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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4.17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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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올 주교 “제 인생도 이들처럼 마치기를 바랍니다”
사료로 보는 기해박해’ 공개 대학 - 페레올 주교의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 신주현 연구원(한국교회사연구소)
▲ 페레올 주교의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는 「기해일기」에 나오는 78위 순교자 중 7명이 빠지고 김성우 안토니오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진은 구산성지에 세워진 성 김성우 안토니오 동상. 가톨릭평화신문 DB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예비해 박해의 실상을 정리한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작성했다. 이 보고서 역시 현석문(가롤로) 등이 작성한 「기해일기」를 기초했다.

페레올 주교의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서 눈여겨볼 것은 형벌과 고문 도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기해일기」가 총론과 순교자 전기 두 부분으로 구성된 것과 달리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총론과 순교자 전기 사이에 순교자들에게 가해졌던 형구의 종류와 감옥, 사형 집행 모양 등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는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김대건 신부의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 간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형벌과 고문 도구에 관해 그림까지 그려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김 신부의 보고서처럼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비록 삽화는 없지만 아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해 작성됐다. 김대건 신부의 보고서 역시 같은 목적으로 쓰였다. 바로 이 점이 「기해일기」와 다른 점이다. 「기해일기」는 순교자들의 전기를 자세히 적어내는 데에 무게를 두고 작성됐기에 형벌이나 고문 도구에 관한 독립된 설명이 없다. 「기해일기」 작성 동기는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앵베르 주교의 뜻에 따른 것이다. 「기해일기」는 외국에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읽히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기해일기」와 순교자 숫자에 차이를 보인다. 「기해일기」에는 순교자 78위가 기록돼 있는 데 반해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는 순교자 72위를 소개하고 있다. 「기해일기」와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 모두 기록된 순교자는 총 71위이고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만 등장하는 순교자는 한 명 있다.

「기해일기」의 78위 순교자 중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 빠진 이는 유소사 체칠리아, 조 바르바라, 이성례 마리아, 최희득 필립보, 이 막달레나, 김 데레사, 손경서 안드레아 등 모두 7명이다. 이들이 제외된 이유는 일시적으로 배교했던 경험이 있었거나, 순교 사실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페레올 주교가 참고한 「기해일기」 초본에 이들이 빠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만 등장하는 순교자가 있다. 바로 김성우 안토니오이다. 그는 앵베르 주교나 김대건 신부의 순교 보고서에서는 물론 현존본 「기해일기」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에만 기록돼 있다.

▲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기해일기」나 다른 관찬자료에 비해 분석이 덜 이루어져 있으며 아직 연구자들의 활용도 역시 상대적으로 낮은 사료라 할 수 있다. 또한, 자료의 한계로 인해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은 인물이 페레올 주교이기도 하다.

페레올 주교는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의 마지막 문장을 "제 인생도 이들처럼 마치기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72위 순교자의 전기를 정리하면서 그가 느꼈던 진심이 확실하게 전달되는 문장이다. 앞으로 추가 연구를 통해 페레올 주교와 「1839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의 진가가 새롭게 조명되길 기대한다.

정리=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