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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 나주 무학당
나주의 천주교 박해와 순교자

신유박해(1801) 이전에 이미 나주에서 가까운 무안, 영광, 함평, 강진 등지에까지 천주교가 전파되어 있었고, 나주 진영의 관할 구역인 나주, 정읍, 무장, 장성 등 지역에 박해 시기 동안에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주에서도 상당한 수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나주에서 순교한 신자들이 총 4명만 확인되고 있다.

우선 기해박해(1839) 때 李춘화(베드로)가 나주에서 순교하였다. 이춘화에 관한 자료는 달레의 책에 수록되어 있는 짤막한 기사가 전부인데, 그것에 의하면, 이춘화는 공주 고을 태생으로 나주에 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 나주 고을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뒤 읍내 감옥에서 3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다음으로는 1871년 신미양요로 촉발된 박해로 강영원(바오로), 柳치성(안드레아), 柳문보(바오로) 세 사람이 나주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치명일기",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병인치명사적" 등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런데 이들 자료를 살펴보면, 1871년 박해 때 체포되어 나주 읍내 감옥에 갇혔던 신자들은 이들 순교자 세 명 외에도 林군명(니고나오), 최성화(崔聖和, 안드레아), 서윤경(徐潤敬, 안드레아) 등 세 명이 더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선 최성화는 순창 가마실 살다가 1871년 11월 26일 나주 포교 이성오와 정읍 포교 이치성에게 붙잡혀 정읍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여기서 먼저 잡혀 들어와 갇혀 있던 강영원과 임군명을 만났다. 그 다음날 그는 그 두 사람과 함께 나주로 이송되어 12월 초에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여기서 다시 먼저 잡혀 들어와 갇혀 있던 유치성과 유문보 등을 만나 함께 옥살이를 하다가 1872년 2월 10일 석방되어 나왔다. 순창 묵산리(墨山里)에 살고 있던 그는 1898년 11월 16일 자신이 감옥에서 보고들은 것을 토대로 세 순교자들에 관해 증언하였다.

서윤경은 장성 수도(修島)에 살다가 1871년 11월 13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여기서 먼저 잡혀 들어와 갇혀 있던 강영원, 유치성, 유문보 등을 만나 함께 옥살이를 하다가 뒤에 석방되어 나왔다. 진안 기도에 살고 있던 그는 1898년 11월 20일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토대로 세 순교자들에 관해 증언하였다.

임군명은 정읍 남면 이문동에 살던 사람으로 순교자 강영원이 머슴을 살고 있던 집 주인이었으며, 그의 집에서 강영원 등 교우 여러 명과 전도하고 있다가 그를 붙잡으러 온 포교에게 체포되어 강영원과 함께 정읍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여기서 뒤에 붙잡혀 들어온 최성화를 만났다. 그도 최성화․강영원 등과 함께 나주로 이송되어 12월 초에 읍내 감옥에 갇혔다가 뒤에 석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이들 세 사람은 배교자들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앙을 증거한 이야기가 어떤 증언 자료에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성화가 증언하면서 풀려난 사람들을 ‘죄인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서윤경과 임군명도 1872년 2월 10일 최성화와 함께 석방되었다고 이해된다.
 
다음으로 세 명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강영원은 그의 이름이 ‘성운’으로도 나오고 ‘영운’으로도 나온다. 그는 본래 충청도 홍산 사람으로 선대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며, 부형이 홍산 포교에게 잡혀 죽은 뒤에 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도망가 살았다. 그는 전라도 용담(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으로 가서 살다가 뒤에 다시 정읍 남면 이문동으로 가서 품을 팔며 살았다.
 
강영원의 세례명은 그와 함께 감옥에서 지내다가 석방되어 나온 최성화의 증언에는 ‘요셉’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다른 자료에는 모두 ‘바오로’로 표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요셉’은 감옥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다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이기 때문에 무시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26년이 지난 훗날의 증언이므로 세례명에 대한 그의 기억에 착오가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는 모두 ‘바오로’로 되어 있으며, 역시 감옥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다 풀려난 서윤경의 목격 증언에도 ‘바오로’로 밝혀져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세례명은 ‘바오로’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강영원이 체포될 당시 품팔이를 하고 있던 집이 ‘조 이냐시오의 집’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임군명(니고나오)의 집’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 가운데 ‘임군명(니고나오)의 집’으로 증언한 경우가 더 많고, 또한 그와 감옥에서 함께 생활하다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에도 그가 ‘임군명의 집’에 있다가 체포되었다고 밝혀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체포될 당시 품팔이를 하고 있던 집은 ‘임군명(니고나오)의 집’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강영원이 체포된 시기는 "치명일기" 791번과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정리번호 163번의 기록에 따라 모두 1871년 11월 23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다 풀려난 서윤경의 목격 증언에 보면, 그가 11월 13일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진영의 감옥에 갇혔을 때, 거기에는 강성원 · 유치성 · 유문보가 먼저 잡혀와 이미 형벌을 한 차례씩 당하고 갇혀 있었다고 밝혀져 있다. 이러한 서윤경의 증언이 맞는다면 강영원 · 유치성 · 유문보는 이미 11월 13일 이전에 체포되어 나주 읍내 감옥에 갇힌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서윤경의 증언은 역시 강영원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최성화의 증언과 모순된다.

최성화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11월 26일 나주 포교와 정읍 포교에게 잡혀 정읍 읍내 감옥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강영원과 임군명이 먼저 잡혀와 갇혀 있었으며, 그와 강영원 · 임군명 등은 12월 초에 나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에는 이미 유치경과 유문보가 먼저 잡혀와 갇혀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최성화의 증언은 서윤경의 증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또한 강영원이 체포된 시기를 11월 23일로 증언한 다른 자료들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강영원이 체포된 시기는 11월 23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서윤경이 증언하면서 12월 13일을 11월 13일로 잘못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시기를 12월 13일로 수정하면 다른 자료들과 모순되지 않고 잘 들어맞는다.
 
강영원이 순교한 장소는 여러 자료들에 무학당 앞이라고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를 처형하는 데 사용한 형벌의 종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견해가 엇갈려, 태장(笞杖)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는 설도 있고,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자료들마다 형벌의 종류가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인데,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는 자료도 있고, 매맞아 죽었다(杖斃, 장폐)는 자료도 있으며, 형장(刑杖)을 받아 치명했다는 자료도 있고,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는 자료나 매맞아 죽었다는 자료나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는 자료는 모두 전해들은 것을 가지고 증언한 것들이라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

그러나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는 자료는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서윤경의 목격 증언으로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서윤경은 자신의 증언 내용에 대해 “자신이 다 보아 알 뿐만 아니라 그 외에 포교에게 들어도 다름이 없다”고 덧붙여 그 신빙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강영원이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기 때문에,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그가 매맞아 죽었다거나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매맞아 죽었다는 증언과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는 증언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볼 때 강영원은 태장 30대를 맞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강영원이 순교한 날짜는 "치명일기" 791번의 기록에 따라 모두 1872년 3월 9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1872년 3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며, 1872년 1월 망념간(15일~20일)으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므로 그 자료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여러 자료들 가운데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와 1872년 1월 망념간으로 증언한 자료는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강영원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1872년 2월 12일에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 내용 가운데에 강영원과 유치성의 처형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증언에도 다 2월 이후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들은 1872년 2월 12일 이후에 처형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872년 3월로 증언한 자료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강영원이 품을 팔았던 집 주인을 조 이냐시오로 증언한 점에 모순이 있고, 1871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도 옥에서 병사한 유문보가 강원영․유치성과 한가지로 무학당 앞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고 증언한 점에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자료는 최성화의 목격 증언 내용과 모순되지 않으므로 믿고 따라야 할 것 같다. 이 가운데 날짜를 좀더 구체적으로 증언한 1872년 3월 9일을 강영원이 순교한 날짜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강영원이 순교할 당시의 나이는 51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근 60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이 가운데 51세로 증언한 예가 하나 더 많고 또한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51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음으로 유치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무장 암티점 사람인 유치성은 이름이 ‘치경’으로도 나온다. 그는 세례명이 안드레아였고, 교회에서 회장을 지냈다. 그는 본래 경상도 사람으로 그의 부모가 천주교를 믿다가 정해박해(1827) 때 유배를 가게 됨에 따라 고향을 떠나 충청도로 가서 오래 살았으며, 뒤에 전라도 무장 암티점으로 가서 살다가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그가 나주 포교에게 체포된 시기는 1871년 11월 22일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1년 10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어 다소 차이가 난다.

그런데 1871년 11월 22일로 증언한 자료는 그가 잡히는 것과 치명하는 것을 목격한 그의 아들 유군명(아우구스티노)이 재판 때 증인으로 나와 틀림이 없음을 확인한 것이므로 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 따라서 유치성이 체포된 시기는 1871년 11월 22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유치성이 순교한 장소는 여러 자료들에서 무학당 앞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를 처형하는 데 사용한 형벌의 종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둘로 나뉘어, 태형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으로 죽었다는 설도 있고, 돌에 맞아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이와 같이 견해가 다른 것은 자료들마다 형벌의 종류가 다르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인데, 돌에 맞아 죽었다는 자료도 있고, 매맞아 죽었다(杖斃, 장폐)는 자료도 있으며,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는 자료도 있고, 강영원과 마찬가지로, 즉 태형 30대를 맞고 백지사형으로 죽었다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강영원의 경우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여기서 돌로 쳐서 죽임을 당했다는 자료나 매맞아 죽었다는 자료나 형장을 받아 치명했다는 자료는 모두 전해들은 것을 가지고 증언한 것들이라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 반면에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는 자료는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서윤경의 목격 증언으로 신빙성이 높다. 그리고 유치성이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은 것은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매맞아 죽었다거나 장형을 받아 치명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유치성은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을 잃은 뒤 백지사형을 받아 죽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유치성이 순교한 날짜는 1872년 3월 9일로 보는 견해도 있고, 1872년 1월로 보는 주장도 있어 서로 차이가 난다. 이와 같이 견해가 서로 다른 것은 자료마다 그의 순교 날짜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1872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2년 3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며, 옥에 갇힌 지 다섯 달 후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며, 1872년 1월 망념간(15일-20일)으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이 여러 자료들 가운데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와 1872년 1월 망념간으로 증언한 자료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1872년 3월로 증언한 자료와 1871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다소 착오가 있기는 하지만, 옥에 갇힌 지 다섯 달 후로 증언한 자료와 합치되므로 믿고 따라야 할 것 같다. 특히 옥에 갇힌 지 다섯 달 후로 증언한 자료는 그가 잡히는 것과 치명하는 것을 목격한 그의 아들 유군명이 재판 때 증인으로 나와 틀림이 없음을 확인한 것이므로 신빙성이 크다. 이 둘 가운데 날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증언한 1872년 3월 9일을 유치성이 순교한 날짜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치성이 순교할 당시의 나이는 48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근 50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이 가운데 48세로 증언한 예가 하나 더 많고 또한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48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유문보에 대하여 살펴보자. 장성 삭별리 사람인 유문보는 이름이 ‘작객’으로도 나오고 ‘윤보’로도 나온다. 그의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그가 나주 포교에게 잡힌 시기는 "치명일기" 793번에 강영원과 한가지로 나주 포교에게 잡혔다고 언급되어 있는 것에 따라 거의 다 1871년 11월 23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된 시기를 1871년 11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하여 구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유문보가 강영원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치명일기" 793번의 내용은 사실과 잘 맞지 않은 것 같다. 강영원과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최성화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그는 1871년 11월 붙잡혀 정읍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그때 거기서 먼저 잡혀와 갇혀 있는 임군명과 강영원 두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 두 사람과 함께 나주로 이송되어 12월 초에 나주 읍내 감옥에 갇혔으며, 그때 거기서 다시 먼저 잡혀와 갇혀 있는 유치성과 유문보를 만났다.

여기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유문보와 강영원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체포되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같은 날 체포되었는지는 확인할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유문보가 체포된 시기를 "치명일기" 793번의 기록에 따라 1871년 11월 23일로 보는 견해는 사실과 잘 맞지 않는다. 그가 12월 초에 나주 읍내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은 분명하므로 11월로 증언한 자료에 따라 그가 체포된 시기는 1871년 11월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유문보가 순교한 장소는 모두 다 나주 읍내 감옥으로 이해하고 있다. "치명일기" 791번에  유문보가 강영원, 유치성 두 사람과 함께 무학당 앞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증언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치명일기" 79번을 제외하고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서윤경의 증언을 비롯하여 다른 자료들에는 그가 혹독한 형벌을 받고  병이 들어 감옥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의 순교 장소는 나주 읍내 감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유문보의 순교 날짜는 1871년 11월쯤으로 보는 주장도 있고, 1871년 2월로 보는 설도 있고, 1871년 12월 혹 1872년 1월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1872년 3월 15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서로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에 대한 견해가 다양한 것은 자료마다 그의 순교 날짜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1872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으며, 1871년 12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1871년 12월 혹은 1872년 1월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이 가운데 1872년 3월 9일로 증언한 자료는 "치명일기" 791번의 기록으로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잘못된 것이고, 1870년 2월로 증언한 자료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명백히 틀린 것이다. 또한 1871년 12월로 증언한 자료와 1871년 12월 혹은 1872년 1월로 증언한 자료도 신빙성이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1872년 2월 12일에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을 보면, 강영원 · 유치성 · 유문보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으나 유문보가 감옥에서 죽은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유문보가 감옥에서 순교한 시기는 그가 풀려난 2월 12일 이후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여러 자료들로 볼 때, 그가 강영원 · 유치성 두 사람보다 먼저 순교한 것이 분명하므로 그가 감옥에서 순교한 시기는 1872년 2월 12일에서 3월 9일 사이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유문보가 순교할 당시의 나이는 50여 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고, 근 60세로 증언한 자료도 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50여 세로 증언한 "치명일기" 793번의 기록에 따라 그의 순교 당시의 나이를 50여 세로 보고 있다. 그러나 "치명일기" 793번의 기록은 그의 체포 시기를 1871년 12월 3일로, 순교 시기를 1871년 12월 혹은 1872년 1월로 잘못 증언한 것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반면에 근 60세로 증언한 자료는 그와 함께 감옥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최성화의 목격 증언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따라서 그의 순교 당시의 나이는 최성화의 목격 증언에 따라 근 60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서종태,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나주 무학당 순교의 역사적 고찰 중 일부 발췌]
 
 
무학당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문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 하느님,
이 나라가 어둠과 불신의 늪에서 절망할 때,
주님은 순교자들이 귀한 피 흘려 민족 구원의 제단에
몸바치도록 허락하셨나이다.
 
무학당의 순교자 강영원, 유치성, 유문보는
추위와 굶주림, 생이별의 아픔 속에서도
천주신앙을 고백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쏟아지는 돌침 맞아 찢기고 부서진 사지로 거친 숨 몰아 쉬며,
교회와 겨레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깊게 하였나이다.
 
순교자들의 굳센 믿음은 우리 교회의 밑거름이 되었고,
순교자들의 간절한 소망은 현세에 찬란한 빛이 되고,
순교자들의 뜨거운 사랑은 영원한 삶을 얻는 생명수가 되나이다.
 
자애로우신 주 하느님,
당신은 무학당의 순교자들을 통하여
저희들에게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주시고,
묻힌 보화 같은 귀한 신앙을 찾아 드높이는
순교자 현양사업을 하도록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저희들이 순교정신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며,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 안에 거듭나게 하시고,
이 땅에 정의와 사랑, 평화가 넘치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순교자들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출처 : 나주 무학당 순교성지 홈페이지]
 
 
치명일기(致命日記)
 
1866년 병인년(丙寅年)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명단과 그 약전(略傳)을 수록한 책자. 책 크기는 가로 14.8㎝, 세로 21㎝이며 162페이지. 이 책은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1891년 2월 11년 만에 서울에 다시 들어오자마자 1866년 병인년(丙寅年) 이후 거듭된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착수, 4년 동안 전국에서 모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지역적으로 정리한 뒤 1895년 "치명일기"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인쇄하여 전국 본당에 배포한 것이다.
 
뮈텔 주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자는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은 숱한 순교자들 가운데 모범되게 순교한 사람들을 뽑아 장차 이들을 성인품에 올리기 위해 확실한 증거를 얻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인 성직자와 조선인 순교자들의 출생지 및 신앙상태, 잡힌 날짜와 장소, 치명일자와 장소 및 나이를 지역별로 일련번호를 붙여 엮었다.
 
총 877명의 순교자를 수록한 이 책자와, 1839년 기해년(己亥年) 순교자의 경우처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일성록"(日省錄) 등 관변문서에 나타난 기록 등을 근거로 하여 26명을 시복 수속하였는데 그 가운데 2명만이 탈락되고 24명이 1968년 복자위에 올랐으며 다시 1984년 5월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