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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1821-1846)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 프란치스코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 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 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 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우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교의 명에 따라 황해도 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 성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는 부친. [출처 : 주교회의 홈페이지]



최초의 신학 유학생


조선조 헌종 2년(1836년) 섣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열 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그 일행 가운데는 15세 전후의 세 소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때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하던 프랑스인 모방(Maubant) 신부한테 뽑혀 머나먼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중이었다. 그들 세 명이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였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었음으로 모방 신부 자신이 숨어 다녀야 하는 처지였고, 따라서 어떠한 교육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신부들과 상의한 끝에 어린 소년들을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이 낳은 최초의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25년이란 짧은 기간이었고, 더욱이 사제로서 생활한 시간은 겨우 1년 남짓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오히려 최초의 신학 유학생으로서, 그리고 쇄국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로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의 유명한 천주교 집안에서 김제준과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무렵, 그는 조부 김택현과 양친을 따라 용인 땅 한덕골을 거쳐 골배마실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이미 그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천주교 신자로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을해박해(1815년) 때는 그의 증조모마저 참수되었으므로 더 이상 고향에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여행한 조선의 한양에서 중국의 남단 마카오까지는 9천리 남짓,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들만이 국경 통과가 허용되던 조선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먼 여행이었다. 그러나 조선을 떠난 소년 김대건은 동료들과 함께 중국인 신자들의 인도로 1837년 6월 7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마카오의 신학교 생활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839년 4월에는 그곳의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해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조차 좋지 않았다. 1839년에는 기해박해가 일어나 교회지도자들과 많은 신자들이 죽었고, 모방 신부도 새남터(현 용산 전철역 부근)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게 된 것이다.



입국로를 찾는 고난의 여행자

 

김대건의 신학교 생활을 5년 만에 끝을 맞게 되었다 1842년 2월 아편전쟁이 끝나갈 무렵 프랑스는 세실 함장이 이끄는 함선 두 척을 중국에 파견하였는데, 여기에 김대건과 최양업이 통역으로 승선하게 된 때문이다. 프랑스 신부들은 이것이 조선에 입국할 좋은 기회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를 이용한 조선 입국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김대건이 탄 에리곤호가 마닐라와 대만을 거쳐 넉 달 뒤 중국 오송구(吳松口)에 도착했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세실 함장이 북상을 포기한 결과였다.

 

조선 입국을 바라던 김대건 일행은 그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김대건 일행은 스스로 입국로를 찾기로 결정하고, 잠시 머무르던 상해를 떠나 요동으로 향해 나아갔다. 이때부터 김대건의 모험은 시작되었다. 조선 입국 때까지 2년 3개월여에 걸쳐 이루어진 이 모험으로 그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의지와 대담성이 더욱 강해졌으나, 뱃길 1만리, 육로 7천리의 길은 끝없는 고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요동 땅 백가점(百家店)에 머물던 김대건은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하고 조선 국경을 향해 나아갔다. 만주교구장이던 배롤 주교조차 조서 입국의 위험성을 설명하며 이 모험을 말렸지만, 억압받는 조선 신자들을 구제해야 하겠다는 일념을 단념시킬 수는 없었다.

 

김대건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 마리아의 도움에 맡기고 있었다. 이후 김대건은 1842년 말과 이듬해 3월 과 9월, 세 차례에 걸쳐 의주 변문(邊門)을 탐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날 수 있었고, 한때 조선 땅을 밟기도 하였다. 또 1844년부터는 동북쪽 국경을 통한 입국로를 찾기 시작하였는데, 두만강을 넘는 길이 변문 쪽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만주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되돌아가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페레올(Fereol)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여행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 마음대로 조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며칠을 지내는 길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리를 얼마나 잘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조국 땅을 밟는 것은 잠깐 동안, 그것도 중국사람 즉 외국인의 자격으로밖에 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인류라는 공통체가 형제 같은 입맞춤을 하며 하느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속에서 포옹할 날이 언제 오게 될지."

 

1844년 12월,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한데 장래가 촉망되는 신학생으로 인정을 받아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런 다음 김대건은 서둘러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들어가고자 했다. 조선의 신자들에 따르면 12월말이 조선 입국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고, 또 김 프란치스코라는 신자가 그들을 맞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해박해 이후 더욱 엄중해진 변문의 경계로 인해 서양 사람인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들어갈 수 없었고, 김대건 부제만이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따라 변문을 통과하였다.

 

페레올 주교와 함께 입국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김대건 부제는 1845년 1월 15일 다시 한양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지난 8년 동안 그리던 귀국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조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시와 박해의 위험뿐이었다.

 

한양에 도착한 즉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지시대로 앞으로 전교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신학생 선발, 조선 지도의 작성,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 안전한 가옥 매입 등이 짧은 기간에 그가 해낸 일이다. 여기에서 조선과 상해를 잇는 해로를 찾아내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러한 일들은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마침내 귀국하고 석 달쯤 되어 상해로 출발하는 배에 오르게 되었다.



사제서품과 영원한 귀향

 

조선을 떠난 지 한 달 남짓한 어려운 항해 끝에 김대건 일행은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와 새로 중국에 들어온 다블뤼(Daveluy) 신부를 만나 다시 조선에 입국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인 1845년 8월 17일, 김대건 부제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조국을 떠나면서 간직해 왔던 꿈을 마침내 이루게 된다. 이날 상해 부근의 금가항(金家港)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을 사제로 서품하였다. 이로써 김대건 소년은 조국을 떠난 지 8년 8개월 만에 한국 최초의 성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이것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고난을 예고하는 것이고 조선입국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상해를 떠난 지 40여 일 만인 10월 12일에 조선에 상륙할 수 있었다. 도중에 그들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기도 했지만, '라파엘호'는 마침내 강경부근의 황산포(黃山浦)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라파엘은 곧 여행자들의 주보(主保)로 존경을 받는 대천사의 이름이다.

 

조선에 다시 입국한 김대건 신부는 다음해 4월까지 서울과 용인 지방을 다니며 전교하였고, 여기에서 홀로된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다. 이어 그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새 입국로 개척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임무가 되고 말았다. 서울의 마포를 떠난 그의 일행이 연평도와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에 도착하였을 때 그곳 관헌들이 그를 체포한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3개월여의 옥중생활과 문초 끝에,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피로써 하느님의 은혜에 보답한 김대건 신부는 진정한 조선인 성직자였다. 그는 조국을 사랑하는 것이 곧 억압받는 조선인들을 하느님의 품안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갖가지 모험, 오랜 역경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또 그것들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그는 조국을 등지고 종교의 자유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언제나 조국 안에서 전교활동을 원하고 있었다. 옥중에서 그가 조선 교우들에게 남긴 다음의 한마디가 바로 이와 같은 의자(義子)로서 용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한몸 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출처 : 차기진, 경향잡지, 1996년 7월호]