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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 이승훈 베드로 묘(반주골)
이승훈(李承薰) 베드로(1756-1801년)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중의 한 사람. 세례명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晩泉). 본관은 평창(平昌). 이가환(李家煥)의 생질이며 정약용(丁若鏞)의 매부. 서울에서 태어났다. 178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던 중 이벽(李檗)과 사귀게 되어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
 
1783년 말 이벽의 권유로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 그곳의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서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중국명 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874년 초 교리서적, 십자고상, 상본(像本)을 갖고 귀국, 이벽, 정약전(丁若銓) · 정약용 형제, 권일신(權日身)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갖던 중 형조(刑曹)의 관헌에게 적발되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친척과 집안 식구들의 탄압으로 배교, 천주교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1787년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泮村, 현재의 惠化洞)에서 교리를 연구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1790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중국명 湯士選, ?~1808)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조상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鄕校)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西學書)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
 
1794년 12월(음)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듬해 6월(음) 최인길, 윤유일, 지황(池璜)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 이듬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義禁府)의 국청(鞫廳)에서 배교했으나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丁若鍾),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 후 1856년 아들 이신규(李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던 인물이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했고 가성직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장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그로부터 신앙을 찾은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李在誼)는 1866년에, 증손 이연구(李蓮龜), 이균구(李筠龜)는 1871년에 각각 순교하였다. 이승훈의 유고문집으로 ≪만천유고≫(蔓川遺稿)가 있다.
 
 
이신규(李身逵) 마티아(1794-1868년)
 
순교자. 세례명 마티아. 이승훈(李承薰)의 셋째아들. 정약용(丁若鏞)의 생질이 된다. 아버지 이승훈이 사형당한 후 얼마동안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문재(文才)와 의술에 뛰어난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용인(龍仁), 진천(鎭川) 등지로 피난하다가 그해 9월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학문과 의술의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서인지 또는 배교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석방되어 그 뒤 인천(仁川)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永宗島)로 가서 1846년까지 살았다. 1846년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관련이 되어 5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처음엔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결국 배교하고 1846년 8월 1일 석방되었다.
 
 
이재의(李在誼) 토마스(1785-1868년)
 
세례명 토마스. 이승훈(李承薰)의 손자. 강원도 정선(旌善) 출신. 정하상(丁夏祥)과 반년 가까이 동거하면서 교리를 배워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주교가 순교할 때까지 복사로 일하면서 주교를 도왔다. 김대건(金大建) 부제(副祭)가 입국할 때 의주(義州) 변문까지 가서 그를 영접하여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도록 인도했고, 김 부제가 중국 상해로 건너갈 때 동행하여 그 곳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교리를 더욱 깊이 연구한 뒤 페레올(Fereol, 高) 주교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홍주(洪州)로 피난하여 화를 면했으나 1846년에 체포되었을 때에는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1868년 4월 3일(음 5월 25일) 그는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신부를 국내로 인도해 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5월 28일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로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61세의 나이였다. [출처 :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