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성인이 마카오에서 공부했음을 알게 된 조선정부는 중신회의를 열고 서울 포청으로 압송케 했다. 일부 대신들은 성인의 박학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을 보고 나라의 일꾼으로 쓰고자 했다. 그러나 성인이 배교의 강요에도 요동치 않자 사학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성인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인은 제1대리구 공도·매교동·양지본당과 제2대리구 광주·군자·능평·도척·명학·범계·양지·하안본당의 주보성인이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