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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 곡성 옥터(곡성 성당)

정해박해(丁亥迫害)


1827년(순조 27) 전라남도 곡성(谷城)에서 시작되어 전라도 전역, 경상도 상주(尙州), 충청도와 서울 일부 지역에서 약 3개월 동안 일어난 천주교 박해. 1815년의 을해박해(乙亥迫害)와 마찬가지로 이미 법령화되어 있던 박해령과 지방관들의 중앙 정부에 대한 과잉 충성이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되며 전국적으로 소규모의 박해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났지만 천주교 신자수는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었다. 천주교인들은 박해의 광경이나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신앙심을 다져 나갔다. 이들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나눔의 생활을 하였고, 지식인 신도들은 무식한 신도들에게 기도와 교리를 가르치며 교회 재건에 힘썼다. 특히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급 신자들은 북경을 왕래하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편, 19세기 초반 조선은 대흉년(1809)과 평안도 농민 전쟁(홍경래의 난, 1811)으로 인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다. 또한 각종 자연 재해와 더불어 당시 양반 지주나 지방 관리들의 수탈과 횡포로 삼정(三政 : 田政, 軍政, 還穀)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졌다. 게다가 순조(純祖) 즉위 후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이 들어서자, 관료 사회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부정부패가 깊어졌으며 관리들은 백성들의 어려운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생계의 터전을 잃은 백성들은 유랑생활을 시작하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대낮에도 도적들이 나타나 재물을 강탈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사회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처럼 삶의 여건이 힘들어진 일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이러한 현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제도적 장치나 정신적 위안처를 찾게 되었고, 당시 막 조선 땅에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있던 천주교가 이들의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자 이를 믿는 백성들이 증가하였다.

정해박해는 신자들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27년 2월 전남 곡성군 덕실현(현 전남 곡성군 오곡면 승법리) 마을의 옹기점에 전 아무개라는 신입교우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주막을 차려 놓았다. 한편 이 마을에는 한 토마스라는 유명한 순교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한백겸은 성질이 포악하고 행실이 좋지 못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백겸이 이 주막에서 술을 과하게 마시고 전씨의 부인에게 심한 욕설과 손찌검을 하자 남편 전씨가 홧김에 천주교 서적을 들고 곡성 현감을 찾아가 일부 천주교인들을 고발하였다. 곡성 현감은 즉시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이 잡혀갔으며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후 박해는 장성, 순창, 임실, 용담, 금산, 고산, 전주로 번져 전라도 일대가 모두 박해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약 240여 명으로, 관아에서는 이들을 모두 수감할 수 있는 감옥이 없어서 분산해 수용하였는데 심지어는 개인의 집에까지 가두기도 하였다.

신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다른 도에 거주하는 신자들의 이름이 밝혀짐에 따라 그 박해 규모가 확대되었다. 5월 17일(음 4월 22일) 상주에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검거되어 전주로 압송되고, 같은 고을 앵무당에 있던 교우촌이 밀고당하면서 경상도 지역에서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도 이경언(李景彦, 바오로)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 단양에서 역시 경상도의 박해를 피해 숨어 있던 신자들이 붙잡혀 충주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하여 서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서 2월부터 4월까지 체포된 신자들은 약 500명으로 전라도에 수감된 신태보,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 이일언(李日彦, 욥) 등 9명, 경상도에 수감된 박보록(朴甫祿, 바오로),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 안군심(安-, 리카르도),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 등 6명, 충청도에 수감된 유성태(劉性泰, 라우렌시오) 등 총 16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이들 가운데 정해박해 때 순교한 이들은 이경언, 박보록, 김세박, 안군심, 유성태, 김도명(金道明, 안드레아), 이성지(혹 李儒震, 세례자 요한), 이성삼(혹 李儒定, 요한) 등 8명으로 모두 옥사(獄死)하였으며, 나머지 8명의 신자들은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 때까지 수감되었다가 박해가 시작된 후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다른 박해에 비하여 정해박해에 이처럼 배교자가 많았던 것은 당시 전라 감사 김광문(金光文)이 독특한 방법으로 체포된 신자들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가능한 한 사형을 피하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대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도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처벌을 그쳤다. 또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형 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해서도 직접 칼을 들이대고 죽이기보다는 신자들을 무한정 옥에 수감하여 굶주림과 고통으로 죽게 하였다.

정해박해는 본래 천주교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기보다 천주교의 전교 수단인 서적과 성물을 근원적으로 막고자 하는 데 그 일차적인 목표가 있었다. 당시 집권층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을 뿐, 천주교 세력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이 비교적 천주교에 관대한 시파(時派)였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강도 높은 탄압을 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집권자들은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천주교보다는 계속되는 자연 재해와 민란, 이양선의 출몰에 있다고 인식하였고, 당시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 역시 되도록 형옥(刑獄)을 삼가는 입장이었다. 순조는 1832년 6월부터 7월 사이의 홍수로 큰 재산, 인명 피해가 잇따르자 이것이 자신의 부덕함 때문이라 자책하고, 7월 11일 각 도에 천주교 관계로 수감되어 있는 죄수 중 회개한 자들을 석박해 주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총 45명의 교우가 석방되었으나, 1827년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갇혀 있던 교우들 중 5명(김대권, 신태보, 이태권, 이일언, 정태봉)은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남아 있다가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출처 : 홍정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