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을 해주세요.

로그인
닫기
생명/생활/문화/ > 추천/서재
2019.06.12 등록
크게 원래대로 작게
글자크기
[영화의 향기 with CaFF] (22) 기생충 (PARASITE, 2019)
‘기생’을 ‘공생’으로 바꿀 선행과 나눔









 
▲ 영화 ‘기생충’ 포스터.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히브 13,16)



제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영화 ‘기생충’은 서로 다른 두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쪽에는 반지하에 사는 기택의 가족이 있다. 반복되는 실패를 겪은 가장 기택과 대학 입시에 수차례 실패한 후 백수로 지내고 있는 아들과 딸, 그다지 잘 풀리지 않은 운동선수 출신의 아내. 이렇게 네 명의 가족 구성원 모두는 직업을 잃은 상태로 휴대폰 요금을 못 낼 정도로 살기 막막하다. 다른 한쪽에는 높은 언덕 위에 근사한 저택에 살고 있는 박 사장의 가족이 있다. IT기업 CEO인 박 사장과 젊고 아름다운 아내, 귀여운 고등학생 딸과 어린 아들. 이상적인 가족처럼 보이는 세련된 도시 부유층을 형성한다.



일상에서는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어 보이는 두 가족이지만 기택의 장남 기우가 박 사장의 고등학생 딸 다혜의 영어 과외선생이 되면서 만남이 시작된다. 여기에 기우의 동생 기정이 박 사장의 아들 다송의 미술 치료를 맡게 되면서 되돌릴 수 없는 관계의 희비가 교차하며 자기 파괴적이며 비극적인 상황이 묘사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많고 적음으로 서로 다른 삶의 환경과 가치의 지배를 받게 된다. 반지하의 방과 언덕 위의 저택이라는 극단적으로 구분되는 공간처럼, 보이지 않지만 넘어갈 수 없는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면서 그 간격은 더 벌어지고, 그 차이는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제목인 ‘기생충’은 빈부 격차와 양극화의 문제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힘만으로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는, 그래서 공생이나 상생과 같은 인간 공동체의 관계가 무너져 누군가에게 ‘기생’해야만 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왜 이들은 누군가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을까?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은 자본주의의 밝은 면만을 강조하는 너무 순진한 대답일지 모른다. 부모 덕 없이 나름 열심히 살았지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어쩔 수 없이 계단 끝까지 끌려 내려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델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실현되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을 수 있었다.(사도 4,32-35 참조)



이러한 이상을 그대로 살아갈 수는 없지만, 가난과 빈곤에 시달리며 스스로 이를 극복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신앙인이 살아가야 하는 방식은 ‘공동선’의 가치로 개인적인 소유의 의미를 바라보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기쁘게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다.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며, 각자가 하느님 창조의 고유한 역할을 다할 수 있을 때 하늘나라의 신비는 우리가 속한 이 세상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 조용준 신부(성바오로 수도회, 가톨릭영화제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