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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복음/말씀 > 복음생각/생활
가톨릭평화신문 2018.10.04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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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수녀의 살다보면](34)다름, 그 자리가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




추석이 다가오면 우리 가족은 돌아가신 어머니 생신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했던 아픔이 떠오른다. 어머니께선 "바쁜데 뭘 오냐. 곧 추석인데…"라며, 가족이 모이는 걸 극구 말리셨다. 올해도 어김없이 오빠는 불효를 자책하며 "오늘은 돌아가신 어머니 생신입니다. 생전에 생신상 제대로 받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을 대변하듯 새벽부터 부슬비가 내리고 있네요"라는 글을 가족 채팅방에 올렸다. 언니도 "우찌 아침부터 ㅠㅠㅠ 부모님의 사랑이 보일 때는 이미 곁에 안 계신다 말이 맞아요~" 하며 푸념했다. 다른 가족도 이런저런 반응을 보였다. 물론 눈으로만 채팅하는 동생도 있다. 그럴 때면 말 한마디라도 남기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우리 가족은 8남매다. 부모님 기일이나 명절이 되면 가족이 다 모인다. 하지만 동생은 요직에 있어서인지 얼굴만 들이밀거나, 바빠서 그마저도 쉽지 않다. 우리 가족은 함께하는 것에 익숙하다. 매년 김장도 같이하고, 가끔 가족끼리 강원도 오빠 집에 모여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고, 밤새 추억에 잠긴다.

어느 해 추석, 조카가 성묘를 간 가족의 모습을 사진 찍어 가족 채팅방에 올렸다. 이런저런 글이 올라왔다. 그런데 동생이 불편했던 것 같다. 마치 성묘를 가지 않은 자신만 부모님과 가족을 덜 사랑한다는 평가를 받는 기분이었을까?

동생은 나에게 고뇌에 찬 글을 보내왔다.

"우리 가족은 함께 산 시간보다 서로 떨어진 세월이 더 길지요. 당연히 자신만의 상처와 기쁨, 절망의 빛깔도 다릅니다. 그건 사랑의 깊이가 다른 것이 아니고, 서로가 존재하는 이유와 방식의 차이겠지요. 어쩌면 더 복잡하고 미묘한 의식의 차별성이지요. 서로의 느낌과 감정을 알아채고 이해할 때, 우리는 진실로 사랑의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 많은 생각이 나의 머릿속에 맴돕니다. 엄마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도 저마다 다른 풍경을 갖는다는 것. 우리는 가족이지만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다는 것. 여기서부터 우리의 사랑이 시작돼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렇구나. 늘 조용히 뒷전에 있던 동생의 아프고도 아린 사랑이 느껴졌다. 물론 우리는 대놓고 동생의 다름을 책망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같이 하기를 강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함께는 같은 색이 아님을, 같음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조차 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동안 우리 가족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 커 서로 다른 상실의 빛깔을 헤아리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열심히 미사에 참여하고, 함께 성묘하고, 다 같이 가족모임에 참석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족이고 사랑이라며 무언의 압박을 보낸 건 아닐까?

명절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순례의 날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상에 부모를 두고 있는 우리는 가족이 어머니의 품이다. 품 안에서 우리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래서일까? 함께 만나 좋지만 갈등도 생긴다. 아이처럼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요구하고 집착한다. 가족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한 번쯤은 다른 형제의 자리에서 바라봤어야 했다. 내 자리가 너무 크면 다른 자리가 보이지 않는 법.

한걸음 뒤에 서서 보면 가족이라도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다는 게 보일 텐데.

다름, 그 자리가 바로 사랑이 시작하는 지점임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성찰하기



1 다른 사람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을 벗어요.

2 맨발이기에 늘 거닐던 땅과 느낌이 다르다는 걸 알게 돼요.

3 가족이라는 땅에 들어갈 땐 뛰어가고 싶은 유혹이 생겨요. 그러면 아파요.

4 맨발로 부드러운 걸음을 내디뎌야 발이 덜 아파요. 그리고 알게 되죠. 가족이라도 서 있는 자리가 참 다르다는 것을.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